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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이 교도소에서 20년을 살았어. 이젠 칼을 쥐어줘도 사람 못죽여. 근데 꼭 이렇게 죽여야만 해?"

영화 <집행자>에서 김 교위(박인환)가 울먹일 때 고중렬(77)씨의 입에서는 짧은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영화 속 김 교위는 사형수로 처음 만나 '20년 지기' 친구가 된 이성환(김재건)의 사형 집행에 대해 무기력하게 항의를 하던 참이었다. 현실 속의 고씨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맞아. 저 사람 말이 진리야. 내 마음도 꼭 저랬어."

영화를 보던 고씨의 입에서는 내내 짧은 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고씨는 1952년부터 1971년까지 19년 동안 사형수 담당 교도관으로 근무하면서 200명이 넘는 사형수의 죽음을 지켜봤다.

퇴직한 지 28년이 지났지만 그에게 크레졸 냄새가 진동하는 사형장의 습한 기운과 목이 졸린 채 뒤틀리는 사형수의 몸, 그리고 그 죽음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거친 숨소리는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생생한 현실이다. 국가의 명령을 받아 사람을 죽이는 '망나니 짓'은 영화 속 허구가 아니라 악몽처럼 반복됐던 일상이었다.

영화 보다 더 끔찍한 현실 속의 사형

영화 <집행자>에서 사형집행을 맡은 교도관 배종호(조재현)와 오재경(윤계상). 사형제의 최대 피해자는 어쩌면 사형수의 목숨을 끊어야하는 교도관들일지 모른다.
 영화 <집행자>에서 사형집행을 맡은 교도관 배종호(조재현)와 오재경(윤계상). 사형제의 최대 피해자는 어쩌면 사형수의 목숨을 끊어야하는 교도관들일지 모른다.
ⓒ 영화사 활동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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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자>에서 교도관 배종호(조재현)는 사형 집행 후 숨이 덜 끊어진 연쇄살인범 장용두(조성하)가 갑자기 몸부림치자 그의 몸을 아래서 잡아당긴다. 빨리 죽여 사형집행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배종호의 다그침에 장용두의 바짓가랑이를 함께 잡아당기던 후배 교도관 오재경(윤계상)은 얼마 못가 토사물을 쏟아내고 만다. 사형집행에 참여하는 교도관들이 입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묘사하기 위해 의도된 '사고'였다.

하지만 현실의 사형장에서는 영화에서 보다 더 끔찍한 일도 일어난다. 인간의 상상이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는 듯 고씨는 멈칫멈칫 과거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꺼내 놨다.

"한 번은 사형수의 목에 밧줄 올가미가 제대로 조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포인트를 당기는 바람에 사형수가 콘크리트 바닥에 그대로 추락했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비명을 지르는 사형수를 다시 끌어올려 목에 올가미를 걸었지. 그 짓을 하는 교도관들이나, 지켜보는 사람들이나 제정신이 아닌 거지.

또 한 번은 교도관이 사형수 목에 올가미를 건 다음 미처 자리를 피하기도 전에 포인트를 당기는 바람에 교도관과 사형수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적도 있었어. 사형수는 목이 졸려 죽고 교도관은 머리가 깨져 병원으로 실려 갔지. 그리고는 둘 다 다시는 교도소로 돌아오지 않았어."

영화 <집행자>에서 사형을 집행한 날, 교도관들은 밤 늦도록 술을 마신다. 손에는 사형 집행 수당 7만 원을 든 채 "우리가 망나니였네"라는 탄식을 내뱉는 그들 중 맨 정신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형집행일마다 계속됐던 술자리... "우리가 망나니였네"

사형제 폐지 운동에 앞장 서온 전직 교도관 고중렬씨.
 사형제 폐지 운동에 앞장 서온 전직 교도관 고중렬씨.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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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7월 31일 고씨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처음으로 사형집행을 목격한 날도 그랬다. 그날 죽임을 당한 사형수 중에는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도 포함돼 있었다. 흰 한복을 차려입고 사형장에 들어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유언을 남겼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누명을 쓰고 죽는 것이오. 나를 끝으로 앞으로 이런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오."

당시 말 한 마디를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엄혹한 시절, 고씨는 조봉암이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억울한 죽음을 방조했다는 자책에 조봉암에게 올가미를 걸고 사형장 마루청과 연결된 '포인트'를 잡아 당겼던 동료 교도관들과 함께 독한 소주를 밤새 들이켰다. 그리고 사형이 있는 날마다 이런 술자리는 계속됐다.

하지만 술에서 깬 현실에서 억울한 죽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씨가 교도관 생활을 시작했던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라 죄 없는 '양민'들도 간첩의 누명을 쓰거나 '공산당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수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도 정치적 이유로 '사법 살해' 당하는 이들은 끊이지 않았다.

"교도관을 막 시작한 1954년부터 3년 동안은 하루에 10~20명 정도 사형이 집행된 적도 있었지. 그걸 지켜보고 있으면 사람 목숨이 사람 목숨이 아닌 것 같아진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국가가 이렇게 쉽게 죽여도 되는 건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어. 하지만 교도관이 국가의 명령을 거스를 수도 없고. 그냥 무기력한 날들이었지."

고씨가 지켜본 '억울한 죽음'은 정치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 때문인 것들도 많았다. 고씨에게는 가난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 사형선고를 받고 죽은 이들이 더 서러웠다. 사형수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자들이었다.

