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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로 보는 역사, <도자기를 손에 쥔자 세상을 얻으리라> 네번째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서민을 위한 그릇, 녹청자

고려시대 도공들에게 청자를 만드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습니다. 토기 가마는 하나씩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엔 청자 가마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청자는 고급 도자기입니다. 토기처럼 흙과 불만 있다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흙에도 불에도 유약에도 품이 많이 드는 노력이 필요하고 한 치도 어김없이 조절할 줄 아는 높은 기술을 가진 도공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만든 최고급 청자는 너무 비싸 국영도자기 생산단지인 도기소에서만 만들어졌고, 귀족들만이 쓸 수 있었습니다.

고려인들은 누구나 차를 즐겼습니다. 그들은 청자로 만든 찻잔을 원했습니다. 도기소에서 나오는 청자는 수량도 많지 않고, 가격도 비쌌으니 서민들을 위한 새로운 청자도 필요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가마들은 이런 수요에 맞춰 청자를 만들어내는 가마였습니다. 일자리를 잃은 토기도공들이 생계를 위해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서해와 맞닿은 낮은 구릉지대인 경서동(당시 인천 서구 검암동)에서 1965년 겨울에 녹청자 조각과 도기를 굽던 가마터(도요지)가 발굴됐는데요, 이것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녹청자도요지는 전 세계적으로도 일본에서만 두 차례 발굴됐고 이를 근거로 녹청자를 자신들만의 고유 양식이라고 주장했지만 인천에서 녹청자와 그것을 굽는 가마터가 새롭게 발견되면서 학계는 녹청자 발원지와 일본전파 경로 등을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녹청자는 얇은 질흙에 녹색을 띤 갈색 유약을 발라 구운 자기로 고려~조선시대 서민들은 이 녹청자를 접시,그릇 등으로 활용했습니다.
▲ 경서동 녹청자 사료관 1층 전시실 서해와 맞닿은 낮은 구릉지대인 경서동(당시 인천 서구 검암동)에서 1965년 겨울에 녹청자 조각과 도기를 굽던 가마터(도요지)가 발굴됐는데요, 이것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녹청자도요지는 전 세계적으로도 일본에서만 두 차례 발굴됐고 이를 근거로 녹청자를 자신들만의 고유 양식이라고 주장했지만 인천에서 녹청자와 그것을 굽는 가마터가 새롭게 발견되면서 학계는 녹청자 발원지와 일본전파 경로 등을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녹청자는 얇은 질흙에 녹색을 띤 갈색 유약을 발라 구운 자기로 고려~조선시대 서민들은 이 녹청자를 접시,그릇 등으로 활용했습니다.
ⓒ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 녹청자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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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도공들은 이미 흙에 대한 지식도 쌓았고, 불에 대한 기술도 있었으며 잿물유약을 만드는 방법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토기의 수준에서만 보자면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였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도기 굽듯이 청자를 구워낼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 '녹청자'입니다.

녹청자는 토기를 굽던 흙 위에 녹색유약을 입혀 구운 것입니다. 거친 흙을 써서 매끄럽지 못하고 기술이 모자라 여기 저기 기포가 터져 볼품없었습니다. 유약은 흘러내렸고 어두웠습니다. 그래도 도기에 비할 바가 아니라 청자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녹청자를 썼습니다.

녹청자는 고급 청자를 구할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좀 더 좋은 도기이거나 질이 안 좋은 청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청자를 질이 떨어지는 청자라고 해서 조질청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의 베스트셀러, 녹청자의 변신

