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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가진 철학의 깊이에 천착하기보다는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유감스럽고 안타까움에 주목했습니다. 내 안에 당당했다고 생각하던 것이 한국의 모순이 집약된 사건을 통해 혼란을 겪었고, 결국 내 스스로의 문제 인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고 실종된 것이었습니다, 그냥 지나간 사건에 대한 회고보다는 '지금은 다른가', '과연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10일 오후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해운대 메가박스 상영관. 6년 만에 작품을 내놓는 감독은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관객들의 질문에 간단하게 답변하지 않고 길고도 자세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거기에는 감독 자신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깊은 성찰'이 담겨 있었다.

이날 선보인 작품은 다큐멘터리치고는 상당히 긴 6년을 작업한 영화였다. 촬영기간은 1년 정도였고 감독이 마음먹기에 따라 더 일찍 선보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6년을 끌어야 했을 만큼 감독에게는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고 한다.

감독은 "태풍의 시간을 통과한 후에 시간을 가져야 했다. 편집기에 앉아 화면을 응시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덮어 버리거나 외면하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 갈등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를 만난 것은 영화에 대한 공감과 함께 못다 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의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많은 말을 쏟아냈지만 미처 더 꺼내놓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고, 작품을 본 관객들이 보인 반응에 대해 감독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관객들이 제게 큰 상을 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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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형숙 감독.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홍형숙이란 이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1995년 경기도 가평군 두밀리 분교의 폐교문제를 다룬 <두밀리, 새로운 학교가 열린다>로 시작해 1997년 한국독립영화사 15년을 정리한 <변방에서 중심으로>, 묻혀가던 재일동포 청소년 인권문제를 다룬 1998년의 <본명선언>, 그리고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의 이야기를 다룬 2002년 <경계도시> 등, 그의 작품은 높은 작품성과 빼어난 연출력으로 늘 주목받는 영화였다.

그는 상복 많은 감독으로도 통한다. <두밀리, 새로운 학교가 열린다>로 제1회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변방에서 중심으로>는 베를린과 암스테르담 영화제의 초청을 받기도 했으며, <본명선언>은 3회 부산국제영화제 운파상 수상작이었다.

인터뷰 과정에서 살짝 그 부분을 언급해 봤다. '오랜만에 내놓는 작품이니 이번에도 무슨 상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까'하는 마음에서. "지금껏 좋은 상을 참 많이 받으셨는데…"라는 물음에 홍 감독은 무슨 의미인 줄 알겠다는 듯 웃으면서 답했다.

"영화를 완성해 낸 것만으로도, 관객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큰 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이 제게 큰 상을 줬어요."

6년 만에 내놓은 작품의 세계 첫 상영을 마친 다음날(11일), 인디라운지에서 만난 감독은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뭔가 큰 부담을 덜어낸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망각의 시간 깨우며 성찰 요구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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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2>. 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출품된 이 작품은 홍 감독이 이전에 내놓은 <경계도시>의 속편이다. <경계도시>는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에 대한 이야기다. 7년 전 남과 북의 중간지대에서 양쪽을 아우르며 살고자 했던 한 학자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그 학자가 고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되면서 바로 후속편 작업에 들어갔으나, <경계도시2>는 참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공개할 수 있었을 만큼 감독에게는 힘든 작업이었다고 한다.

2003년에 촬영된 영화는 원래 37년 만에 돌아온 '경계인'의 고국에서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었다. 2002년에 <경계도시>가 공개돼 여론의 반향을 일으켰기에 <경계도시2>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영화였다.

그러나 세계적인 학자가 간첩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조선노동당 입당'과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에 초점이 맞춰진 당시의 전개 과정을 보면서, 감독은 제작 방향을 바꾸게 된다. 한국 사회의 경직된 현실이 감독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이념 논란에 경직된 사회. 좌든 우든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레드 콤플렉스'는 나름 깨어 있다고 말하는 진보조차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것은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적 판단은 마비된 것처럼 보였고, 모두가 합리적 판단을 하기보다는 짓눌러오는 상황에 눈치만 봐야 했다. <경계도시2>는 감독의 말대로 성찰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국가권력과 보수 집단이 개인에게 가했던 가혹한 압력과 공포스러움을 되돌아보며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감독은 2003년의 모습을 2009년에 차근차근 풀어내며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했다. '당시의 모습에 대해 부끄러운 줄 알고,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그것은 '망각의 기억을 깨우는 작업이었다.

104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에 전혀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감독의 문제제기에 공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영 시간이 너무 긴 것 아닌가 생각했던 것은 기우였을 만큼  1시간 24분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훌쩍 지나갔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와이드 앵글'은 독립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섹션이다. 지난해 <워낭소리>와 <똥파리> 등을 내놓으며 그 명성을 날렸고, 사회 문제에 대한 여러 고민이 담긴 영화를 볼 수 있는 부문이다. 홍효숙 프로그래머는 <경계도시2>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점들을 냉철한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다'면서 우리 안의 망각을 일깨우는 카메라'라고 평가했다.

