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시회가 열리는 입구.
 전시회가 열리는 입구.
ⓒ 김갑수

관련사진보기


"이번 전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재임 시 세계 각국의 정상들로부터 받은 선물과 체취가 배어 있는 유품을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는 최초의 자리로서, 이를 통해 당시의 국정 활동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의 일면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 국가기록원장 박상덕

박정희 유품 전시회(10월 20일~10월 29일)가 열리고 있는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의 뜰은 가을의 음영과 색채가 드리워져 있었다. 노란 낙엽과 붉은 단풍, 명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투명한 대기, 그리고 치마바위 너머 펼쳐져 있는 코발트빛 하늘은 한국의 가을이 범상치 않는 절색임을 실감케 했다. 그는 30년 전 이처럼 아름다운 계절에 죽은 것이다.

나는 한동안 고궁의 뜨락에 머물며 이 행사의 주인공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나에게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유년기에도 소년기에도 그리고 청년기에도…. 그가 대통령을 그만 둔 것은 내가 군영을 마치고 나서도 1년 남짓이나 지난 뒤였다.

"갑수야! 박정희가 죽었단다."

어머니는 쿵쾅 소리와 함께 늦잠 자고 있는 아들을 이렇게 깨웠다. 그것이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이렇게 전시회장 입구에서 나는 그의 죽음을 상기해야 했다. 내가 전시회장에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왠지 그가 죽은 것 같지가 않은데 그의 유품을 관람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방명록에 서명하시지요."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여직원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방명록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방명록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나를 여직원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방문'할 수가 없었다. 그는 19년 동안이나 나의 '불청객'이었는데 내가 그의 '청객'이 되어 준다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달 수로 220개월이나 나를 통치했다. 그 덕분에 나는 105개월이나 위수령, 계엄령 체제에서 살았다. 그가 비상조치를 발령할 때마다 나는 공포감을 느꼈고 1만4000명을 투옥하는 동안 나는 수치심을 얻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유·소·청년기는 덧없이 흘러갔다.

중요 사실을 누락하고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가

1917.11.14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출생
1924.4 구미보통학교 입학
1932.4 대구사범학교 입학
1937.3 문경보통소학교 교사 취임
1946.12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 졸업, 육군 대위 임관
1950.7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 수임
1950.12 육영수 여사와 결혼
(후략)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실물크기 사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실물크기 사진.
ⓒ 김갑수

관련사진보기

전시회장에 들어서면 '박정희,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라는 제목이 붙은 그의 이력을 보게 된다. 이것은 1917년에 태어난 그가 1950년 결혼하기까지 33년 동안의 이력이다. 물론 압축된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누락되어 있다.

먼저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전 김호남과 결혼하여 9년 간 법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했으며 두 사람 사이의 소생(딸, 재옥)도 있다. 물론 이것은 사적인 가정사이니 기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소학교 교사를 하다 자원하여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갔으며 그 뒤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 근무한 사실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 제자 이순희 증언, 정운현 저 <실록 군인 박정희>

이것은 그가 식민지 백성으로서 제국 군대의 장교가 된 이유 중의 하나를 알게 해 주는 증언이다. 당시 소학교 교사면 존경 받으며 살 만한 직업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 자원 혈서까지 쓰면서 제국 군대의 장교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그다지 개의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이 이력은 그가 해방 후 남로당원으로서 여수·순천 항명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동료들의 이름을 대고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을 누락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가 자기의 보신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불사할 수 있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임을 알게 해 준다.

결국 이 기록은 그가 제국 군인으로서 친일파였다는 점과 공산주의자로서 이른바 '좌빨'이었다는 점을 은폐한 것이다. 그런데 이 행사의 주체는 행정안전부의 국가기록원이다. 국가기록에 객관성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이미 '기록'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10·26, 안중근 의거보다 부각되는 박정희 서거

나는 선물과 유품들을 둘러보았다. 각국의 원수 또는 외상들이 선물한 은 다기(茶器)와 은 백마(白馬), 진주 장식함 등이 있었다. 성명 미상의 인물이 바친 금동 우차(牛車)도 있었다. 모두 희한한 것들이었다.