고급 청자의 인기가 치솟을 무렵부터, 청자의 인기가 전혀 부럽지 않았던 녹청자가 나타납니다. 녹청자에 대한 이전의 편견을 모두 버리게 만든 이 놀라운 녹청자는 강진 옆 해남 산이면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흙도 유약도 다른 녹청자에 비해 더 나을 것이 없지만 이곳에서 만들어진 녹청자는 바닷길을 이용해 전국의 사찰과 지방의 관리들을 중심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가 고려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곳 녹청자를 굽는 도공들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신안앞바다에서는 강진에서 만든 청자를 싣고 가다 풍랑을 만나 가라앉은 배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청자보다 오히려 녹청자가 더 많이 있었습니다. 산이면 녹청자의 인기를 보여주는 이 녹청자는 강진의 청자와 함께 배를 통해 서해를 지나 각지에 팔려나갔습니다.)
▲ 청자철회초화문매병 신안앞바다에서는 강진에서 만든 청자를 싣고 가다 풍랑을 만나 가라앉은 배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청자보다 오히려 녹청자가 더 많이 있었습니다. 산이면 녹청자의 인기를 보여주는 이 녹청자는 강진의 청자와 함께 배를 통해 서해를 지나 각지에 팔려나갔습니다.)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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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토기에 조개껍질을 넣어 굽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다른 곳보다 남해안의 토기는 더 단단해서 '경질도기'라고도 부릅니다. 조개껍질을 흙속에 넣어 구우면 높은 온도까지 흙이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해남의 녹청자를 만드는 도공들은 남해안의 전통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예상치 못한 행운을 가져온 것입니다. 조개껍질을 곱게 빻아 넣어 만든 유약은 녹색유약이 가진 단점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조개껍질 속에는 탄산칼슘이 들어 있는데요, 이것이 바로 유약의 3대 성분 중의 하나입니다. 해남의 녹청자를 한껏 고급스럽게 만들어준 비밀이 담겨진 물질은 바로 '조개껍질'입니다.

칼슘이 들어 있는 유약은 잘 녹아 부드럽게 됩니다. 그리고 매우 높은 온도까지 올리지 않아도 유약이 녹아들어가기 때문에 보다 쉽게 도자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도자기 표면을 빛나게 합니다. 바닷가에 조개껍데기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듯이 말이에요. 이 성분이 들어갔을 때 비로소 아름답고 투명한 도자기가 만들어집니다.

규석, 장석, 석회석을 유약의 세 가지 요소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가 적절하게 배합되면 투명하고 빛이 나면서도 흘러내리지 않는 유약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고급 도자기에는 질 좋은 규석, 장석과 함께 석회석이 들어갑니다. 석회석이 바로 질 좋은 탄산칼슙입니다.

석회석에 비해서는 질이 떨어지지만 조개껍질을 곱게 빻아 넣으면 유약을 만드는 성분인 탄산칼슘이 배합된 고급유약이 됩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우아하고 그 나름대로 정겨운 서민용 도자기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해남의 녹청자는 저렴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새로운 청자로 탈바꿈하며 인기를 얻게 됩니다. 이 녹청자야말로 청자의 대중화, 도자기가 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데 1등 공신이 아니었을까요?

쌍화점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려의 서울인 개경의 번화가는 광화문이었습니다. 광화문 앞 도로 양편으로는 매우 고급스러운 상점과 술집과 음식점과 차를 파는 다점 등등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그 가운데 '쌍화점'도 있었습니다.

쌍화점은 만두가게입니다. 밀가루로 만든 얇은 껍질에 소를 싸서 만든 지금의 만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교자입니다. 고려의 만두는 밀가루를 발효시켜 소를 넣고 찐 중국식 만두인데 이 음식이 쌍화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것으로 찐빵과 비슷한 음식이라고 합니다.

고려는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온 국민이 차를 즐겨 마시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모자라는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두부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고 참기름이나 참깨를 먹었습니다. 외국 사신이라도 오면 고기요리를 해야 하는데 가축을 잡아 요리하는 것이 서툴기 그지없어 놀란 중국인은 그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놓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잘게 다져서 소를 만드는 만두가게가 개경에서 잘나가는 음식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쌍화점>은 고려가요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왜 쌍화점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졌던 것일까요?

유목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고기 먹는 법은 물론이고 고기 요리하는 법도 잊어버린 고려인들을 일깨웠습니다. 그렇지만 가축을 도살하지 못해 외국 사신이 혀를 끌끌 찼던 나라가 몽골에 항복한 문서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만두가게에 사람들이 넘쳐나게 된 데에는 충렬왕의 힘이 컸습니다.

충렬왕은 고려시대 임금 가운데 충자로 시작하는 첫 번째 임금입니다. 충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에서 보듯이 나라에 충성한 사람에게 주는 시호입니다. 충렬왕은 원나라에서 준 왕호입니다.

이름에서 확 풍기듯 충렬왕은 몽골풍을 우리나라에 퍼뜨리는데 앞장섰습니다. 원나라에서 원한 것도 아닌데도 변발과 호복이라는 몽골식 복장을 하고 몽골 군복을 즐겨 입었습니다. 그러니 권문세족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멈추지 않았지만 개경의 번화가에는 가게의 불빛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궁궐에서도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쌍화점>은 충렬왕을 위해 지은 노래입니다. 1279년에 오잠이란 사람의 지휘 아래 팔도에서 모아온 기생들을 남자로 변장시켜 지금의 뮤지컬과 비슷한 연극을 하게 했는데 그 때 불려진 노래입니다.

