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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극단 <세자매> 주요장면 및 오경택 연출 인터뷰 안톤 체홉의 사라짐의 미학을 극화한 국립극단의 연극 <세자매>의 1,2막 주요장면들과 함께 연출가 오경택의 인터뷰를 동영상으로 담았다.
ⓒ 문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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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유명한 시인 푸쉬킨은 그의 시 <삶>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중략).. 모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또다시 그리움이 되리니"라고 말하고 있다.

 

경제를 살리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오히려 복지예산은 깎이고 인권과 언론의 자유가 후퇴하고 민주주의가 위협받으며, 뉴타운 건설과 4대강 사업 등으로 전 국토가 토건 사업장화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요즈음, 원작의 감동을 잘 살린 두 편의 연극이 명동과 대학로에서 마치 푸쉬킨의 시처럼 우리의 삶과 실존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 하고 있다.

 

42년만에 같은 극장에서 재상연되는 안톤 체홉의 <세자매>

 

먼저 소개할 <세자매>는 지난 9월 4일부터 시작된 국립극장페스티벌의 국립극단 참가작으로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홉(1860~1904)의 희곡을 젊은 연출가 오경택의 연출로 1967년 고 이해랑 선생이 당시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이후 42년만에 다시 옛 국립극장이었던 명동예술극장에서 극장 개관후 첫 상연작으로 이번 주말인 13일까지 열린다.

 

사라짐의 미학을 표현했다는 안톤 체홉의 '세자매'는 러시아의 어느 포병부대가 주둔한 마을에서 살고 있는 세자매에 관한 이야기다. 프로조로프가의 세자매인 올가, 마샤, 이리나는 모스크바에서 자란 교양있는 여성들이지만 아버지의 이직으로 지방도시로 온 후 항상 모스크바를 동경하며 다시 돌아갈 것을 꿈꾸고 있다.

 

맏딸인 올가는 책임감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고 둘째인 마샤는 이미 꿀리긴과 결혼하였지만 역시 유부남인 육군 포병대장 베르쉬닌과 사랑의 감정에 빠진다. 막내 이리나는 모스크바에 가고 싶은 열망으로 인해 사랑하지 않는 뚜젠바흐와 약혼한다. 

 

그들의 형제인 안드레이는 모스크바에서 대학교수가 되기를 원했지만 나탈리아와의 결혼으로 세자매 모두에게 불편함과 실망감을 안겨다 준다. 그런데 어느날 마을에 주둔해 있던 포병부대가 다른 먼 곳으로 떠나버린다. 갑작스런 포병부대의 이전과 함께 그들의 사랑, 꿈, 이상도 함께 사라져 버리게 되는데….

 

 

우울한 감정을 역동적 표현에 촛점을 맞춘 작품

 

체홉의 <세자매>는 일반적으로 작품이 너무 지루하고 길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오경택의 연출과 관록 있는 국립극단 배우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번 공연은 결코 지루하거나 길게 느껴지지 않는 편이다.

 

특히 연출가 오경택은 역동성이란 측면에 중점을 두었다. 이 작품에서의 역동성이란 사람은 우울할 때 이것을 즐기기보다는 이를 떨쳐내려고 무언가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소리를 지르거나 산책을 하고 또는 술을 마시거나 뛰어다니는 등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초점을 둔 것이다. 내면의 연기를 단지 표정만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지속적인 액션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 낸 것이다.

 

실제 체홉의 세자매에서는 계속 그다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거나 하지 않는다. 1막은 막내 이리나의 생일장면, 2막은 가장행렬이 있는 날, 3막은 마을에 큰 불이 난 어느날, 4막은 마을에 주둔해 있던 포병부대가 다른 먼 곳으로 떠나는 날. 이렇게 시차를 둔 각각의 하루들의 일상 장면들을 보여주는데 그친다. 하지만 그 속에 많은 서브텍스트가 숨겨져 있고 이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꿈과 이상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기자는 이 공연이 시작되기 며칠 전 연출가 오경택과의 인터뷰를 통해 연출가가 중점을 둔 역동성이 그 무엇이건 간에 2시간 반이 넘는 이 연극이 상당히 지루할 수 있겠구나 싶었지만 리허설 장면과 프레스콜에서 보여준 1, 2막을 보면서 결코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2막과 4막 끝장면에서 보여주는 홀로, 또는 여럿이서 함께 추는 왈츠 장면은 이 작품에서 음악감독을 맡은 김태근의 왈츠곡과 잘 어우러져 몽환적이거나 낭만적인 분위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창시절 아주 잠시라도 문학소년이었거나 문학소녀였던 적이 단 한번도 없는 관객에게라면 그다지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기자의 경우 이 공연을 보는 동안 만큼은 마치 중고등학교 시절, 밤을 세워 읽었던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이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등을 읽던 그 아련한 옛추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치 기자가 <세자매> 속의 막내인 이리나가 되어 스무살의 생일날 한 군인이 가져온 팽이가 빙글 빙글 도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는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산다는 것, 언젠가는 힘들어 보이는 지금의 의미를 알게 될거야