"1966년 쯤이었을 거야. 군산에서 전당포 살인 강도사건이 있었어. 주범이 김정일이었고 공범은 김홍조라는 사람이었지. 김정일이 전당포에 들어가 금괴를 훔쳐 나오다가 주인에게 들키고 만 거야. 주인을 밀치고 나왔는데 뇌진탕으로 죽고 말았지. 김홍조는 밖에서 망을 보다가 함께 도망쳤다가 살인죄까지 뒤집어쓰고 사형을 선고 받았어.

또 부잣집에서 식모살이 하던 한 사람은 주인 내외가 연탄가스에 질식해 죽자 재산을 가로채려고 의도적으로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사형 당했어.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었지. 돈이 있어서 사선 변호사를 구했다면 최소한 사형은 면할 수 있었을 텐데. 국선변호인들은 대부분 면회 한 번 오지 않고 법정에만 출석하는 등 형식적이었지."

사형제의 최대 피해자는 사형수를 죽여야 하는 교도관들

사형제로 가장 큰 인권침해를 당하는 이들은 죽임을 당하는 사형수가 아니라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교도관들일지 모른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교도소 내에서 부대끼며 한동안 인간적 관계를 맺었던 사형수들의 목숨을 국가의 명령에 따라 끊어야 한다.

고씨가 목격한 많은 교도관들은 '몸이 아프다', '집에 우환이 있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포인트 잡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게다가 고씨가 근무할 당시만 해도 사형집행은 교도관 한 사람이 사형장 마루청과 연결된 '포인트'를 직접 잡아당기는 방식이었다. 4명의 교도관이 한꺼번에 버튼을 눌러 누가 사형수를 직접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알지 못하도록 하는 시스템은 1980년대 후반에야 도입됐다.

시스템은 개선됐다고 하지만 사형수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원죄 의식에 쉽게 빠져나오는 교도관은 많지 않았다. 고씨는 자신의 죄를 씻으려 출가를 하거나 교회에 나가는 사람, 심지어 사형집행 사실이 알려져 파혼한 사람 등 후유증에 시달리는 수많은 동료들을 지켜봐 왔다.

"영화 속에서 김 교위가 퇴직한 후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동료 교도관을 찾아가잖아. 김교위가 만취해 '과거 일'을 꺼내 놓자 그 친구가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역정을 내던데.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야. 사형제 폐지 운동을 하면서 몇몇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다들 피하기 급급했어. 지금은 연락도 모두 끊겼지."

사형제에 대한 깊은 회의... "아직도 사형수들 위해 기도"

영화 <집행자>에서 김 교위(박인환)가 사형수 이성환(김재건)과 감방에서 장기를 두는 장면. 김교위는 "그놈 이 교도소에서 20년을 살았어. 이젠 칼을 쥐어줘도 사람 못죽여. 근데 꼭 이렇게 죽여야만 해?"고 묻는다.
 영화 <집행자>에서 김 교위(박인환)가 사형수 이성환(김재건)과 감방에서 장기를 두는 장면. 김교위는 "그놈 이 교도소에서 20년을 살았어. 이젠 칼을 쥐어줘도 사람 못죽여. 근데 꼭 이렇게 죽여야만 해?"고 묻는다.
ⓒ 영화사 활동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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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고씨는 죽음을 앞둔 사형수들에게 하느님의 고귀한 뜻을 알리고 싶다는 종교적 사명감으로 사형수 교화 담당 교도관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지켜보는 죽음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그 죽음에 괴로워하는 동료들이 늘어날수록 사형제에 대한 회의도 깊어졌다.

특히 감방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장기를 두고, 또 성경을 함께 읽었던 사형수들이 모두 '새 사람'이 된 후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든 아이러니였다.

"강원도에서 일가족을 도끼로 몰살한 김완선이라는 애가 있었어. 처음엔 영화 속 장용두처럼 난동을 피우고 빨리 죽여 달라고 아우성이었지. 그런 김완선도 시간이 지나니까 서서히 변하더라고. 겨울에는 자기 내의를 벗어 추위를 타는 한 방 동료에게 주기도 하고 병이 나서 아픈 사람은 밤새도록 간호를 해주기도 했지. 사형 후에 김완선이 남긴 글을 봤는데 그가 얼마나 철저히 참회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괴로워했는지 그대로 드러나 있더라고. 그를 죽이는 대신 평생 감옥에서라도 참회하면서 남을 위한 삶을 살게 할 수는 없었을까."

고씨가 교도관 퇴직 후 사형제 폐지 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19년 교도관 생활 중 수많은 '김완선'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사형장에서 사라져간 이들의 이름과 세례명을 적은 쪽지를 몸에 지니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행형법을 보면 국가가 형을 집행하는 목적은 범죄인을 교정․교화하는데 있다고 돼 있어. 그런데 사형은 교정․교화를 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보복을 하는 것이지. 범죄자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지 않고 죽이는 건 또 다른 살인일 뿐이야. 더구나 흉악범을 사형시킨다고 해서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의 짐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더라고."

사형제 폐지 운동을 해오던 고씨는 가장 안타까웠던 게 국회에 제출된 '사형제 폐지 특별법'이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이 번번이 묵살돼 버린 것이다. 16대 국회, 17대 국회 모두 과반수가 넘는 국회의원 서명을 받아 '특별법'을 제출했지만 모두 폐기되는 운명을 맞았다.

어느 덧 80세를 앞둔 고씨의 마지막 소원은 소박했다. 사형제 폐지를 보고 죽는 것이다.

"'국가의 살인'을 방조하면서 살아왔다는 원죄의식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아. 직접 손에 피를 묻힌 이들의 심정은 나보다 더 하겠지. 사형제가 폐지돼야 조금이나마 짐을 덜고 세상을 뜰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한 가지 더 욕심을 부리자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사형이 집행됐다는 뉴스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태그:#집행자, #사형제, #고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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