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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문화도, 문화산업도 습지처럼 생태계를 이룰 때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요즘 정부나 사회 모두 하도 '산업'이라는 관점에 경도되어 있어서 생태계 운운하는 게 오히려 한가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화를 생태계로 볼지, 산업으로 볼지, 그 관점은 매우 다릅니다. 생태계는 본질적으로 전문화되지 않고, 단순해지지도 않으며, 오히려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산업은 전문화, 단순화, 표준화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문화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내놓는 처방도 천양지차입니다. 산업적인 관점을 강조하시는 분들은 '스타'의 등장과 '대기업'이 주도하는 시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생태계적 관점을 갖고 계신 분들은 '인디문화', '독립영화', '창작자 집단' 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스크린쿼터 축소와 문화다양성 논쟁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산업론'과 '생태계론'이 가장 극명하게 부딪혔던 것은 2006년도 스크린쿼터 축소 논쟁이 한창 불붙었을 때였습니다. 당시가 참여정부 시절이었는데요, 작년 쇠고기 문제로 말도 탈도 많았던 바로 그 한미FTA가 그때도 한창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즉 미국이 FTA를 비준하는 조건으로 우리나라의 스크린쿼터제를 협상카드로 들고 나왔던 것이죠. 참여정부는 미국의 조건을 받아들여 스크린쿼터 축소를 결정했고, 그게 또 수많은 진보세력, 또 문화계 인사들이 참여정부에 등을 돌리게 만드는 빌미가 되었더랬습니다.

 

사실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 이후 한국영화는 상당 기간 슬럼프를 겪은 게 사실입니다. 점유율도 크게 줄었을 뿐만 아니라, 수익을 낸 영화가 몇년간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다행히 올해는 한국영화가 상당히 선전을 했습니다. 10월까지 누적 점유율이 52.3%라고 하니, 인도와 몇몇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뤄내지 못한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은 점유율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던 2006년에 이뤄졌습니다. 자국영화가 60%를 넘는데 무슨 놈의 스크린쿼터냐는 게 미국측의 주장이었고, 국내에서도 저 숫자 때문에 영화계를 제외하고는 스크린쿼터를 세게 주장하지 못했던 것이죠. 어쨌든 그 여파로 2007년엔 50% 밑으로 떨어졌고, 2008년에는 급기야 40%선도 무너지게 됩니다. 하지만 올 들어서는 절치부심했던 한국영화가 다시금 점유율 50%를 넘겼습니다.


시장권력에 방임된 영화


물론 이걸 보고 "거봐라 스크린쿼터 축소해도 잘 되지 않느냐"는 쪽과 "스크린쿼터 축소에도 불구하고 피눈물 흘리면서 이룬 성과"라는 쪽이 갈리긴 하겠죠. 그런데 올해의 이슈는 스크린쿼터가 아닌 '교차상영'으로 떠올랐죠. 웰메이드 영화로 알려진 <집행자>의 제작자와 주연이었던 조재현이 총대를 메면서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됐는데요, 실제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입니다.


스크린쿼터 축소로 이미 스크린에 대한 통제권을 상당 부분 놔버린 문화부가 다시금 규제의 칼을 쥐기는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영화관을 이미 문화가 아닌 '사업장'으로 인정해버린 마당에, 정부가 다시금 교차상영 문제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사업자의 경영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올해 초 독립영화였던 <워낭소리>가 크게 선전하면서 '다양성'이 매우 중요한 가치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됐고, 이후 <똥파리>와 같은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 측면이 있습니다만, 과연 그런 몇몇 사례들 때문에 멀티플렉스 사업자들이 마음을 고쳐 먹을까요? 장사꾼에게 양심과 공익을 호소하는 것만큼 허황된 주문이 또 있을까요?


이야기가 옆으로 좀 샜습니다만, 영화라는 장르에 한정해서 본다면 지금 당장의 습지는 '영화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습지를 중심으로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처럼, 영화산업 관계자들은 영화관에서 발생하는 수익에 기대어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DVD시장도 기대를 모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는 시장으로 전락해버렸죠. 그만큼 영화인들의 스크린 의존도는 더 심해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습지라는 게 그리 썩 건강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습지는 습진데, 자체 정화력이 떨어져 수질이 나빠진 그런 습지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좀 덜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칼날이 날아옵니다. 고생고생해서 만들어놓은 영화도 영화관에서 '아니다'는 평가를 받게 되면 아예 걸리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합니다.

 

돈 잘 될 것 같은 것만 고르다보니, 먹고 살만한 영화사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나마 영화진흥위원회 같은 데서 나오는 지원금이라도 없으면, 금방이라도 문을 닫아야 할 곳이 모르긴 해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멀티플렉스 사업자들의 마음이 바뀌기를 정화수라도 떠놓고 기도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 앞에 가서 머리띠 두르고 단식농성이라도 해야 할까요? 저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도 '주인'이 아니라 '종업원'과 진배없기 때문입니다.