 

삶이란 것이 누구나 늘 마음 속에 품은 꿈이나 기대처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세자매>에서 갑작스레 포병부대가 떠나감으로 인해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어느날 한순간에 많은 것이 변화되고 그래서 어려움과 좌절에 빠져드는 경우는 우리의 인생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정말 그럴땐 대체 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신의 뜻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케 되기도 한다.

 

 

<세자매>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대사들,

 

마샤 그들 모두는 영원히, 영영 가는거야. 그리고 우린 여기 남아서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고 있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우리가 강조해야 할 인생을 말이야.

 

이리나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분명해질거야. 힘들어보이는 지금의 의미를 알게 될거야.  그리고 그 고통의 의미를 알게 될거야. 그리고 그때까지 우린 일을 해야 해. 난 일할거야.

 

올가 시간들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사라지고, 우리들도 사라질테지. 우리만 여기 잠시 남았어. 지금 알 수 없는 우리의 고통도 우리의 후손들에겐 기쁨으로 바뀌게 될거야. 

 

마샤와 이리나와 올가, 이 세자매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리고 푸쉬킨의 <삶>이란 시의 한 구절처럼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져도, 꿈과 희망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지속될 수 밖에 없고 그 삶의 의미를, 신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여도, 결코 죽음으로 스스로의 삶을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고 견뎌야만 하고 무언가를 계속 해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안톤 체홉의 <세자매>에서 극화했다는 '사라짐의 미학'이란 용어는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기자에게도 어렵게만 느껴지지만 <세자매>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삶이 힘들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말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 반드시 이겨내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떠나간 어느 누구처럼 죽음으로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카프카의 8쪽 분량 단편으로 2009년의 서울을 표현한 <야메의사>

 

 

이달 16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상연중인 연극 <야메의사>는 <변신>이란 작품으로 잘 알려진 20세기 초반의 체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8쪽 분량 단편소설 <시골의사>를 극단 백수광부(연출 이성렬)가 연극으로 만든 작품으로 결코 어렵지 않고 누구나 즐겁게 볼 수 있는 코믹 부조리극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매우 짧은 원작을 출연배우들이 공동 재창작한 것으로 현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의 서울과 그 속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실존을 주제로 그려내었는데 현실 풍자의 부조리극 형태를 취하면서도 결코 원작의 감동과 의미를 훼손하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원작인 <시골의사>는 눈 내리는 한밤중의 시골의사가 호출에 의해 환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부조리하게 묘사하고 있다.  급한 환자를 찾아가기 위해 떠나려는데 마차의 말이 그 전날 과로로 죽어버린 탓에 말을 못 구해 안달이 난 상황에서 갑자기 자신의 마굿간에 난데없는 마부와 튼튼한 말이 불쑥 나타나 마부가 자신의 하녀를 차지하는 조건으로 말을 태워 쏜살같이 환자에게로 보내게 된다.

 

그런데 막상 찾아간 환자에게선 환부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깊은 상처가 있지만 치료하지 못하고 결국 두고 온 젊은 하녀가 걱정되어 돌아오려 하나 올 때와는 달리 말의 걸음은 더디기만 하고 외투는 벗은 채로 추위에 떨며 눈오는 추운 밤을 한없이 느린 속도로 정처없이 헤메이기만 한다. 비록 작품 내용에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결국 시골의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눈오는 밤 산속에서 얼어죽는 것으로 보여지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극단 백수광부가 극화한 2009년 <야메의사>는 과연 어떤 내용일까? 원작과 마찬가지로 역시 주인공은 의사다. 그런데 야메라서 그런지 아내는 의사의 아내 답지않게 청계천 주위의 한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다. 시간적 배경은 분명 2009년인데 신기하게도 환자를 호출하는 것은 이른바 '삐삐(Pager)'라고 하는 1990년대 중반에 사라진 무선호출기다. 앞으로도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얼마만큼 뒤섞여질지를 예감케 하는 도구라고나 할까?

