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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30주년 공연을 맞아 그의 공연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에세이 연재입니다. [편집자말]
 정지영 영화감독과 가수 정태춘씨가 2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서 헌화 후 술잔을 올리고 있다.
 가수 정태춘씨가 지난 5월 2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서 헌화 후 술잔을 올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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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49재 겸 안장식이 있었던 지난 7월 10일 봉하마을. 며칠째 퍼붓던 장마비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한여름 햇볕이 쨍쨍했다. 하얀 종이모자에 노란 플라스틱부채를 든 사람들이 마을을 그득하게 메우던 그 날, 주차장에 임시로 설치한 가설무대에서는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연출을 맡은 정태춘씨는 출연진의 한 사람으로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 그날 그가 부른 노래는 <떠나가는 배>였다.

가사를 다 욀 정도로 귀에 익숙한 노래였지만, 이 날 이 곳에서 이 노래를 들을 때는 가사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한 것이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정태춘씨가 노무현 추모곡으로 이번에 새로 만들었나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드메뇨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 없이 꾸밈 없이 홀로 떠나가는 배
바람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아래 서서 노래를 듣는데 느닷없이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노래가 돌아가신 이에 대한 추억을 건든 것인데, 단순히 노래가사만이 아닌, 무대에 서 있는 저 가수의 뭔가가, 사람의 마음을 깊이 흔들어놓고 있었다. 약간의 떨림이 있는 남저음의 음색부터 표정까지 총체적인 뭔가가! 50대 중반에, 저 연배에, 무대에서 저렇게 분위기 있는, 저렇게 폼 나는 가수가 또 누가 있나. 그 아우라는 대중적인 인기나 음반판매량, 또는 불철주야 연습과 오랜 작품활동, 또는 특별한 무대매너 같은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작곡을 접은 지 몇 년이든, 그가 요새 기타 대신 주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건 말건, 또는 음악스튜디오보다 가죽공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건 말건, 그는 여전히 우리 대중음악에서 다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하고도 독보적인 어떤 자리를 갖고 있는 자작곡가수인 것이다.

지난해 연말에 신사동 한 지하 카페의 정태춘 데뷔 30주년 파티(정태춘씨 몰래 부인 박은옥씨와 왕년의 공연팀이 준비한 깜짝파티 겸 콘서트였는데)에서 "정태춘은 OO다"의 빈칸을 채워보라는 사회자의 주문에 가수 김씨는 "정태춘은 희망이다"라는 다소 뻔한 대답을 내놓아 좌중을 실망시켰는데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여서 사태를 역전시켰다.

"한국에서 남자가수가 외모와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희망이죠."

실제로 사춘기 시절의 정태춘씨는 가수 할 외모가 아니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하고 20-30대 시절의 사진을 지금 보면 콤플렉스도 무리는 아니다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지금의 그는, 봉하마을 무대 위에서 그는, 분위기 있는, 묵직한 중년의 매력을 풍기는, 심지어 잘 생겼다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그런 캐릭터다. 그러니까 그는 멋있게, 잘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에게 왜 <떠나가는 배>를 골랐느냐고 물어보았다. <떠나가는 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즐겨 부르던 노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야인으로 지내던 시절이었는데, 정태춘 박은옥씨가 부산지역에서 행사를 마치고 그와 함께 노래방에 가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여하튼 봉하마을 가설무대의 강렬한 감흥은 쉬이 버려지지 않아 서울로 돌아온 나는 <떠나가는 배>를 아코디언으로 연주해 정태춘 박은옥 커플의 비공개카페에 올림으로써 작가에 대해 오마주를 바쳤다. 그런데 연주를 위해 <떠나가는 배> 악보를 들여다보면서 새삼 내가 놀란 것은, 정태춘씨가 고작 서른 나이에 이 노래를 작곡했다는 사실이었다. 서른이 걸작을 쓰기에 이른 나이였다는 얘기가 아니라, A마이너-가단조의 처량한 곡조와 어딘가 노년에 어울리는 비감한 가사의 이 노래를 만들어서 부른 이가 이제 군대 제대하고 갓 데뷔한 파릇파릇한 젊은이였다는 것이다.  