그나마 눈에 띈 것은 김일성 주석이 7·4남북성명 당시 평양에 간 이후락 정보부장을 통해 보낸 '금강산선녀도'였다. 하지만 직후 박정희는 격변하는 남북관계를 구실로 들어 '10월유신'을 단행하여 영구집권을 획책했다.

영상기념관에서는 지나간 시대의 '대한늬우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예의 그는 그곳에서 산업화와 근대화의 역군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그가 사용한 가구와 책상 그리고 친필 휘호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족자에 담겨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눈이 닳도록 본 사자숙어였다.

출구 쪽 슬라이드 사진에서는 여러 사람의 박정희가 움직이고 있었다. 남방셔츠를 입은 박정희, 밀짚모자를 쓴 박정희, 막걸리를 마시는 박정희, 베드민턴을 치는 박정희 등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서민 대통령'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밤에 마셨다는 양주와 청와대 주변 안가에 불려온 200명의 젊은 여인들을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날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날과 같은 10월 26일이다. 그런데 그의 서거는 안중군의 의거보다 더 화려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그를 기리는 기념관도 건립된다고 한다. 박근혜 의원은 이 전시회의 개막식에 참석하여, "아버지의 유품은 한국 외교사의 족적이었다"고 말했다.

행사장 밖에서는 관람객들이 박정희의 실물사진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고 싶어 줄을 설 정도였다. 그들은 하나 같이 박정희를 숭배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와전된 가치관의 착란을 느끼면서 머리가 다소 어지러워졌다.

다시 뜨락에서... 문득 장준하를 떠올리다

박정희의 편지 필체
 박정희의 편지 필체
ⓒ 김갑수

관련사진보기


관람을 마치고 다시 고궁의 뜨락으로 내려섰다. 그런데 못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재작년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박근혜는 장준하의 미망인 김희숙이 사는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고는 "아버지나 고인이나 모두 국가를 위해 사신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미망인은 "딸처럼 여길 테니 어려운 일 생기면 찾아오라"고 화답했다고 했다. 이후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5·16은 구국의 영단이었다"고 선언한다.

관동군 박정희와 광복군 장준하가 둘 다 국가를 위해 사신 분일까? 주지육림의 환각 파티에서 부하에게 총 맞아 죽은 박정희가, 고난의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와 동등하게 국가를 위해 사신 분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장준하가 평안도 오지에서 소학교 교사를 하며 상록수처럼 살고 있을 때, 박정희는 조선의 어린 것들에게 황국신민이 되라고 훈육하고 있었다.

장준하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아버지 장석인 목사를 위해 학병을 지원했을 때, 박정희는 교직을 박차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자원했다. 그리고 장준하가 만주 스즈끼 부대에서 탈출하여 김준엽 등과 함께 6000리를 걸어 중경 임시정부를 찾아갔을 때, 박정희는 일본도를 차고 침략군 장교로 만주에 부임했다.

장준하는 소학교 교사 시절 친구 김용묵과 함께 하숙을 했다. 남편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실종된 탓에 하숙집 여주인은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내는 하숙비가 주된 생활비였다. 그네는 두 청년이 주는 하숙비로 어린 딸 희숙을 공부시켰다. 그러니까 김희숙은 장준하의 제자이자 하숙집 딸이기도 했다. 그녀는 외모와 지능이 둘 다 범상한 소녀였다.

