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0월 29일에 여성문화유산연구회의 '서울을 걸어서 답사하기'가 있었다. 도성 밖 주변 돌아보기다.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조금 직진을 하면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1020번 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에서 내렸다. 창의문으로 해서 도성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다.

 

도성 안에서 창의문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보자면 오른쪽으로는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성곽길이고 왼쪽으로 도로를 건너서 오르는 성곽 길은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성곽이다. 창의문은 북쪽인 북악(백악)산과 서쪽인 인왕산 경계가 맞닿는 곳에 있는 문이라고 한다. 창의문의 옛 이름은 자하문이다. 인조반정 때 반정군은 이 창의문으로 해서 도성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고 한다.

 

 

창의문을 쑥 빠져 나오니 도성 밖 부암동이다. 동네로 들어가지 않고 '백사실' 계곡을 돌아 나오는 길을 답사하려고 한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의 자료에 따르면 백사실 계곡은 북악산 기슭으로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좋아서 백석실(白石室)이라고도 불린단다. 또는 백사(白沙) 이항복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산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창의문 앞에 있는 굴다리를 지나 찻길을 건너서 도로 밑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다 갈림길들이 나오면 계속 오른쪽 길을 택해 걷는다. 갈림길들을 조금만 지나면 오른쪽은 담으로 쌓여 있고 왼쪽으로 부암동 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숲길이 이어진다. 이 길에는 능금나무가 자라고 있었다고 해서 능금나무 길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숲길을 따라 걸으면서 왼쪽으로 내려 앉아 있는 마을도 구경하고 멀리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면 북악산의 성벽과 인왕산의 성벽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약 20분쯤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숲길의 끝인가 하는 느낌의 언덕길 위에 드라마 '커피프린스'에서 촬영했다는 '산모퉁이' 찻집이 나온다. 계속 길 따라 조금 더 오르면 '백사실' 계곡이라는 첫 번째 안내 표지판이 오른쪽으로 가라고 눈앞에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틀었는가 싶은데 바로 갈림 길이 나오면서 두 번째 안내판은 왼쪽 길 내리막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내리막길에 있는 집들의 문패를 보니 여전히 부암동이다. 걷다 보면 다시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 쪽으로 잠깐 발길을 옮기면 숲속 산이 나온다.

 

숲에 들자마자 바로 큰 바위가 나온다. 바위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절경이라고 소문난 백사실 계곡에 들어온 것이다. 해설에 따르면 백석은 백악(북악산)을 말하는 것이라 하고 동천은 신선이 내려와 놀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을 말한다고 한다. 동천(洞天) 즉 하늘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숲이 아름답게 단풍으로 채색되어 있어서 우리가 신선이 된 느낌이 들 정도다. 작년 이맘 때쯤에 왔었다는 일행에 따르면 작년보다는 단풍이 못하단다. 아마도 가뭄이 계속된 탓이 아닐까 서로 추측을 해 보았다. 인적 드물어 보이는 호젓한 숲이라서 여성 혼자보다는 두세 사람의 동행이 필요해 보이기도 했다. 계곡 길을 따라 아래로 조금 내려오면 옛 집터와 정자의 주춧돌들이 나온다. 정자 터와 연못 터, 사랑채 터와 그 뒤에 안채 터가 일직선에 놓여 있다. 이곳은 백사 이항복이 별장을 짓고 살았다는 유래가 있지만 정확한 정보는 아니라고 한다.

 

 

집터에서 오른쪽에 계곡을 끼고 숲길로 얼마간 걷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터지고 앞에 절이 나온다. 계곡 아래로 들어앉아 있는 주택가도 보인다. 주택가로 바로 내려가지 말고 오른쪽 계단으로 오르면 숲길을 좀 더 감상할 짬이 있는 길이 있고 다시 주택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이곳은 종로구 신영동이다. 오른쪽으로 담을 끼고 내려와서 '구암하이츠빌아파트'와 '양지하이츠빌라' 사이의 골목을 끼고 내려오면 홍제천이 보인다. 산을 벗어난 것이다. 앞에 보이는 신영교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틀어 조금 내려오면 길가에 '탕춘대한지마을터' 표지석을 만난다.

