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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발굴조사는 어디에서 이뤄졌을까? 고고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자주 내는 퀴즈 중 하나지만 이에 대해 쉽게 대답하는 이는 몇 없다. 사실 이 문제의 답은 2개다. 하나는 김해 회현리패총,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경주 호우총이다.

 

김해 회현리패총 발굴조사는 대한제국 시기에 이뤄졌다. 하지만 말이 대한제국이지, 사실상 일본인들에 의한 발굴이었다. 1907년 일본인인 이마니시 류가 처음 발견하여 조사하였고 이게 학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경주 호우총은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난 뒤에 처음으로 발굴된 유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46년 5월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과 마지막 조선총독부박물관장이었던 아리미쓰 교이치에 의하여 발굴된 호우총은 신라 무덤에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이름이 담긴 청동그릇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정답은 2개지만 두 발굴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이 중에서도 회현리패총은 비록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발굴되었고, 이후 일본인들의 잦은 조사가 있었지만 한국 고고학사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 땅에서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졌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으며 패총 유적의 발굴로 1~4세기 당시 생활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회현리패총

 

패총 세부 모습 회현리패총 전시관 내부에 보이는 패총 층위의 모습. 이런 조개껍데기가 6m정도 쌓여있다

1907년 이마니시 류가 조사를 한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조사가 되었다. 1914년 도리이 류조, 1915년에 구로이타 가쓰미에 의해 각각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1920년에 하마다 고사쿠와 우메하라 스에지에 의하여 조사가 이뤄진다.

 

이때 조사된 바에 의하면 패총의 조개껍데기 퇴적은 상층과 하층의 구별이 뚜렷하였지만 출토된 유물의 내용 면에서는 특별한 차이를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개껍데기의 종류는 굴, 백합 등 34종과 4종의 갑각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1933년 8월 27일 조선총독부에서 문화재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이때 '김해 회현리 패총'이라는 정식 이름이 붙여진다. 그리고 또다시 1934년과 1935년에 가야모토 노리토에 의하여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져 유적의 성격을 명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이때는 주로 무덤들을 발굴하였는데, 고인돌 1기, 돌널무덤 5기, 독무덤 3기와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발굴방법에 문제가 있어 층위에 따른 유물의 성격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있다. 당시에 사용된 방식은 계단식조사방법인데 층위를 게단식으로 드러내어 조사한 방법이다. 이 경우 위의 층위은 후대의 것, 아래의 층위은 선대의 것이라고 전제하고 연구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당시로서는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서 본다면 여러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 바로 자연층위의 특수성을 무시하거나 층위의 교란 등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이 없다는 점이다.

 
회현리패총 봉황동유적의 한쪽에 있는 회현리패총의 모습.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뤄진 곳이다.(사적 제 2호)
 

해방 이후에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1월 21일 사적 2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에 반해 봉황대구릉은 1983년 경남문화재자료 87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시굴조사가 이뤄졌다. 그리고 부산대학교,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경남고고학연구소 등에서 수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2001년 2월 5일 회현리패총과 더불어 '김해 봉황대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김해 회현리패총은 지금의 봉황동유적에 포함되어 있으며, 유적의 규모는 동서 길이가 130m, 남북 너비가 약 30m쯤 되며 퇴적층의 높이는 6~7m 정도가 된다. 조개껍데기는 구릉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에 집중적으로 두껍게 쌓여있는 반면, 동쪽과 북쪽 정상부는 얇게 깔려있다. 이곳은 낙동강 하류의 충적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구릉인데,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이 앞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이고, 조개채취도 용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원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지역을 대표하는 김해식토기

 

복골 회현리패총 내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당시 점을 치기 위해 동물의 뼈에 문양을 새겨놓은 것이다.

 

회현리패총에서는 수많은 조개껍데기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크게 나누어보면 토기, 골각패제품, 중국계유물, 일본계유물 등이 있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의 생활풍습이나 자연 환경 등을 규명할 수 있다.