얼마 후 장준하와 김용묵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장준하는 하숙집이 걱정되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달리 이타심이 강한 장준하였다. 김희숙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존경하는 총각 선생님에게 끈질기게 편지를 보냈다. 생활이 어려워져 선생님의 도움으로 들어간 보성여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소식에 장준하의 마음은 아팠다. 게다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탓에 무보수 전도사로 산골을 전전하는 아버지도 그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아버지는 '요시찰인'이었고 '불령선인'이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요행으로 목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런 정황에 내가 학병을 거부한다면?'
장준하는 고뇌에 휩싸여들었다. 그러던 차에 김희숙의 편지가 또 날아든다.

"학교를 못 다니게 된 저에게 정신대의 위험이 닥칠 것 같아 불안해요."

심성이 과격하게 뜨거웠던 청년 장준하는 학병 지원과 희숙과의 결혼까지를 한꺼번에 결행한다. 당시 동경 유학 처녀 중에 장준하를 좋아하는 규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청산학원대학 학생이었다. 하지만 장준하는 정신대로 끌려갈 위기에 봉착한 하숙집 소녀를 구제하기로 한다. 숭고하기도 하고 무모하기도 했던 청년 장준하…. 그때가 1943년, 희숙의 나이 17세였으니, 재작년 미망인의 나이 82세라는 보도 기사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미군 OSS 특공부대에 합류한 광복군 경성지대장 장준하와 일본군 견장을 슬며시 떼어 버리고 광복군 합류를 애걸한 박정희가 둘 다 국가를 위해 사신 분일까? 이후 장준하는 백범을 모시고 쓸쓸히 귀국한다. 박정희는 조선경비대에 지원서를 넣는다. 장준하는 <사상계>를 창간하여 인권운동을 시작한다. 박정희는 밤에는 남로당, 낮에는 국군 장교로 행세한다. 장준하는 이승만 정권과 대립각을 세운다. 박정희는 여순항명에 연루되어 군대 내 남로당 동료들의 이름을 불고 혼자서만 목숨을 부지한다.

장준하는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 불가론'을 발표하여 국가원수 모독죄로 복역한다. 이후 박정희는 <사상계>를 폐간시킨다. 장준하는 '유신헌법 개헌 100만인 서명운동'을 개시한다. 그는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 형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자마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한다. 그러던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경기도 약사봉 등반을 하다가 실족사한 시체로 발견된다. 일본군과 광복군과 미군유격부대 훈련 과정을 모두 이수한 그가 야산의 중턱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었다.

전시회 방명록에 적은 이름 석 자, 장준하

방명록에 내 이름 대신 장준하의 이름을 적었다.
 방명록에 내 이름 대신 장준하의 이름을 적었다.
ⓒ 김갑수

관련사진보기


"아버지나 고인이나 모두 국가를 위해 사신 분입니다." (박근혜)

장준하는 명민하고 치밀한 인물이었다. 그는 학병에 나갈 때에도 탈영까지 염두에 두었으며, 탈영을 한다고 해도 그 당시의 통신 체제로는 고향에까지 그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 거라는 계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는 관동군 장교들이 광복군에 합류하겠다고 왔을 때에도 먼저 준열한 자기비판을 요구한 역사의식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딸처럼 여길 테니 어려운 일 생기면 찾아오세요." (미망인)

재작년 나는 정치적인 딸과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미망인 탓에 분노와 슬픔이 얼크러졌었다. 나는 발길을 돌려 다시 행사장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방명록이 있는 탁자 앞에서 붓을 쥐어 들었다. 그러자 아까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던 여직원이 방명록을 슬며시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나는 '박정희가 죽어야 이 나라가 산다'고 쓰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대신 나는 이름 석 자를 내려썼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이름이 아니었다. 나는 대책 없이 '장준하'라고 써 버린 것이다. 박정희 전시회의 여직원은 장준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까? 그는 내가 장준하인 것으로 알았을 터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 김갑수는 소설가로서 오마이뉴스에 추리장편 < BK연쇄살인사건 >을 연재 중입니다.



태그:#박정희 , #유품전시회, #박근혜, #장준하, #10`26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79,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