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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사 신라문무왕릉비가 빨래판으로 쓰였다고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 캡쳐
▲ 신문기사 신라문무왕릉비가 빨래판으로 쓰였다고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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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돌이고 알면 보물'이라는 말이 있다. 문화재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지난 4일 국립경주박물관은 '200여 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신라 문무왕릉비 조각이 경북 경주 동부동 주택 수돗가에서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이를 받아쓴 일부 중앙 일간지는 '빨래판으로 써온 신라 문무왕릉비 윗조각 찾아'라고 부풀려서 기사를 썼다.

"2살 때 이 집으로 이사와 40년간 살았지만 빨래판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글자가 적혀있어 관계부처에 신고했지만 묵살 당했다. 7년 전에 돌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팔지 않았다."

집주인의 항의를 받은 중앙일보는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8일 기사를 실었다. 현장 확인을 하지 않고 극적인 기사를 써야하는 언론과 문화재를 발굴하고 관리해야 할 당국의 뒷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해프닝이다.

정릉 약수터에서 찾아낸 소전대를 설명하는??정릉관리소 김용욱 소장
▲ 정릉 약수터에서 찾아낸 소전대를 설명하는??정릉관리소 김용욱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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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를 외면하는 문화재 풍토에서 적극적으로 유물을 재발견하여 보호하는 사람이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우를 범할 뻔 했는데 눈을 크게 뜬 것이다. 문화재청 정릉관리소 김용욱 소장이다.

그는 지난 8월 1일 정릉 관리소에 부임했다. 전임 정진호 소장이 경내 약수터에서 발견한 '소전대'를 국립고궁박물관으로부터 고증을 받아 보호하고 있다. 문헌과 의궤에서 소전대 위치가 확인되면 제 자리에 안치할 예정이란다. 정릉이 중구 정동에서 천장된 것이 1409년. 직선거리 100m 정도 되는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는데 600년이 걸린 셈이다.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왕릉 영역에 있는 유물도 이러할 진대 민가에 방치된 유물이야 말해 무엇하랴. 소전대는 능에서 제사를 지내고 돈을 태우는 곳으로 조선 초기 왕릉인 건원릉과 헌릉에만 있는 중요 유물이다.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가 인종을 모신 효릉에 모습을 드러낸 후 다시 사라졌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축문 태우는 곳은 '예감'이다.

정릉 태조비 신덕왕후 정릉 정자각과 비각
▲ 정릉 태조비 신덕왕후 정릉 정자각과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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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은 태조비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조선 초기 정치사와 한 여자의 파란만장한 역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당시 강씨는 그의 부인이었다. 이방원을 비롯한 다섯 아들을 낳은 한씨가 있었지만 등극 1년 전 세상을 떠났다.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강씨 역시 현비로 봉해졌다. 조선 최초의 왕비였던 것이다.

왕자의 난을 겪으며 방번과 방석 두 아들을 잃고 시름시름 앓던 현비가 숨을 거두자 태조 이성계는 황화방(현 정동)에 성대히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정릉이라 내렸다.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있던 태종 이방원은 정동에 있던 신덕왕후의 능을 사을한록(현 정릉동)으로 천장하라 명했다.

고려 공민왕릉을 본떠 웅장하게 조영된 정릉 석물은 해체되어 광통교에 쓰여졌고 정자각 목재는 태평관 건축에 쓰여졌다. 이 때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쳐주는 고석(鼓石)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정릉 신덕왕후 능침.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쳐주는 고석만이 조선 초기 석물이다.
▲ 정릉 신덕왕후 능침.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쳐주는 고석만이 조선 초기 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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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이 없이 잡초에 묻혀 있던 정릉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선조 14년(1581년) 실로 172년만이다. 덕원에 사는 강순일이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아가서 하소연하며 아뢰었다.

"저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國墓)를 봉사(奉祀)하는 사람들은 군역을 면하는 전례에 의하여 개정해 주소서."-<연려실기술>

태조의 부모를 비롯한 네 조상(四祖)의 묘가 함흥에 있었는데 조정에서 한 사람씩 정해 '국묘봉사자(國墓奉祀者)'라 하여 군역을 면제해 준 전례를 열거한 조심스러운 복위(伏爲) 제청이다. 태종의 종통을 표방하는 왕권에 목숨을 내놓는 모험이었다. 강윤성은 신덕왕후 강씨의 아버지다.

이렇게 불거진 신덕왕후 복위문제는 왕대를 이어가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현종 10년 (1669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마침표가 찍어졌다. 88년간 이어져 온 논쟁이었다.

"태종 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일한 효성이 천고에 탁월하셔서 요임금이 전하듯 순임금이 이어받듯 질서가 정연하였으니 사변에 대처한 방법이 유감이 없었으나 유독 신덕왕후에 대해서만 능침의 의절에 손상이 있고 배향하는 예가 오래도록 결손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예관이 예의 뜻을 몰라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조선왕조실록>

송시열의 차자를 현종이 가납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 과정에서 태종의 잘못된 조치를 바로 잡는다고는 차마 할 수 없으니 모든 죄는 당시 태종을 보필했던 신하가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허약한 왕권을 끌고 가는 왕실에 대한 신권의 승리였다. 현종은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으로 끌려간 봉림대군과 군부인 장씨 사이에 태어난 인물로 조선 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이다.

이로서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은 왕릉으로서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때문에 정릉은 장명등과 고석 등 조선 초기 유물과 혼유석과 망주석 받침돌 등 현종시대 유물 그리고 고종 시대 비석이 혼재되어 있는 특이한 왕릉이다. 여기에 이번에 발견된 소전대가 추가되면 한결 의미 있는 문화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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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