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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된 흉년으로 보리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 나는 인생의 탈출구를 꿈꾼다. 영화 <황무지>
 거듭된 흉년으로 보리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 나는 인생의 탈출구를 꿈꾼다. 영화 <황무지>
ⓒ 황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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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절박한 순간들

당시 목포에 있는 실업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던 나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만약에 이대로 머물러 있게 된다면 농촌에서 그대로 묻혀 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 고향은 3년 동안이나 한해가 들어 저수지 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져버렸고, 흉년이 계속되었다.

거듭된 흉년으로 쌀밥은커녕 보리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집안의 경제사정은 최악이어서 대학을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런데다가 고2때 복막 직전에서 맹장염 수술을 받은 나는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도 고3은 다가왔고, 마지막 여름방학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무언가 내 인생의 출구를 찾아야 했다.

그러던 차에 한 가닥 희망이 비쳐왔다. 그것은 우리학교 졸업자도 은행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다니는 실업학교는 설립된 지 3년밖에 되지 않아 인문과 1반, 상과 1반이 전부였다. 그런 실업학교에도 은행취직시험 원서를 교부한다는 통지를 받았던 것. 은행시험에 합격만 한다면 일단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다. 당시 기차통학을 했던 나는 집중적으로 공부할 장소와 은행 취직시험 문제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내가 다니는 실업학교는 제대로 된 상과 선생님 한분도 없었고, 은행에 취직을 한 선배도, 취직시험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밤새 궁리를 한 끝에 나는 00상업학교 '은행취직' 반에 다니는 중학교 동창생을 만나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여름방학동안 나와 함께 공부를 할 수 없느냐고. 절친했던 친구는 학교는 다르지만 흔쾌히 승낙을 했다. 우리는 함께 공부할 장소를 찾았다. 친구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작은 성경학교가 있는데, 목사님을 찾아가서 성경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자고 했다. 사글세방도 얻을 형편이 못되었던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교회를 다니지도 않았던 나는 친구와 함께 곧 바로 목사님을 찾아갔다.

간절한 기도 속에서 공부할 장소를 허락해주셨던 목사님

언덕에 있는 작은 교회였다. 교회 옆에 딸린 목사님 사저로 찾아간 우리는 무릎을 꿇고 목사님께 우리의 사정을 얘기하며, 성경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처음에 목사님은 난색을 표명했다. 오래된 목조건물인 성경학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화재 위험도 있고 하여 교인들이 알게 되면 곤란하다는 것. 그러나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아니 뒤로 물러설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무릎을 꿇어앉은 채 목사님께 거듭 간청을 드렸다. 우리의 간절한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시던 목사님은 함께 기도를 하자고 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여기 두 어린 양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은행에 취직할 시험공부를 하고자 하나 공부할 장소가 없다고 합니다...... 주여, 이 어린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길을 인도해주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이 불쌍한 양들에게 시험공부를 할 장소를 열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나이다. 아멘!"

목사님의 기도는 간절했다. 우리는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마친 목사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목사님은 우리를 지그시 굽어보시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방금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두 학생들에게 성경학교에서 공부를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새벽기도 빠지지 말고, 화재위험에 각별히 조심하세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를 하여 꼭 은행시험에 합격하세요."
"감사합니다. 목사님!"

3개월간의 새벽기도와 밤샘 공부...주님은 정말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일까?

친구와 나는 목사님의 허락에 감동이 되어 목이 메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나는 친구와 함께 성경학교에서 촛불을 켜고 밤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은행취직시험과목은 영어, 일반상식, 논문, 주산 등 네 과목이었다. 친구로부터 은행취직시험에 나오는 예상문제 정보를 얻으면 하루 종일 그 문제를 풀고 또 풀었다. 논문은 예상되는 제목 수십 편을 골라 하루에 한 편씩 써가며 무조건 외웠다. 주산은 서로 시간을 재며 가감셈, 곱셈, 나눗셈 문제를 하루에 서너 번씩 풀었다. 정말로 내 인생에 가장 열심히 공부를 했던 시간이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지만, 새벽 3시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교회 문을 열고 불을 켰다. 그리고 "내 주의 보혈은"이란 찬송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특히 이 대목을 부를 때에는 왠지 눈물이 흘러내리곤 했다. "주님은 정말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 것일까?" 나는 노래를 부르며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새벽기도가 끝나면 교회 안팎 청소를 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지독히도 열심히 기도를 하며 공부를 했다. 당시 은행취직반에 다니는 친구는 나의 선생이었고, 정보원이었으며, 조력자였다.

누구에게나 지긋지긋하지만 피할 수도 없어

10월 어느 날, 드디어 시험 날이 다가왔다. 그런데 차디찬 나무 마룻바닥에서 담요 한 장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던 나는 그만 지독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는 지긋지긋한 시험이었다. 열이 오르고, 몸살로 몸을 가누지 못한 상태에서 광주에 있는 시험장으로 갔다. 나로 하여금 독감에 걸리게 한 것도 시험에 들게 함이었을까? 어쨌든 비몽사몽간에 하루 종일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마지막 시간인 주산시험엔 식은땀이 나오고 손이 떨리는 바람에 나눗셈 문제를 4문제나 풀지 못하고 말았다.

주산 실력이 3단정도 되었던 나는 평소 같으면 문제를 충분히 풀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주산문제를 다 풀지 못한 나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시골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시험 발표가 있는 날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약한 몸에 피로가 누적이 된데다 독감까지 겹치고, 무엇보다도 시험을 잘 보지 못한 상태였으니 몸져누울 수밖에 없었다. 절망, 그것이 바로 병이었다.

백척간두에 선 마음으로 준비하여 무조건 붙고 봐야

그런데 시험 발표가 있던 날 형수님이 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도련님, 도련님이 은행시험에 붙었대요. 지금 라디오방송에 도련님 이름이 나왔어요. 00실업고등학교에서 최초로 은행시험에 합격을 했다고요!" 나는 처음엔 형수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시 시골 농촌에는 전화도 없었으므로 나는 시험합격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학교로 갔다. 학교에 갔더니 이미 교문에는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있었다. '축, 000 은행시험 합격!'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게 정말인가!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나는 맨 먼저 목사님을 찾아갔다. 합격 소식을 들은 목사님은 "모든 게 주님의 은총이요!"라며 기뻐하셨다.

수많은 시험 중에서도 은행취직시험은 내 인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준 일대 사건이었다. 시골 촌놈이 서울 한복판에서 양복을 입고,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일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나는 어린 양을 위해 기도를 해주셨던 목사님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되고 이 세상에 없지만, 나와 함께 해주었던 고마운 친구를 생각하면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만다.

시험! 그것은 누구에게나 지긋지긋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필요악이다. 그러니 무슨 시험이든지 일단 백척간두에 선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합격을 하고 보아야 한다. 시험은 당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주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나를 '시험'에 들지않게 하소서>



태그:#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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