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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동유적 봉황대유적과 회현리패총 등을 통틀어 이르는 유적으로서 도심 가운데에서 가야의 모습을 보여준다.(사적 2호)
▲ 봉황동유적 봉황대유적과 회현리패총 등을 통틀어 이르는 유적으로서 도심 가운데에서 가야의 모습을 보여준다.(사적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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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대성동고분군을 둘러보고 난 뒤, 우리는 근처의 봉황동유적으로 향하였다. 내비게이션에 봉황동유적을 설정하고 이동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도착한 곳은 봉황동유적의 후문 쪽이었다. 그래도 후문 쪽이라고 하더라도 생각보다 잘 꾸며 놓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유적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기로 하였다.

봉황동유적이란 김해 시내에 있는 유적으로서 사적 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봉황대(鳳凰臺)라고 불리 우는 구릉과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대규모 생활유적이면서 생산유적이다.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이뤄졌던 회현리패총도 이곳에 포함되어 있다.

이 봉황대 일대는 일찍이 청동기시대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생산과 주거의 거점지역이었다. 이후 대규모의 주거지와 고상건물지, 그리고 방어시설과 우리나라 최대 깊이의 패총이 등이 발굴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금관가야 지배층 집단의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가야문화환경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정비가 이뤄졌는데, 가야시대의 주거지와 고상가옥, 망루와 접안시설, 그리고 선박 등을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수목(樹木)들을 우리나라 고유수종으로 교체하여 가야시대의 환경을 최대한 살라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그야말로 가야시대 마을의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도심 속에 있기 때문에 대성동고분군과 함께 김해시민들의 쉼터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럼 봉황동유적을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봉황동유적의 중심엔 가야의 기마무사가 있다

목책 나무를 이용하여 성벽처럼 마을을 둘러 놓은 방어시설로서, 마을의 권역을 표시하거나 종교적인 목적으로 설치하기도 한다
▲ 목책 나무를 이용하여 성벽처럼 마을을 둘러 놓은 방어시설로서, 마을의 권역을 표시하거나 종교적인 목적으로 설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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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문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목책(木柵)이었다. 목책이란 나무를 이용하여 성벽처럼 마을 주위를 둘러놓은 것으로서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널리 활용하였다.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의 마을과 사람들을 보호하는 기능도 하였지만, 마을의 권역을 표시해주는 역할, 그리고 혹은 여러 겹으로 둘러서 종교시설로서의 권위와 신성함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의 초기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후에도 간간히 사용되곤 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 초기 기사를 보더라도 방어를 목적으로 목책들이 더러 만들어지곤 한다. 이는 백제뿐만 아닌 당시 다른 여러 나라들도 마찬가지였고, 봉황동유적도 이 점에 착안하여 이렇게 복원해 둔 것으로 보인다.

목책을 지나 위로 서서히 올라가니 황세바위라고 하는 큰 바위와 가락국천제단(駕洛國天祭壇)이라는 제단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황세바위는 김해에서 내려오는 전설인 '황세장군과 여의낭자 설화'가 깃들어 있는 장소로서, 두 사람이 서로 내기를 하였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충남 공주에도 이와 비슷하게 '황새바위'가 있는데 서로 매우 다른 설화의 전승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기마무사상 가야시대의 무사와 말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동상으로서, 기마인물형토기와 가야시대의 유물들을 참조하여 만들어졌다
▲ 기마무사상 가야시대의 무사와 말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동상으로서, 기마인물형토기와 가야시대의 유물들을 참조하여 만들어졌다
ⓒ 오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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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언덕을 넘어 아래로 내려오면 동상이 하나 보인다. 기마무사상(騎馬武士像)이라고 하는 동상인데 온몸에 갑옷을 걸친 무사가 창을 들고 말 위에 앉아있는 모습니다. 말 또한 갑옷으로 무장한 모습이다. 이 기마무사상은 국보 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토기와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한 가야시대의 고분들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참고하여 청동 주물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기마무사상은 대성동고분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가야무사상과 비슷한데, 서로 들고 있는 무기가 창과 월도라는 것만 차이점이다. 이 기마무사상의 화려한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 가야의 뛰어난 철기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1600년의 시간을 담은 가야의 나루터

고상식가옥 봉황동유적에 복원된 가야시대의 가옥으로서, 거주지가 아닌 주로 창고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 고상식가옥 봉황동유적에 복원된 가야시대의 가옥으로서, 거주지가 아닌 주로 창고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 오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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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지역은 본래 지금의 시내지역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항구도시였다. 지금은 김해평야를 떠올리지만 당시엔 낙동강 하구로 활발한 무역이 이뤄지던 상업도시로, 오히려 평야지대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증명해 주는 것 중 하나가 바닷가의 조개들을 쌓아 만든 회현리패총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유적이 바로 이곳에 복원되어 있다.

