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 남학생이 학원수업을 마치고 바삐 걸어가고 있다.
▲ 신림동 고시촌의 길거리 풍경 한 남학생이 학원수업을 마치고 바삐 걸어가고 있다.
ⓒ 최슬연

관련사진보기


"이번 정류소는 신림동 고시촌입니다."
버스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기자는 우리은행 앞에서 내렸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 몇 명이 삼선 슬리퍼를 끌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일순 말로만 듣던 고시촌의 느낌이 확 풍겨왔다. 기자가 취재를 하러 갔던 20일은 마침 사법고시 1차 시험을 100일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신림동 고시생들은 유난히 예민하고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차려입고 나왔지만 취재를 하는 동안 청바지라도 입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곳 분위기는 신상, 유행,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늘어난 트레이닝 바지와 몇 겹으로 대충 껴입은 점퍼 등이 종종 눈에 띄었다. 이 곳 고시촌이 아니면 동네 시장을 갈 때조차 엄두도 못 낼 패션이었다. 기자는 이 곳 풍경과 고시생들의 생활을 좀더 밀착취재하기로 하였다.

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 신림동 고시촌의 학원 풍경 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 최슬연

관련사진보기


한 남학생이 학원 게시판에 붙은 모의고사 점수를 확인하고 있다.
▲ 신림동 고시촌의 학원 풍경 한 남학생이 학원 게시판에 붙은 모의고사 점수를 확인하고 있다.
ⓒ 최슬연

관련사진보기


세뇌와 반복만이 살아남는 길

사법고시를 준비하는데 있어 각종 학설과 판례를 익히는 것은 중요하다. 방대한 분량의 학설과 판례를 익히려면 입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을 거듭해야 한다. 그렇기에 고시합격생들의 합격수기를 읽어보면 온통 세뇌와 반복학습이란 말이 도배되어 있다. 한 예로 이 곳 고시촌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취재하러 간 곳은 법학원과 독서실이었다. 그런데 신림동의 어느 유명한 법학원에 들어서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염불소리 같기도 하고 새벽 어시장에 장사꾼이 흥정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자세히 알아보니 강사가 용어를 반복적으로 읽는 소리였다.

이 곳 수강생 최대웅(23)씨는 "반복적인 청취가 중요하다."며 "세뇌식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외우게 된다"고 말했다. 독서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숨 쉬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빽빽한 글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법고시 1차를 통과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인 안태광(22)씨는 "개인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시험에 통과하려면 헌법, 민법, 형법 같은 필수과목은 최소 3회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통 책 한 권당 평균 850페이지정도 된다. 또 그는 "법학은 공부할 게 많고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2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 책상과 침대만 놓여있다.
▲ 고시원 내부 2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 책상과 침대만 놓여있다.
ⓒ 최슬연

관련사진보기


학원에서 강의를 들을 때와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을 여기서 보낸다.
▲ 독서실 내부 학원에서 강의를 들을 때와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을 여기서 보낸다.
ⓒ 최슬연

관련사진보기


2평짜리 방에서 꿈꾸는 커다란 희망

취재하다 만난 고시생 최대웅(23)씨에게 "방을 좀 볼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처음엔 망설이더니 이내 고시원 쪽으로 안내를 했다. 학원과 독서실이 밀집되어 있는 곳에서 한참을 비탈진 길을 따라 올라가야 했다. 최씨의 고시원은 신림9동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왜 고시촌 입구에 이사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 왔냐?"고 물어보자 그는 "고시촌 입구로 내려갈수록 가격이 비싸다"고 말했다.

2평 정도의 공간에는 책상과 침대만이 놓여있었다. 가구는 별로 없었지만 공간이 좁아서 인지 촬영하는 동안 이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침 일찍 학원에 가서 하루 종일 독서실에 있다가 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큰 불편함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생 바라던 꿈을 이룰 수 있다면 이 정도의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했다.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묻자 "여기 학생들은 거의 다 식당에서 사먹는다"며 "한꺼번에 식권을 구매하면 더 싼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식사는 한 끼에 2600원 정도다.

어디 식당이 제일 맛있냐는 질문에 옆에 있던 친구 이지은(23)씨가 "무명식당이 제일 맛있다"고 거들었다. 그는 "부산에서 와서 집에 자주 못 가는데 그 곳 밥이 엄마가 해 준 밥맛이랑 똑같다"고 덧붙였다. 또 최씨와 이씨는 "보통 식당마다 튀김이나 고기반찬이 자주 나온다"고 했다.

기자는 이곳을 취재하면서 카페가 참 많다는 점에 놀랐다. 골목마다 카페 하나씩은 눈에 띄었는데 몇몇 학생들끼리 모여 학원얘기도 나누고 연애얘기도 나누었다. 커피 한 잔당 1000~2500원 정도 하는 비교적 싼 가격에 분위기도 여유로워 보였다.

고시생들이 공부를 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 휴게실 고시생들이 공부를 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최슬연

관련사진보기


대부분의 학생들이 동영상 강의를 듣고 있다.
▲ 휴게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동영상 강의를 듣고 있다.
ⓒ 최슬연

관련사진보기


운동은 필수, 취미생활도 가져

"공부 외에 특별히 하는 것 있냐?"는 질문에 이곳에서 3년째 공부 중인 고시생 조상욱(가명, 28)씨가 "특별히 하는 건 없고 주로 운동을 한다"고 했다. 조씨는 "고시 공부는 보통 장기적으로 하기 때문에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며 "틈틈이 운동을 해 체력을 키워준다"고 했다.

또 그는 "외부의 친구들과는 거의 연락을 끊은 지 오래다."라며 "외로울 때면 가끔 술집에서 여자들과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기자가 취미생활에 대해 물어보자 조씨는 멋쩍은 듯이 웃으며 "취미까지는 아니고 그냥 축구나 영화를 컴퓨터로 다운받아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취미생활은 공부하다가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데 중요하다"며 "이곳에서 절반가량은 각자 취미생활을 갖고 있다"고 했다.

각종 법학 서적들로 가득하다.
▲ 신림동 고시촌의 서점 각종 법학 서적들로 가득하다.
ⓒ 최슬연

관련사진보기


2009년부터 로스쿨이 도입되면서 이 곳 분위기도 어수선해졌다. 기존에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이들도 고시준비를 계속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2017년이면 사법고시가 폐지될 예정이고 점차 고시로 뽑는 법조인 비율을 줄인다니 고시생들이 혼란을 겪는 건 당연했다.

취재를 하면서 어쩌면 민감할 수도 있는 질문이나 요구를 들어준 이들이 고마웠다. 대부분 사법고시 1차 시험을 100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기자는 "힘내라. 꼭 꿈을 이루길 바란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기자도 수능을 보았고 지금은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지만 시험은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고비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격려와 위로를 하겠지만 결국에 그 고비를 넘는 것은 당사자만의 몫이라는 것. 이들이 지금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포기하지 않고 견뎌낸다면 충분히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태그:#신림동, #고시촌, #고시원, #사법고시, #고시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