시끄러운 굿판 벌였으나 결론은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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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고 긴장되고 어떨지 예측도 안 되고 머리도 복잡했어요. 그런데 관객들과 대화를 하면서 안심됐어요. 관객들이 큰 힘이 됐고, 아주 좋았어요. 그래서 홍효숙 프로그래머에게 그렇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지요."

영화를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이고 난 후 홍 감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첫 상영을 앞두고 많이 긴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만든 영화의 세계에서 첫 관객이 된 관객들은 고등학생 시절 봤던 <경계도시>를 이야기했고, 예전의 작품과 비교해 촬영기법의 차이를 묻는데다, 지금의 현실에 대입하는 질문 등을 던지며 영화에 대한 열띤 소통을 펼쳐나갔다.

그는 "관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써달라고 했다. 마치 관객들이 큰 힘을 준 덕분에 그간 짊어지고 있던 짐을 이제는 내려놓는다는 듯 가벼운 표정이었다.  

"시끄럽게 굿판을 벌였는데, 결과는 알맹이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2003년의 일을 회상하며, 그는 한국 사회의 비상식성을 이렇게 비꼬았다. 경계인으로 살고자 했던 한 학자의 양심에 대한 문제를 이념적으로만 접근해 몰매를 때려대는 모습은 광기 어린 우리 사회의 약점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다. 

그런데 여러 가지로 애쓰기는 했지만 진보진영도 송두율 교수의 오류를 지적하며 사실상 전향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진보언론들은 송 교수의 처신을 비판하는 사설을 싣고, 대책을 숙의하던 주변 지인들은 송 교수의 사과를 강요한다. 영화 속 송두율 교수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 이면의 동의는 없었으나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03년을 뜨겁게 달궜고, 세계적 석학에게 8개월여 간의 감옥 생활을 선사한 한국사회는 송두율 교수가 구속된 이후 망각의 시간으로 빠져들게 된다. 송 교수에 대한 마녀사냥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잦아들고 나서야 제대로 된 대응에 나선 진보적 시민사회진영은 뒤늦게 사건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지만 1심에서 실형이, 2심에서는 집행유예가 선고됐던 사건은 2008년 3심에서 마무리 된다. 결과는 모든 공소 사실에 대한 무죄 판결. 감독 표현대로 시끄럽게 벌인 굿판에 알맹이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감독은 당시 벌였던 이념 논쟁이 얼마나 허구에 찬 인격모독인지를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한편으로, 자신 역시 그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데 대한 반성의 의미를 영화 속에 담고 있다. 감독이 성찰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도 다른가?'라는 질문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념적 사고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에 대한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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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감독은 당시를 이야기하며 언론의 문제점들도 거론했다.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보도한 언론들이 이후에는 관심을 아예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유럽 언론의 예를 들며 "과정을 어떻게 보도했느냐에 따라 사후에 지속적인 보도를 해야 하는데, 송두율 교수가 부당한 국가보안법과 냉전적 사고에 맞서 싸운 것은 그저 묻혀 버렸다"며 "본인이나 한국사회에 무척이나 불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홍 감독은 "혹시라도 영화가 잘못 수용돼 송두율 교수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밝히면서, 영화 속 송두율 교수 대책회의 장면에서 논란이 됐던 '경계인'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한다고 말했다.

"경계인이라는 것이 오직 저울의 0점에 서 있어야 한다는 산술적 기술적 이해가 아닌 양자에 대한 이해로 제3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대를 만들어내는 노력이라고 봐요. 한쪽으로 발을 디딘 것을 저쪽으로 넘어간 것으로 판단한 것은 잘못됐다고 봐야지요. 균형적 생산적 시각이 가능할 수 있는 경계인을 한국 사회가 잘못 읽고 있는데,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홍 감독은 또 "송두율 교수의 소망은 서울과 평양, 독일에서 한 학기씩 강의하고 싶은 것이었다. 비록 멀고 먼 꿈이 됐지만 당시 입국을 선택한 것은 단순한 귀향이 아닌 양자를 아우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사건 처리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었지만 고국과 철학의 끈을 놓지 않고 연구중이라고 전했다.

최근 근황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은퇴해 독일어 자서전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영화를 통해 "우리의 환부에 치료가 필요하다는 시각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경계도시2>는 시기적으로 최근의 부산국제영화제 상황과 묘하게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이어서 더욱 주목되는 작품이다. 문화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근거없이 좌파 공세를 펼치는 세력들이나 거기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위축된 사람들은 마치 2003년의 모습에 겹쳐지기 때문이다.

홍 감독은 "그런 부분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이념에 사고에만 몰두해 있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영화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일깨워주는.

부산국제영화제 PIFF 경계도시 홍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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