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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는 조선시대 후기의 김해부사였던 정현석이 구릉의 생김새가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과도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곳은 본래 가야시대의 집단취락과 조개무지 등이 있던 곳이다.

봉황동유적에는 다채로운 볼거리들이 산재해 있다. 가야시대 나루터를 현대로 옮겨놓은 듯이 복원해 놓은 작은 나루터와 고상가옥의 모습이나, 멀리 배나 적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던 망루 등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뤄졌던 회현리패총도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곳곳에 옛 기억을 담은 사적들이 즐비한데, 그 중에서도 언덕의 위쪽에는 바위 하나엔 깊은 사연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바위를 황세바위라고 부른다. 이 황세바위는 김해지역에서 전해지는 가야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바위로서, 두 남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름만 들어서는 충남 공주의 황새바위가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공주의 황새바위는 종교탄압에 저항하던 천주교인들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는 점에서 그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봉황대에 깃든 가야시대 러브스토리

마당극 여의와 황세 김해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구성한 마당극으로서, 가야시대의 슬픈 사랑 이야기 다뤘다
▲ 마당극 여의와 황세 김해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구성한 마당극으로서, 가야시대의 슬픈 사랑 이야기 다뤘다
ⓒ 큰들문화예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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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지역의 전설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1500여 년 전, 당시 가락국의 왕은 9대왕인 숙왕(肅王)이었으며 그 당시의 일이다. 지금의 대성동인 북대사동(北大寺洞)에는 황정승이, 남대사동(南大寺洞)에는 출정승이 있었는데, 둘은 절친한 사이로서 서로가 사돈이 되기로 약조하였었다.

이후 황정승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세(洗)'로 하였으며, 출정승은 딸을 낳아 이름을 '여의(如意)'라 지었다. 하지만 돈이 많고 세력이 강했던 출정승은 막상 딸이 생기고 나니, 가난한 황정승에게 자신의 딸을 주기 아까워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오랜 신의가 있던 황정승과의 의리를 저버리기는 어려워 일부러 여의를 어릴 적부터 남장을 시켰다고 한다. 황정승과 출정승이 절친한 사이였기에 황세와 여의 또한 절친하게 지냈고, 같이 서당을 지내며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황세바위 김해 봉황동유적에 있는 큰 바위다. 전설에 의하면 황세와 여의가 이곳에서 내기를 하였고, 혼례를 올렸다고 한다
▲ 황세바위 김해 봉황동유적에 있는 큰 바위다. 전설에 의하면 황세와 여의가 이곳에서 내기를 하였고, 혼례를 올렸다고 한다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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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황세는 왠지 여의를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남자의 옷을 입고 있지만 여자 같다는 생각에 같이 서당 근처의 개라바위로 데려갔다. 황세는 이곳에서 서로 오줌을 멀리 누는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고 먼저 시원하게 오줌을 쏴 올렸다. 이에 당황한 여의는 재빨리 바위 뒤쪽으로 돌아가 궁리하였는데, 마침 그곳의 근처에 있던 삼대를 이용하여 오줌을 누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개라바위엔 오줌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황세는 오해를 풀고 다시 여의와 친하게 지내게 된다. 하지만 어느 여름, 황세는 이번엔 멱을 감으러 거북내, 즉 지금의 해반천에 가자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더 이상 자신이 여자임을 숨길 수 없던 여의는 숨겨왔던 사실을 황세에게 밝히게 된다.

이로 인하여 여의는 학동들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더 이상 서당에 나오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일찍이 여의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던 황세는 출정승댁 앞에서 배회하며 기다리게 된다. 이를 안 출부인은 출정승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결국 출정승은 둘의 교제를 허락한다. 황세와 여의는 기쁜 마음으로 개라바위의 북편에서 약혼을 하게 되며 결혼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이뤄지지 못한 간절한 그들의 사랑

기마무사상 봉황동유적에 있는 가야 기마무사의 모습. 황세장군도 이런 모습으로 신라와의 전쟁에 나섰을 것이다
▲ 기마무사상 봉황동유적에 있는 가야 기마무사의 모습. 황세장군도 이런 모습으로 신라와의 전쟁에 나섰을 것이다
ⓒ 오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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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시절은 오래가지 못한다. 당시 가야는 신라가 한없이 쳐들어오고, 이를 막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다. 황세는 신라군을 막기 위해 출정하게 되고, 여러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게 되었다. 이를 숙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하늘장수라는 칭호를 내리고, 자신의 외동딸인 유민공주와 혼례를 치르도록 한다.