봉황동유적에서 가장 볼만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가야시대의 항구와 마을을 복원해 놓은 곳이다. 3개의 건물과 가야의 배를 복원해 놓아 그 당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곳에 복원된 건물들이 당시 사람들이 거주하던 건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곳의 건물들은 지상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올려 놓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를 고상식가옥(高床式家屋)이라고 부르며, 또 다른 말로는 굴립주건물(掘立柱建物)이라고도 한다.

이런 고상식가옥은 오늘날 동남아시아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김해 지역에서는 그러한 기능을 아울러 창고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서도 부경(桴京)이라고 하여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만주지역을 답사하면 이와 비슷한 창고들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접안시설과 가야배 접안시설은 배가 들락날락 거릴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시설을 말하며, 가야배는 배모양토기 등을 참조하여 복원해 놓았다.
▲ 접안시설과 가야배 접안시설은 배가 들락날락 거릴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시설을 말하며, 가야배는 배모양토기 등을 참조하여 복원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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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고상식가옥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위에 가야배라는 이름의 나룻배가 하나 띄워져 있어, 흡사 가야시대의 작은 마을에 온 착각마저 들게 한다. 가야배는 가야시대 토기를 참고하여 만든 것으로, 그 당시 사람들은 아마 저런 배를 타고 물 위를 나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망루가 시설되어 있다. 망루는 당시 마을마다 있어서 적들이 쳐들어오는지, 혹은 외부에 어떤 소식이 들어오는지를 관찰하는 장소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하던 것으로서, 당시 이런 나루터에서는 배가 들락날락 거리는 것과 적들이 쳐들어오는 경우 등을 대비하여 필수적으로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망루는 가야시대의 건축기술을 최대한 고려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뤄진 회현리 패총

가야의 가옥 가야인들은 주로 이렇게 반지하식으로 파서 기둥을 세운 집에서 기거하였다.
▲ 가야의 가옥 가야인들은 주로 이렇게 반지하식으로 파서 기둥을 세운 집에서 기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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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언덕으로 올라가면 가야주거군을 만날 수 있다. 가야주거군에는 앞서 살펴본 나루터의 고상가옥과 망루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가야인들이 살았던 가옥들도 복원되어 있다. 앞서 말했지만 당시의 고상가옥은 주거공간이라기보다도 주로 창고로서의 기능이 더 많았으며, 주로 주거지에서 여러 생활이 이뤄졌다. 이를 움집이라고도 부르는데,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거기에 기둥을 대어 올리는 형태이다.

앞서 가야주거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러 건물들이 있으며 시민들에게 가야인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편안한 쉼터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겉모습에 그칠 뿐 그에 대한 구체적인 후속조처가 없다는 점에서 약간의 아쉬움도 든다. 복원을 해놓으면 단순히 끝나는 게 아닌, 복원 이후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교육과 추억의 장으로서도 활용 할 수 있을 텐데…. 이에 대한 방안도 어느 정도 마련되어야 할 시점이다.

회현리패총 우리나라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뤄졌던 곳으로서 가야시대의 패총이다. 다만 일본인의 손에 의하여 이뤄졌다는 사실이 약간 아쉽다
▲ 회현리패총 우리나라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뤄졌던 곳으로서 가야시대의 패총이다. 다만 일본인의 손에 의하여 이뤄졌다는 사실이 약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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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동유적은 크게 봉황대와 회현리 패총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중에서 회현리패총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으로 유명하다. 한 가지 아쉽다면 이 발굴조사는 우리의 손이 아닌, 일본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07년 대한제국 시기 때 이마니시류[今西龍] 등이 발굴하였는데, 대규모의 패총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패총은 당시의 생활유적으로서 조개를 쌓아놓은 것을 말하며, 그 때문에 흔히 조개무지라고 부른다. 조개를 쌓아 놓은 게 뭐 얼마나 신기하나 싶을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과 조개를 채취하는 시기 등을 파악하여 해안가의 생활 패턴 등을 분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당시 동물과 어패류 등을 연구할 수 있다. 그 속에는 토기 같은 생활 쓰레기도 발견된다.

이런 회현리 패총은 가야시대 사람들도 먹고 남긴 조개껍질로 쌓아 만들었으며 그 높이가 굉장히 높다. 우리나라의 해안가에서는 이런 유적들이 종종 발견되어 중요한 학술 가치를 지닌다.

봉황동유적은 김해 시내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서 활용된다. 그리고 세밀한 복원을 통해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곤 한다. 사실 이런 유적은 다른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남다르게 다가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활용은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복원된 가옥들이 개방적이라기보다 비개방적이라는 점에서 아쉽다. 앞으로도 계속 보존하고 관리해, 언제나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는 문화재로 기억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봉황동유적을 답사한 것을 바탕으로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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