이 청자는 뚜껑과 받침, 수저가 완전하게 갖추어진 유물입니다.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찻잔으로 몽골풍입니다. 원나라 군복을 입고 원나라 식으로 꾸며진 쌍화점의 노랫가락을 들으며 이 찻잔으로 차를 마셨을 것입니다. 만두와 고기를 즐겨먹게 되었듯이 이 찻잔에 들어있었던 차도 녹차가 아니라 쌍화탕이거나 십전대보탕이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 청자상감용봉모란문개합 이 청자는 뚜껑과 받침, 수저가 완전하게 갖추어진 유물입니다.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찻잔으로 몽골풍입니다. 원나라 군복을 입고 원나라 식으로 꾸며진 쌍화점의 노랫가락을 들으며 이 찻잔으로 차를 마셨을 것입니다. 만두와 고기를 즐겨먹게 되었듯이 이 찻잔에 들어있었던 차도 녹차가 아니라 쌍화탕이거나 십전대보탕이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 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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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고려의 정신은 사라졌고 고려 음식 문화도 바뀌었습니다. 충렬왕은 쌍화점 노랫가락에 흥겨워 춤을 췄을지도 모르고 개경의 번화가 쌍화점에는 고기를 다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나라는 기울고 있었습니다.

권문세족의 도자기

고려의 임금과 사돈이 된 사람 중에 매우 독특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려에서는 왕실과 결혼할 수 있는 15개의 가문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곳에 속한 쟁쟁한 가문이 아닌데도 자기 딸을 왕비로 만들었던 사람은 임신이라는 상인입니다. 충혜왕의 네 번째 부인이 그의 딸입니다.

그를 어마어마한 재물을 가진 상인이며 왕의 장인이 될 수 있게 해준 것은 도자기입니다. 그는 도자기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번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도자기의 나라인 중국에 도자기를 팔아 거상이 되었다니 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상감청자는 원나라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아 고급관리들에게 보내는 선물 중 으뜸이었습니다. 조소라는 중국인은 상감청자가 값으로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물건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들에게 상감청자는 매력적인 도자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지요. 말 그대로 가장 고려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었던 셈입니다.

문벌귀족과 무신귀족은 자신들의 정신적인 가치를 담아내는 도구로 최고급 청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자기소'에 힘을 쏟아 관리했습니다.

개성 만월대의 고려 왕궁터에서 발견되었고,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 에게 ‘화금자기’를 바쳤다는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유물입니다. 도자기에 금을 입히는 방법은 마늘즙을 내어 금가루를 개어 그림을 그린 뒤 구우면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 청자 상감금체 원숭이 무늬 항아리 개성 만월대의 고려 왕궁터에서 발견되었고,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 에게 ‘화금자기’를 바쳤다는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유물입니다. 도자기에 금을 입히는 방법은 마늘즙을 내어 금가루를 개어 그림을 그린 뒤 구우면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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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문세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자기소를 수중에 넣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달랐습니다. 권문세족은 도자기무역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도공들을 다그쳤습니다. 그러니 도자기는 원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졌습니다.

이 상감청자는 그야말로 이 시대를 거울처럼 보여줍니다. 금을 입히는 것은 중앙아시아 기마민족들이 좋아하는 방법입니다. 원나라에선 이렇게 도자기에 금을 입힌 것을 고려에 요구했습니다.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에 들어갈 때 가지고 가는 선물을 '공납품'이라고 하는데 도자기는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러니 도자기로 떼돈을 벌어 임금과 사돈이 되는 일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문벌귀족이 민무늬 비색청자에서 지혜의 깊이를 보여주었다면 무신들은 상감청자 속에서 우리 민족의 도자기를 창조해냈습니다. 그러나 권문세족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원나라를 등에 업고 제 잇속만 챙긴 사람들입니다. 그런 권문세족에게 정신적 향기가 날 리 없습니다.

청자의 위기

원나라로 보낼 도자기를 만드느라 도공들은 점점 지쳐갔습니다. 문벌귀족이나 무신들은 자신들을 위해 도자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양을 만들기보다 질 좋은 청자를 만들게 했지만 이젠 달라졌습니다.

상감청자에는 더 이상 정교하고 섬세한 무늬가 없습니다. 그저 가마에서 구워 낸 흙의 변형품일 뿐입니다. 어설픈 그림을 새겨 넣은 청자가 버젓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청자를 만들어 낸 시대가 활기찰 리 없지 않을까요?