 

일단 식생활자료로는 조가비와 짐승뼈, 그리고 불탄쌀이 발견되었다. 이중 어류로는 상어, 돔, 고래, 거북이 등이 발견되었으며 조류로는 기러기, 오리, 꿩, 닭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육상동물로서는 멧돼지, 사슴, 노루, 개, 소, 말 등이 발견되었으며, 조개류로는 굴, 꼬막, 담치, 홍합, 소라, 고등, 백합, 다슬기 등이 발견되었다. 불탄쌀의 경우 조가비층 아래에서 나왔는데 낱알의 생김새는 길이가 짧은 편이다. 이를 보아 당시도 오늘날처럼 다양한 생물들을 섭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패총에서는 당시 생활 및 문화활동에 사용했던 토기들도 여럿 발견되었는데 주로 취사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골각패제품, 즉 뼈나 뿔, 조개 등을 이용하여 만든 제품으로 복골, 골촉, 침, 소형칼자루, 장신구 등도 발견되었다. 또한 국제교류와 관련한 중국계유물도 발견되었는데 화천, 청동경이 있다. 그리고 흔히 일본계유물로 알려진 야요이토기와 하지키 등 다양한 인공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 외에도 각종 철기나 유리옥, 석기, 가락바퀴 등도 발견되었다. 이렇게 당시엔 다양한 자연유물도 같이 출토되어 생활풍습과 자연환경 등의 해명에 중요한 근거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김해식토기 부산 노포동 35호분에서 출토된 김해식토기로 높이는 26.0cm이다. 한강 이남지역에서 1~3세기를 대표하는 토기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유물은 소위 '김해토기'라고 불리는 '김해식토기'이다. 김해식토기는 한강 이남지역에서 서기 1~3세기를 대표하는 토기인데, 그 토기의 빛깔이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띈다. 토기의 형태로는 항아리, 독,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잔 등이 있는데 주로 경질로 구워진 것이다. 토기를 만들 때는 권상법이나 윤적법을 사용하여 만든다. 여기에서 권상법(捲上法)은 점토가락을 길게 돌려가며 쌓아서 그릇 벽을 만드는 수법이며, 윤적법(輪積法)은 점토로 된 태를 한단씩 쌓아 올려 그릇 벽을 만드는 수법이다.

 

그렇게 토기를 만들고 난 후엔 표면에 물손질하여 문지르거나, 판자나 실 같은 막대기로 두드리기, 대칼 같은 기구를 이용하여 깎아내기 등을 사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표현엔 다양한 무늬가 새겨진다. 이러한 김해식토기는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 토기의 중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토기들이 뒤에 가야토기와 신라토기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엔 쓰레기, 오늘날에는 귀중한 자료

 

회현리패총 전시관 입구 봉황동유적 한쪽에는 회현리패총을 볼 수 있도록 전시관을 마련해 놓고 있다. 이 전시관을 통하여 가야시대 패총을 볼 수 있다

 

회현리패총은 앞서 말했듯이 봉황동유적 중에서 한쪽에 치우쳐져있다. 현재 이곳은 전시관이라고 하여 당시 조개무지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다. 자그마한 건물인 전시관을 자동문으로 열고 들어가면 회현리패총의 단면을 볼 수 있다. 6~7m에 달하는 조개무지가 위아래로 펼쳐진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인데, 이는 고대인들이 그만큼 많은 조개들을 섭취하고 또 이를 모아 놓았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패총은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유적들이 있으며 주로 해안가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내륙에서도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창녕 비봉리패총이다. 이 경우는 당시 내륙까지 바닷물이 들어온 증거로 보고 있으며, 해안가에 발견되는 예에 비해서는 소수이다. 하지만 이를 통하여 당시 해수면의 변화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크다.

 

패총은 생활유적이다. 당시 사람들이 먹고 던져버린 쓰레기들이 쌓이고 쌓여서 퇴적된 것인데, 그 중에서 조개껍데기가 다수이기 때문에 패총, 즉 조개무지라고 부른다. 앞서 말한 수많은 유물들은 이 패총 속에서 출토된 것으로서 당시에는 무심코 버린 쓰레기들이 오늘날 와서는 귀중한 자료로서 취급받으니 아이러니하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패총은 단순한 쓰레기더미라고만 볼 수 없다. 상노대도, 욕지도, 연대도 등지에서 발견된 패총의 경우에는 인골이 남아있는 무덤이 출토된다. 이러한 예는 신석기시대에 해당하지만, 이런 식으로 패총에는 당시 사람들도 어느 정도의 의미부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회현리패총은 그 유적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지지 못하여 아쉬운 면을 남긴다. 아무래도 고고학 관련의 인사들 외엔 그렇게까지 크게 관심이 있지 않고, 봉황동유적에서도 한쪽에 치우쳐져 있다 보니 다소 외면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유적의 중요성을 널리 홍보하고, 또 자세하고 풍부한 설명과 여러 실물자료들을 보여주면 답사객들에게 김해의 중요 코스 중 하나로 인식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덧붙이는 글 | 봉황동유적 중 회현리패총에 대해 자세히 다루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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