그분들도 항상 모기업의 눈치를 보고, 그 실적에 따라 목이 왔다갔다 하는 분들입니다. 그분들도 개인으로 보면 문화적인 소양도 깊고, 인성적으로도 참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일단 조직에 몸담게 되면, 개인의 덕성이 조직의 논리를 이겨낼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을 뒤집으려면, '양심적인 각성'이 아니라 '실질적인 데이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운로드 시장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래서 저는 영화의 습지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금 막 태동하고 있는 '다운로드 시장'을 잘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DVD 시장은 이미 국내에서 거의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대신 다운로드 시장은 얼마든지 가능성을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다행히 그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게 그나마 영화시장에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씨네21> 아닙니까? 아무래도 대기업이 하는 거랑은 좀 다르게 접근하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착한(?) <씨네21>이 해서 다운로드 시장이 전망이 밝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소비자들이 들고다니는 휴대폰이나, 다양한 기기들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든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시장, 즉 고성능 휴대폰이나 모바일기기를 구입하는 소비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운로드 시장이 커질 수 있다는 희망의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관 사업자들이 중간에서 장난을 쳐버리면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영화관 시장과 달리, 다운로드 시장은 영화제작자와 소비자가 중간 유통사업자의 개입을 최소화시키면서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차상영한다고 거품 물 일도 없고, 극장에서 안 걸어주면 어쩌나 조바심 낼 필요도 없습니다. 오로지 콘텐츠만 좋다면 소비자의 선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시장입니다.


만약 이 시장이 제대로 활성화된다면, 수질이 나빠진 영화관 습지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소비자 반응만 있어도, 거기서 발생한 매출을 가지고 가난한 제작자가 다시금 자기 작품을 만들어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수질의 습지가 형성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몇 가지 조건이 잘 맞아야 하겠지요.


첫째, 유통 플랫폼을 제공하는 사업자가(예를 들어 <씨네21> 같은) 자기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지나치게 많은 이익을 가져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애플의 앱스토어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자기네가 적게 갖고, 개발자에게 70%의 이익을 돌려주는 획기적인 모델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작자에게 충분히 보상이 돌아가는 합리적인 모델이 만들어질 때 습지를 유지할 수 있는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소비자 편의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DRM(Digital Right Management) 문제인데요, 저작권을 보호한답시고 DRM을 덕지덕지 붙여놓으면, 필연적으로 소비자의 외면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쉽고 간단한 얘기인데요, 제가 분명히 돈을 주고 다운로드 받았는데, 그게 제가 갖고 있는 핸드폰이나 모바일 기기에서 DRM 때문에 안 돌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또 지금 당장은 돌아가는데, 제가 다른 모바일기기로 교체했을 때 거기서는 또 안 돌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순간 돈 주고 산 그 콘텐츠는 쓰레기가 되어버립니다. 과연 그런 시장이 성장할 수 있을까요?


셋째, 가격을 잘 정해야 합니다. 콘텐츠 권리자들은 자기 콘텐츠가 마치 자식과도 같기 때문에 무조건 높게 받으려는 욕심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너무 높게 책정해서 소비자가 외면한다면, 그 또한 실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문제입니다. 소비자의 저항감을 최소화하면서도 적정한 가격 수준을 찾아내는 것, 이런 과제는 제 생각에는 정부쪽에서 연구과제로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넷째, 서비스 사업자들도 경쟁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시장이든 누군가가 독과점을 형성하게 되면, 거의 필연적으로 시장왜곡이 일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영화 다운로드 서비스를 누군가가 독점하게 하기보다는 다양한 사업자들이 뛰어들 수 있도록 해서, 서비스경쟁이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거죠.


데이터가 있으면 장사꾼도 설득할 수 있어


이상으로 어설프게나마 썰을 좀 풀어봤습니다. 저는 솔직히 영화 다운로드 시장에 거는 기대가 매우 큽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의 영화판은 멀티플렉스 사업자들이 쥐락펴락하는 시장으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제작자와 소비자의 중간에 서서, 자기들의 그 잘난 판단력으로 이리저리 재단하고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습지는 물론이고 연못도 제대로 만들어지기 어렵습니다.


만약 다운로드 시장이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저는 오히려 이쪽 데이터가 멀티플렉스 시장을 건전하게 만드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올해 우리가 <워낭소리>를 보며 경험했던 것처럼, 방귀께나 뀐다는 전문가들의 예측과 판단이 얼마나 허술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운로드 시장에서 영화가 소비자와 직접 만남으로써 생겨나는 구체적인 데이터는 멀티플렉스 사업자의 판단을 수정하는 데도 일조하지 않을까요? 그들의 양심이 아니라 구체적인 데이터가 있다면, 장사꾼들은 얼마든지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영화 다운로드 시장을 열어가는 여러분들이 습지를 제대로, 또 잘 만들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 블로그(timshel.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영화, #생태계, #스크린쿼터, #멀티플렉스,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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