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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가게들만이 불을 밝히고, 그 사이에 차들이 지나가는 모습
▲ 골목 몇몇 가게들만이 불을 밝히고, 그 사이에 차들이 지나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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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588. 어둠이 내리면 붉은 빛을 밝히는 거리. 하지만 이제 찾는 발걸음이 줄어들어 몇 안 되는 불빛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5년 전 성매매특별법으로 인한 단속 대란 후 청량리 588번지의 집창촌은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요 근래 동네가 더욱 한산해졌다. '청량리 균형발전촉진지구 사업'이라 불리는 도심 재개발 계획 때문이다.

2004년 당시 단속 중심의 성매매특별법의 취지는 성매매여성의 '인권 보호'였다. 하지만 이 법으로 인해 인권을 보장받기보다 '생존권의 위협'을 느낀 여성들은 마스크를 쓰고 직접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정책입안자들은 집창촌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사회를 '아름답게' 할 거라 믿었지만 그 결과는 별로 아름답지 않았다. 오히려 성매매는 음성적인 형태로 번져나갔다.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없애야 한다. 좋은 말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말들의 근거가 되는 기준은 무엇일까. 서울시가 아름다워지려면 이곳 청량리 588의 흔적들은 '제거' 되어야만 할까. 건물들이 철거된다 해도, 여기 588번지에는 철거 대상이 되어선 안 될 '사람들'이 살고 있다.

또 다른 붉은 빛의 십자가, 노숙인 쉼터 <희망의 집>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집, 노숙인 쉼터 가나안교회의 <희망의 집>은 거리의 한산함과는 달리 북적이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식사시간에 맞춰 급식을 먹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고, 어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TV를 본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젊어 보이는 분이 있어 나이를 물어보았더니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하고 사느냐며 빙긋이 웃는다.

가나안교회의 <희망의 집>은 1996년부터 이곳에 둥지를 틀고 노숙인들과 출소자들의 쉼터가 되었다. 당시에는 응급처방의 형태로 노숙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이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이들의 자활을 돕는 것이 사업의 주된 목표다. 이곳에는 200여 명의 노숙인들이 거주한다. 노숙인들은 이곳에서 하루 세 번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의료서비스와 일자리 정보를 얻는다.

많은 사람들은 노숙인을 일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 술을 먹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 구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노숙인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들이 노숙 생활을 하게 된 배경은 개인적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불우했던 성장과정과 사회의 불안정한 고용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들을 편견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숙자'가 아닌 '노숙인'이라는 명칭을 쓴다.

교회 옆 한 곳에만 불이 켜져 있는 한산한 거리
▲ 입구 교회 옆 한 곳에만 불이 켜져 있는 한산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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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들은 일 않고 구걸하는 사람?

<희망의 집>에서 10년 째 노숙인과 생활해 온 김수재 사무국장은 노숙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데 결정적 걸림돌이 되는 것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일을 해서 돈이 생긴다 해도 그걸 생산적으로 쓰려고 하기 보다는 또다시 술을 사먹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문제는 결국 '돈'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됐죠.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으면 사람이 의욕이 없을 수밖에 없어요. 꿈도 희망도 없었던 노숙인들은 자신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느꼈을 때, 그때부터 노력하기 시작해요."

김수재 사무국장은 '희망'이 이들에게 큰 힘을 발휘하는 순간들을 자주 목격해왔다.

희망의 집 게시판에 인문학강의를 수료한 노숙인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 사진 희망의 집 게시판에 인문학강의를 수료한 노숙인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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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노숙인들에게 인문학강의를 하고 있어요. 서울시립대와 연계해서 하는데, 사람들 반응이 정말 좋아요. 자신들이 역사, 철학 같은 걸 배운다는 사실에 많이들 즐거워해요."

희망과 더불어서 노숙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보람'이다. 노숙인들은 서울시에서 시행하는 희망근로에 참여한다. 하지만 단순노동으로 이루어진 희망근로보다 노숙인들이 더 좋아하는 일은 따로 있다. 바로 장애인의 재활을 도와주는 일이다.

"노숙인들이 직접 장애인들의 양말을 개주고 그들의 작업을 도와줘요. 사람들은 풀 뽑기, 쓰레기 줍기 같은 단순노동을 할 때보다 장애인시설에서 하는 일을 더 좋아해요. 자신들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느끼면서 일하는 즐거움, 삶의 의미를 되찾는 것 같아요."

