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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를 마친 가을 들판에 즐비한 이것은 무엇일까요?
 추수를 마친 가을 들판에 즐비한 이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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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추수를 마친 들녘엔 볏단, 볏가리가 즐비했습니다. 볏가리란 '벼를 베어서 가려 놓거나 볏단을 차곡차곡 쌓은 더미'를 말합니다. 그 볏가리는 동네 꼬마 친구들의 이불이 되고, 지붕이 되고, 때론 안방 건넌방이 되어 놀이 공간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이제 웬만한 농촌 들녘엔 지름 1~2미터에 두께 1미터 남짓 되는 하얀색 물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가을 들녘엔 볏가리 대신 저 물체가 육중하게 서 있어서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더불어 '저 물체의 정확한 명칭은 무엇일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다양한 이름이 눈에 띕니다. '사일리지, 곤포, 곤포 사일리지, 원형 곤포 사일리지, 볏집 곤포 사일리지' 등 태어나서 49년 만에 처음으로 들어보는 이름들이었습니다.

농촌 들녘엔 볏단, 볏가리 대신에 가축 사료용으로 쓰인다는 저 흰색 물체가 즐비합니다.
 농촌 들녘엔 볏단, 볏가리 대신에 가축 사료용으로 쓰인다는 저 흰색 물체가 즐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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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전문적이거나 어색한 명칭입니다.
▲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 너무 전문적이거나 어색한 명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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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곤포는 뭐지? 곤포(梱包)란 '거적이나 새끼 따위로 짐을 꾸려 포장함. 또는 그 짐'을 뜻하므로 비닐같은 하얀색을 곤포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렇다면 사일리지는 또 뭘까? 브리태니커 사전은 '사일리지(silage)'를 "동물의 사료로 쓰기 위해 옥수수·콩과식물·목초 등의 사료식물을 잘게 썰어 탑 모양의 사일로, 구덩이, 도랑 등에 저장한 사료"라고 설명합니다.

'거, 참 희한하다. 아니, 그렇다면 농촌에서는 뭐라고 부르는 걸까?' 충남 논산에서 수십 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명칭을 물었더니 대뜸 그럽니다.

"아하, 그 덩어리? 그거 그냥 덩어리라고 혀. 한 덩어리, 두 덩어리... 이렇게 쓰지 뭐."

"그래? 내가 알아보니까 무슨 사일리지니 볏짚 곤포 사일리지니 그러던데 농촌에서는 덩어리라고 쓰는 거구만? 그게 훨씬 좋다, 야~"

"하하하, 몰러~! 그거 너무 복잡한 거 아녀? 그냥 우리가 쓰는 게 편햐!"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라고 말하기엔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 뭔가 새로운 명칭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라고 말하기엔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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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결국 모든 것을 내어주고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에 생을 마감했다. 뭐 이렇게 쓰기에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 벼 벤 자리 벼는 결국 모든 것을 내어주고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에 생을 마감했다. 뭐 이렇게 쓰기에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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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2일 농촌진흥청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무래도 정확한 명칭이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명칭을 물었습니다.

"네에, 그거 말입니까? 그거 '곤포 볏짚 사일리지'라고 합니다."
"아하,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농촌에서도 그런 명칭을 씁니까?"
"글쎄요, 그건 뭐 아직 정확하게 정착된 이름이 없을 거 같긴 합니다만..."
"네에,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시골 출신 동료 직원들에게 명칭을 물어보니 아는 분이 없었습니다. 이전에 없던 사물이 기계문명으로 새롭게 등장하여 또 하나의 단어가 생성되는데, 농촌에 사는 분들이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부적절한 단어라고 믿었습니다.

인터넷에 떠있는 명칭은 '볏짚 곤포 사일리지'인데, 왜 농촌진흥청에서는 '곤포 볏짚 사일리지'라고 하지? 곤포와 볏짚이 왜 뒤바뀐 걸까? 3일 농촌진흥청 관계자와 다시 통화를 했습니다.

"어제 전화를 했던 사람입니다. 죄송하지만 어제 말씀하신 명칭이 정확한 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전화드렸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제가 담당 연구부서에 알아보고 전화를 드리지요."

몇 분 후 전화가 왔습니다.

"그거 연구부서에 알아보니까 수확하고 바로 곤포에 싸는 것으로 수분이 있는 경우에는 '생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라고 하고, 마른 상태 즉 건조된 경우는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라고 합니다."

담당자의 친절한 답변이 고맙기도 하였지만, 어제보다 훨씬 복잡해진 느낌이었습니다. '생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든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든 그 명칭이 시골 정서에 맞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공기를 주입해서 원통형으로 길거리에 세워 놓는 간판을 '에어간판'이라고 한답니다. 그 옛날 공동우물을 없애고 집집마다 샘을 팠지요. 주전자 통처럼 생긴 공간에 물 한 바가지를 넣고 빠른 속도로 펌프질을 하면 콸콸 물이 솟아났던 물건 말입니다. 그것을 '펌프우물' 혹은 '작두우물'이라고 하는데, 딱히 정해진 명칭은 없어 보이나 어느 쪽이든 크게 불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추수를 끝내고 볏단이나 볏가리 대신에 농촌 들녘을 장식하고 있는 물체를 '생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 혹은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라고 한다니 뭔가 좀 씁쓸합니다. 농촌 현실이나 정서에 맞게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적절한 단어가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차라리 제 친구처럼 '덩어리'라고 하는 건 어떻습니까? 좀 살을 붙여서 '추수덩어리' 혹은 '가을덩어리'는 어떨까요? 이 기회에 농촌진흥청에서 좋은 명칭을 공모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태그:#사일리지, #곤포 사일리지, #원형 곤포 사일리지,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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