 가수 정태춘, 박은옥씨가 2일 저녁 서울 중구 신당동 서울패션아트홀에서 열린 제3회 수다공방 패션쇼 '참신나다'에서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가수 정태춘, 박은옥씨가 지난해 12월 2일 저녁 서울 중구 신당동 서울패션아트홀에서 열린 제3회 수다공방 패션쇼 '참신나다'에서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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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씨는 1954년생이고 나보다 여섯 살 위다. 내 대학 시절에 군대 갔다오고 데모하다 휴학도 좀 하고 그렇게 느릿느릿 대학을 다닌 선배들 중엔 54년생들도 있었으니… 뭐, 나하고 같은 세대라고 해도 전혀 엉뚱한 얘긴 아니다. 하지만 내겐 일찍부터 정태춘씨가 한 세대쯤 훌쩍 위쪽이라는 고정관념이 박혀 있고 정태춘씨가 바로 앞에 있을 때조차 한참 웃 어른을 모시고 있는 것 같은 부담감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나이에 대한 현실감을 회복하기 위해 속으로 '54년생이라니까. 나보다 그저 몇 살 더 많다니까.' 그렇게 되뇌어 보기도 한다. 내가 언젠가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그들도 정태춘 박은옥씨 부부를 실제보다 훨씬 더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이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닌 것이, 그것이 외모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정태춘씨는 우리 나이로 고작 스물다섯에 데뷔 음반을 냈다. <시인의 마을> <서해에서>가 실려 있는 이 음반은 크게 히트했다. 1978년인데, 내가 대학 1학년생 때였다. 설상가상, 그는 1980년에 박은옥씨와 결혼했다. 내가 타임지 읽으면서 취직시험 준비할 때 그는 벌써 부부가수로 활동했고 TV에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그는 말하자면 재능을 타고난 조숙한 음악 영재(?)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30대 초반까지, 그 초창기에 부른 노래들이 <서해에서> <촛불>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등, 나이에 비해 과하게 원숙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우리들이 아직 제 앞가림도 못할 때 그는 이미 노숙한 노래들을 히트시키고 있었으니 우리 세대가 정태춘씨를 아저씨뻘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태춘씨가 1980년대 후반 이후 <버섯구름의 노래>나 <나 살던 고향> <92년 장마 종로에서> 같은 정치적 사회적 서사를 지닌 모던한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가 다소 데카당했던 청년기의 감상주의를 졸업하고 당대 사회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섰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가 잃어버렸던 자신의 사회적 나이를 소급해서 되찾아온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가 조선희씨.
 소설가 조선희씨.
ⓒ 조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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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착실히 공부를 해서 원래 목표대로 서울대 음대, 또는 그 어느 훌륭한 음대를 들어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스물 무렵의 그 지독한 방황은 강도가 퍽 줄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주류 음악교육의 세례가 그를 '정태춘 박은옥 음악세계'와는 전혀 다른 어떤 길로 이끌었을 것이 틀림없다. 또는 그가 대학의 꿈을 접어버렸다 해도 서울 명동에서 기타 메고 돌아다녔다면 그는 도회적인 포크송을 만들면서 당대의 통기타 가수들 중 그저 하나가 되었을지 모른다. 평택 농촌의 고향 마을에 청춘을 당분간 묻어야 하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국악과 양악이 버무려진, 정태춘 특유의 '국산 컨트리 풍' 노래들은 나오지 못했을지 모른다.

내가 정태춘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94년 무렵, 한겨레신문 문화부에서 아주 잠깐 대중가요 담당을 맡았을 때였다. 정태춘씨는 음비법(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불법 음반' <아, 대한민국>과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낸 뒤 기소당해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또한 그는 이미 TV를 떠나 '독립' 공연활동으로 대가 반열에 올라 있었다.

1994년 3월, <한겨레21> 창간홍보 전국투어 콘서트가 기획되었을 때 정태춘씨에게 전화해서 출연해달라고 부탁한 적 있다. 그는 흔쾌히 그러마고 했고 덕분에 순회공연이 성황이었다. 십수 년 묵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덧붙이는 글 | 조선희씨는 소설가로 <씨네21> 편집장과 한국영상자료원장을 지냈으며 <클래식 중독><햇빛 찬란한 나날>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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