이에 황세장군은 약혼녀가 있다고 말하지만 되려 숙왕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숙왕은 가야의 명운이 위태하던 시절이었기에 뛰어난 장군인 황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숙왕의 명령을 거절 할 수 없던 황세장군은 유민공주와 강제적으로 혼례를 올리게 되고 숙왕의 부마가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의낭자와의 약혼은 무효가 된다.

이를 안 출부인은 병을 얻게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고, 여의낭자도 크게 상심하게 된다. 이미 황세장군에게 마음을 주었기에 다른 이에게 시집가길 거절하였고 홀로 지내다가 스물 네 살의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황세장군도 마음에 없는 결혼생활을 하며지내다가, 여의낭자의 죽음을 알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결국 황세장군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여의각 봉황동유적의 가야주거군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사당. 여의낭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건립되었고, 매년 이곳에서 동제를 지낸다
▲ 여의각 봉황동유적의 가야주거군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사당. 여의낭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건립되었고, 매년 이곳에서 동제를 지낸다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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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매우 슬퍼하였다고 하며, 둘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어린 시절 자주 뛰어놀던 개라바위가 작은 바위를 얹어놓아 황세돌, 여의돌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개라바위가 봉황대에 있는 황세바위이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이 1975년 여의낭자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여의각(如意閣)이라는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이 여의각은 현재 봉황동유적 내의 가야주거군 뒤편에 위치해 있다.

사실 이 설화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바로 숙왕의 딸인 유민공주이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아버지인 숙왕의 명에 따라 시집을 가게 되었으나 늘 다른 여자만을 그리워하는 황세장군과의 혼인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러한 황세장군이 결국 죽게 되고, 이에 유민공주는 크게 슬퍼하면서 세상이 덧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여의낭자와 황세장군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임호산에 들어가서 평생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런 공주의 이름을 따서 유민산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전설 속의 가야, 그리고 역사 속의 가야

여의각 영정 여의낭자의 모습을 그린 영정이다. 여의낭자는 황세장군과 함께 김해지역에서 구전설화로 전해진다
▲ 여의각 영정 여의낭자의 모습을 그린 영정이다. 여의낭자는 황세장군과 함께 김해지역에서 구전설화로 전해진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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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설에 등장하는 숙왕은 가야 9대왕인 겸지왕(鉗知王)으로서 금경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설화 속에는 자녀가 유민공주만 등장하나 사실 구형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이 구형이 바로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이다. 이 당시 가야의 명운은 점차 퇴락하던 시기로 신라의 갖은 압박이 가해지던 때였다. 전설의 배경이 이때로 설정된 것은 그러한 가야의 상황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인물이기 때문이리라.

이 전설은 당시에 있던 완전한 사실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그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설화에 나오는 황정승과 출정승이 실존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가락국기>에 의하면 겸지왕의 왕비가 바로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인 숙(淑)이라고 한다. 출정승이라는 인물은 바로 이 출충이라는 인물을 가리키거나 혹은 그 모티브로 보인다.

가야 멸망기를 배경으로 한 이 설화에서는 불교의 존재가 심심찮게 보인다. 유민공주가 황세장군이 죽자 출가했다는 내용이 대표적인데 이 사실성에 대해서는 조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락국기>에서는 사실 이 당시에 불교가 들어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겸지왕의 바로 전대왕이었던 질지왕(銍知王) 때에 수로왕의 왕비였던 허황옥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들이 결혼하던 곳에 왕후사라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물증은 아직 없으며, 대가야에서도 불교가 전래된 흔적은 일부자료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의문의 소지가 있다. 이 설화에서 나오는 불교는 가야 당시의 상황이라고 보기보다 후대 사람들이 설화의 비애감을 더욱 강조하고, 김해 곳곳의 사적들에 대한 유래를 꾸미기 위해 덧붙여진 내용으로 보인다.

이 전설은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져 내려오고 있다. 마당극이나 애니메이션 등 다채로운 방법으로 설화를 전하고 있으며, 봉황대유적이나 임호산, 흥부암 같이 설화와 관련된 주요 장소들도 잘 보존하고 있다. 또한 매년 5월 5일 단오날에 여의각에서는 여의낭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동제를 지내고 있는 등 문화의 보존이 이뤄지고 있다.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설화는 완벽한 당시의 사실을 말해준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그 배경이 가야의 멸망기라는 점은 김해에 살고 지내던 이들이 그만큼 가야를 그리워하였고 또한 동경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만큼 가야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아름답고도 슬픈 이 설화가 지금까지 내려와 회자되고 있는 게 아닌가싶다.

덧붙이는 글 | 김해 봉황동유적의 황세바위와 관련 설화에 대해 다루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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