 

 

이 부근은 국가에서 필요한 종이를 만드는, 즉 조지서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기도 하단다. 맑은 시냇물과 평평한 돌이 많고 인근 산에 한지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가 풍부하여 종이를 제조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고 한다.

 

같은 길에 있는 '탕춘대터' 표지석을 보니 연산군 때 세운 누대자리다. 그 길 끝에 '세검정터'와 '세검정차일암' 표지석이 있다. 홍제천 기슭에 세워져 있는 세검정정자도 보인다.

 

 

'세검정' 정자는 인조반정을 기리기 위해 영조 때에 세운 정자라고 한다. 세검정 정자는 41년 이곳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타서 없어진 것을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와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 70년대에 복원을 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홍제천의 너럭바위와 곳곳의 표지석에는 이곳이 종이를 만들고 말리고 했던 곳이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세검정에서 길 건너 대각선으로 바라보니 상명대학교가 보인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홍은 사거리를 만난다. 길을 건너 광화문 방향 쪽으로 조금만 오르면  '석파랑'이라는 한옥 음식점이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높은 언덕 위에 대원군별장이었던 '석파정' 별당 집 한 채가 놓여 있다. 이 별당은 서예가 손재형씨가 이곳에 집을 지으면서 뒤뜰 바위 위에 옮겨다 놓은 것이란다. 대원군 별장 말고도 석파랑은 덕수궁, 운현궁, 선희궁, 칠궁 등에서 헐린 목재, 기와, 돌 등을 사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석파랑을 나와서 왔던 길의 사거리로 다시 오면 분수대가 있고 그 건너편이 상명대학교다. 학교 쪽으로 길을 건너서 또 다시 학교를 오른 쪽으로 두고 길을 건너면 저 앞에 찻길 옆으로 성문이 보인다. 바로 홍지문이다. 서울의 서북쪽 방어를 위한 탕춘대성의 출입문이다. 한양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여 세운 성이란다.

 

홍지문과 그 옆에 있는 오간수문은 1977년에 복원이 된 것이라고 하는데, 홍지문의 문루 아래쪽에 보면 색이 다른 돌들이 있다. 그것은 복원되기 전의 돌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현판의 글씨도 왼쪽에서 시작하는 '홍지문'으로 쓰여 있었다. 홍지문을 쑥 빠져 나오면서 종로구에서 서대문구가 되었다.

 

홍지문으로 보자면 종로구는 성 안쪽이고 서대문구는 성 밖이다. 우리는 창의문을 나서면서부터는 성 밖을 돌았던 것인데 갑자기 홍지문에서는 성 안에서 나온 격이 된 것은 바로 홍지문이 도성의 외곽성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대문구 홍제천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면 머리 위에는 고가도로가 놓여 있고 왼쪽은 찻길, 오른쪽은 홍제천이 놓여 있다. 홍은동 주택가 일대다.

 

걷다가 길 끝에 놓여 있는 보도교 앞에 오면 우리의 마지막 답사지인 옥천암의 '보도각 백불'이 보인다. 보도각 백불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인데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며, 그 부처가 백불이 된 것은 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아들(고종)을 위해 치성을 드릴 때 흰 칠을 했다고 한다.

 

 

홍제천은 우리 여성 선조들의 애환이 드러나 있는 곳이기도 하단다. 정묘, 병자호란(인조)때 공녀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여자들이 돌아왔으나 어디에서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피해자인 그녀들은 오히려 '환향녀'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을 뿐이다. 나라에서는 궁여지책으로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된다는 명을 내렸다.

 

무엇이 더럽고 무엇이 깨끗하게 된다는 말인가. 보여주기 위한 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공녀들이 나라의 명을 받아 홍제천에서 몸을 씻지만, 결국은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이곳 주변에 눌러 앉아 살게 된 경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신대 문제도 그렇지만 역사는 약자인 여자들 편이 아니었다.

 

답사는 종로구 자하문고개 창의문에서 걷기 시작하여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마쳤다. 약 2시간여의 시간이 걸린다.


태그:#백사실계곡, #세검정, #홍지문, #대원군별장 석파정, #보도각 백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민기자가 되어 기사를 올리려고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