 

▲ 야메의사 극단 백수광부의 <야메의사>의 주요장면과 주연배우 이준혁과의 인터뷰를 동영상으로 담았다.
ⓒ 문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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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야메의사

 

환자의 호출, 의사는 바로 환자에게로 달려가려 하지만 비 오는 밤, 그의 스쿠터는 고장나버렸고 그는 우산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포장마차에 불쑥 나타난 수상쩍은 한 사나이, 신기하게도 그가 사는 집은 의사가 사는 집과 같은 집이었다. 어떻게 내 집에 이렇듯 전혀 모르는 사나이가 나도 모르게 살고 있었던 걸까? 아무튼 그 남자가 자전거를 빌려주어 그는 환자를 찾아 거리로 나선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거리로 나가는 순간, 그의 아내와 그 사나이가 함께 뜨겁게 포옹하고 있지 않은가?

 

의사는 순간 깜짝 놀랬지만 자신을 호출한 환자를 찾아 나선다. 자전거를 몰고 거리로 나가는 순간, 의사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매우 이상한 풍경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청계천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들을 만나는가 하면 화장실이 급한데 화장실 문을 막고서 기약없이 들여보내지 않는 이상한 할머니들, 컴컴한 지하실에서 검정 색안경을 끼고서 도끼를 마구 휘두르는 중절모의 초췌한 신사를 만나 겨우 탈출한다.

 

환자를 찾아 거리를 헤멜수록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난동을 부리는 어떤 사나이, 광화문 광장의 촛불소녀들과 전경들, 삼보일배를 하는 사람과도 마주쳤다가, 어느새 갑자기 시베리아 한 벌판을 헤메는 5명의 사나이들을 만나게 되는가 하면 그리스 신화 속의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화 속에도 끼게 된다. 과연 주인공 야메의사는 환자를 찾게 될까? 그리고 환자를 치료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될까?

 

카프카의 원작이 그러하듯 백수광부의 야메의사 역시 굉장히 부조리하다. 그리고 마치 한편의 판타지처럼 몽환적이지만 결코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웃다가 속으로 눈물을 흘리게도 되는 작품이다.

 

마치 시베리아 또는 알래스카의 벌판을 헤메는 것처럼 보이는 다섯명의 사나이들은 아직도 묻히지 못하고 냉동관 속에 잠들어 있는 5명의 용산참사자들을 의미하는듯 하다. 영화관에서 갑자기 난동을 부리며 "미워해라. 부디 원망해라. 담벽에다 대고 소리라도 질러라"고 하는 괴사나이는 얼마전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케 한다.

 

삼보일배를 하며 지나가는 이들을 못본채 자신들의 우산으로 가리고 횡단보도에 앞에 선 이들은 어쩌면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외면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화 역시 법과 인권이 대립하고 있는 이 땅의 장면들을 떠올린다. 그밖에 조중동과 진중권, 4대강사업, 촛불시민 등 모두가 2008년과 2009년의 서울 모습들을 보여준다.

 

ⓒ 극단 백수광부

 

연극은 결코 답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보여만 줄 뿐이지

 

연극은 그 자체로 현실을 개선하지 못한다. 다만 일깨워줄 뿐이지. 카프카의 실존주의 문학이 이렇듯 2009년 서울에 살아가는 개인들의 실존위기를 표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의 삶이 힘든 것은 어떻게든 이겨내면 된다. 하지만 우리의 실존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삶은 삶이고 실존은 실존이다. 삶은 헤쳐나가는 것이지만 실존은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명박시대, 지난 민주정부 10년이 그리운 기자에겐 결코 탈출구 부재의 실존위기 상황일 수밖에 없는 지금, 우리 개인의 실존은 과연 어떻게 찾아야만 하는 것인가?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논쟁 속에서의 시골의사처럼 목소리 큰 사람 소리에 맞춰 이랬다 저랬다 하며 시류에 영합하기만 하며 세월을 보내면 그냥 그 뿐인가? 탈출구 없어 보이는 지금의 시국에서 삼보일배 하며 지나가는 이들을 자신의 우산으로 가리며 못본채 하고 있으면 그냥 신호등의 불은 파란 불로 바뀌는 것일까?

 

연극은 결코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냥 보여만 줄 뿐이지. 애써 눈가리며 외면하고 있는 현재의 실존위기 상황을 다만 일깨워줄 뿐이지. 그래서 어쩌면 좀 더 답답하고 또 답답해지기만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답답함 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탈출구 없는 미로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며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극단 백수광부의 <야메의사>는 결코 어렵지 않다. 중고등학생들이 보기에도. 2008년과 2009년의 우리 서울의 모습과 개인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극 형태가 부조리하지만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느끼면 된다. 결코 그 속에 다른 심오함이 숨어 있지 않다. 아직도 여전히 어딘가에선 촛불이 켜져 있는 오늘, 보다 많은 관객들이 <야메의사>를 찾았으면 좋겠다. 웃으며, 속으론 또 눈물 흘리며.


태그:#안톤체홉 세자매, #프란츠 카프카 시골의사, #백수광부 야메의사, #명동예술극장 선돌극장, #삶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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