노숙인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게으르고 한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역사와 철학에 대해 배울 수 있고,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뿐이었다.

법으로는 '인권보호', 실제로는 미적미적

노숙인 쉼터는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하고 민간에서 위탁운영을 하는 형태로 유지된다.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노숙인 복지는 노인, 장애인 복지에 비해서 훨씬 더 취약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 노숙인 복지 문제와 관련해서 요즘 정부의 움직임은 어떠할까.

"2005년 개정된 '부랑인·노숙인 보호시설 설치운영 규칙'이 2012년부터 시행될 거예요. 노숙인들의 인권을 위해서 수용시설의 면적이나 수용인원과 관련한 규정이 언급되어 있는 법이에요."

가나안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180명가량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거주하고 있는 노숙인은 200명이 넘는다. 이미 수용인원을 넘었기 때문에 더 많은 노숙인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시설면적과 수용인원을 규정하는 법은 노숙인의 인권보호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치다. 개정된 법은 시설면적과 수용인원에 대한 규정이 꽤 까다롭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쉼터는 폐쇄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의 시설들이 개정 법안의 조건을 맞출 수 있도록 지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마련을 위해서 법 시행을 2010년에서 2012년으로 2년 유예했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노숙인 쉼터 운영비는 지원하고 있지만, 건물과 관련한 예산조치는 계획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책으로 현재 새로운 시설을 민간으로부터 공모 중입니다."

서울시 자활지원팀의 입장이다.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질적 대책 마련을 정부와 지자체가 서로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민간으로부터 적당한 시설이 마련되지 않았을 때에 발생할 문제에 대해서는 서울시의 명확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희망의 집 건물 외관
▲ 건물 희망의 집 건물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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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재개발 되면 우린 어디로 가야 하죠?

가나안교회는 다른 노숙인 쉼터보다 더 곤란한 상황이다. 서울시를 '아름답고 살기 좋게' 만든다는 재개발 때문이다. 김수재 사무국장은 재개발계획 때문에 요즘 고민이 많다. 새롭게 시행될 관련법까지 고려해서 쉼터를 옮기려면 어림잡아 100억 정도가 필요할 거라 한다. 요즘의 시세에 200여 명 노숙인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건물을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100억.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다. 하지만 4대강 사업예산의 약 2200분의 1이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경제가 어려워도 희망을 가지라고 한다. 또 정부는 서민을 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재개발이 진행되면 <희망의 집>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서울시측은 재개발이 진행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서 고려해보겠다고만 했다. 그리고 아직 재정지원계획은 없다고 한다. 쉼터는 돈이 없고 정부는 계획이 없다. 김수재 사무국장도 현재로선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태다.

"있는 사람들이야 재개발 된다 그러면 이사할지 안할지 계획도 세우고 하지, 저희 같이 없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계획을 가질 수 있겠어요."

서울시내 1만㎡ 이상의 대규모 부지를 재개발 할 때는 전체 사업부지의 10~15%를 도로ㆍ광장 등의 공공시설로 기부채납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청량리 재개발 면적은 37만 844㎡ 다. <희망의 집>이 그 중 1% 아니, 0.5%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는 없을까.

누군가의 희망을 담보로 한 개발, 아름다울까

밥 먹고 가라고 하셨던 아저씨
▲ 아저씨 밥 먹고 가라고 하셨던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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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안 먹었으면 밥 먹고 가."

쉼터를 나설 때에 마주친 아저씨 한분이 말씀하셨다. 동네 어귀에 앉아서 길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던 한 할머니는 교회 위치를 묻자, 엉거주춤 일어나서 직접 교회 앞까지 데려다 주셨다. 고마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음료수를 드렸더니 '부담스러워서' 이런 걸 어떻게 받느냐고 하신다.

낙후되고 땅값이 낮아서 새로 뜯어 고쳐야 된다는 청량리 588번지. 집창촌과 노숙인 때문에 보기 아름답지 않아서 이제 없어져야 한다는 청량리 588번지.

서울시는 여기 청량리 588번지를 첨단과 문화와 녹색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이 지금 막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 사람들의 희망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첨단과 문화와 녹색이 넘쳐흐른다 해도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태그:#청량리588, #노숙인, #희망의집, #재개발, #사회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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