기사년인 1329년에 만들어졌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己巳’라는 글씨를 대접바닥에 새겼습니다. 60간지법에 따라 그 대접을 만든 해를 새겼기 때문에 ‘간지명 청자’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기사년은 60년에 한번 씩 돌아옵니다. 어지간하면 같은 간지를 새긴 그릇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 청자상감국화문 '기사'명 대접 기사년인 1329년에 만들어졌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己巳’라는 글씨를 대접바닥에 새겼습니다. 60간지법에 따라 그 대접을 만든 해를 새겼기 때문에 ‘간지명 청자’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기사년은 60년에 한번 씩 돌아옵니다. 어지간하면 같은 간지를 새긴 그릇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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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청자의 아름다움은 완벽한 짜임새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도자기에는 어지럽기 짝이 없는 그림이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 이 도자기를 만들 무렵의 세상도 그랬습니다.

탐욕스러운 권문세족들이 제 잇속만 챙기고 있듯이 쥐꼬리만한 힘이라도 가진 사람들은 달려들어 백성들에게서 뺏어가려고만 했습니다. 도자소도 예외는 아니라 중간에 빼돌리는 벼슬아치들이 많았던 것이지요.

나라에선 이것을 막아보려 도자기에 글자를 새겼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이 '간지명청자'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질서아래에선 욕심을 채우려는 이들을 다스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도공들은 늘어나는 주문량에 시달리다 못해 도망가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자기소들은 도망간 도공들로 문을 닫다시피 했습니다. 원나라로 보낼 도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자 다급해진 나라에서는 각 마을에 양을 정해 놓고 세금처럼 걷어갔습니다.

도공들은 자기소에서 도망 나온 뒤에도 여기저기에서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농사짓는 백성들이 갑자기 도자기를 만들 수는 없고 결국 도망 온 도공들에게 청자를 사들여야 했습니다. 이게 의외로 수입이 괜찮았습니다. 이래저래 자기소에 붙어 있을 도공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고려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멋진 청자들은 권력을 손아귀에 쥔 귀족과 왕실이 아낌없는 지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도망 나온 도공들에게 그런 일은 꿈도 꾸지 못하였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가마에서 질이 좋지 않은 흙과 유약으로 만든 청자가 품질이 좋을 리 없었지요. 청자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고려말 문인인 이제현이 지은 <익재난고>에는 도자기를 팔아 생계를 잇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자기를 사고파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지요
▲ 이제현 초상화 고려말 문인인 이제현이 지은 <익재난고>에는 도자기를 팔아 생계를 잇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자기를 사고파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지요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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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그것은 기회의 다른 이름

업친데 덥친격이라고나 할까요? 청자를 위기에 빠뜨린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청자가마는 남해안과 서해안의 바닷가를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옛날에는 수레가 다닐 만한 길이 거의 없어서 뭍으로 옮길 수 없었습니다. 바닷가에 있어야 만들어진 청자를 배로 개경까지 운반하기 좋았습니다.

이 일이 오히려 화를 불러왔습니다. 일본이 정치적인 혼란에 빠지자 왜구들이 먹을 것을 찾아 해적생활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해안가 마을이 피해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1350년부터 왜구들은 대마도를 근거지로 극성을 부려 결국 가마터는 폐허가 되고 도공들은 짐을 싸서 떠났습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도자기를 만들어내었고, 도자기의 나라인 중국에서마저 탐내던 명품을 만들었던 고려청자의 산실인 도자소의 시대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끝이었을까요?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흙이 참 많습니다. 산을 보면 바위가 드러나 보이지요? 모두 하얀색 바위입니다. 이 바위가 화강암인데 이 화강암에는 석영, 운모, 장석이라는 광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시간이 흘러 자갈이 되고 다시 작고 작은 알갱이가 되면 도자기를 만드는 흙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어디든지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넘쳤습니다. 공기나 물처럼 말이에요. 물론 단 한 곳은 제주도는 예외입니다. 제주도처럼 화산섬에서는 검은색 돌만 있기 때문에 도자기를 만들기 어렵습니다.

고려청자를 만들던 열정을 간직한 그들은 최고급 흙은 아니었지만 그 흙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인류가 최초로 토기를 만들었을 때처럼 말입니다. 위기는 그들에게 기회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도자기를 만들어내었습니다. 바로 분청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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