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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세대라는 말이 있다. 30대 나이, 80번대 학번, 60년생 세대. 그래서 386. 민주화운동의 세대를 이르는 말이다. 전두환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화를 일구었다는 어른들을 부르는 말이다.

 

88년 올림픽의 해에 태어난 나는 그 시절을 알지 못한다. 역사를 배우며 5월 광주와 6월 항쟁을 알았지만 여전히 386의 시대를 안다고는 하지 못한다.

 

실상 내 또래라면 모두가 그러할 테다. 몰래 읽히는 사회과학 금서들과 거리를 꽉 메우는 가두시위, 손아귀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이내 휙 날아가는 화염병, 숨이 턱 막히는 최루탄 가스, 가슴을 뒤흔든 열정적인 선동연설, 쫓고 쫓기는 어두운 밤거리, 피가 철철 흐르는 머리를 누르며 민주주의를 절규하던 시대를 우린 모른다.

 

그러하니 내가 <누란>의 주인공 허무성의 내면을 읽을 때, 386 시절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뒤에서 돌아보듯이 했다. 허무성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보다 역사의 맥락을 살피며 방황하는 어른의 행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88년생인 나는 모른다, 386세대의 치열함을

 

운동권의 막내 학번인 허무성은 남산 기슭의 고문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 고문은 정교하고 기술적이다. 몸뚱이와 영혼을 모두 유린당하고 허무성은 동지를 팔았다. 고문당한 뒤 고문기술자 김일강에게 얻어먹은 술은 허무성의 뇌리에 낙인처럼 남는 기억이 된다. 강산이 변해도 여전히 권력자로 사는 김일강에게서 허무성은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고문의 기억이 허무성을 꽁꽁 결박한다. 대학 교수가 되었지만 김일강의 '똥개'로, 학생들의 '꼰대'로 살아가는 왕년의 진보주의자는 혼곤한 공포에 빠져 있다. 모래폭풍에 사라져 버렸다는 옛 왕국 누란처럼, 허무성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무기력하게 죽어간다.

 

허무성. 슬쩍 보기에도 지은이 현기영의 의도가 담뿍 담겨 있는 이름이다. 국가폭력의 경험이 일천한 내가 허무성이 겪은 지독한 고문을 짐작하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일 터이다. <누란>을 읽는 동안 나는 그냥 멀거니 허무성의 추락을 지켜보고 있다.

 

시대는 허무성의 영혼을 사납게 할퀴어놓았고 그 흉터는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시대가 변해도 흉터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 아마 그 사실이 386의 공황상태를 만들었을 테다.

 

독재가 사라진 자리엔 시장이 도래했다. 과거에는 '전두환'이라는 실체가 있었지만 자본이란 그 정체 모를 강력한 존재였다. 무섭게 자본화 되는 세상은 386 사나이가 민중과 역사를 고민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전대협이 한총련으로 변하고, 민중이 시민으로 변했다.

 

거의 모든 386들이 회사와 가정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개혁과 상식을 외치는 시민운동가로 변신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과거 '의장' 따위의 운동권 이력을 팔아 정치권으로 편입했다. 한때 그리 열중하던 레닌과 마르크스의 이론들은 폐기되었고, 사회주의는 철부지들의 우스갯소리로 남았다. 시대의 열기는 빠르게 식어갔고 세상은 '쿨'해졌다.

 

'쿨'해진 세상에서 '핫'했던 386세대는 어떻게 살까

 

이제 사회과학은 민중을 해방시키는 법을 잊어버린 듯싶다. 나도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지만 더는 민중을 위한 학문이 아니다. 어느덧 학교 여기저기 들어와 자리잡은 여러 기업들의 브랜드를 보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폐과 이야기를 들을 때 그리고 상아탑의 모든 학문이 취업교육으로 변질되는 걸 섬뜩하게 피부로 감지할 때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아가리가 바로 코앞에 닥쳐 있음을 실감한다.

 

허나 그 자본의 공포에 진지하기란 쉽지 않다.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고 예민하면 이른바 '불순분자'가 된다. 국가권력에 의해서 뿐 아니라, 또래 세대에 있어서도 그렇게 규정된다. 재미없는 녀석, '쿨'하지 못한 녀석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쿨'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진지함이 고갈된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허무성과 나는 불안으로 공감한다. "우리가 바꾸려던 세상이 우리를 바꿔버렸다"는 386세대의 탄식은 아련한 향수인 동시에 끔찍한 트라우마의 흔적이 엿보인다.

 

작년에 촛불시위가 있었다. 대중지성이란 말이 나왔고 '안토니오 네그리'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시위 현장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되었다. 여중생에서부터 비보이까지, 촛불시위는 분명 새로운 모양의 시위였다. '대오'조차 없이 마음껏 흩어지고 모였다. 재미난 놀이 같았다. 혹 그래서일까, 촛불시위는 피곤해진 놀이처럼 별안간 사라졌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시위는 백날이 넘어가도록 계속되었지만 '명박산성'만 확인한 격이었다. 스무 해 시간의 간격을 넘어 오늘날과 옛날의 광화문 거리는 닮아 있었다. 촛불시위 도중에 불현듯 전대협의 깃발과 백 명 남짓한 어른들이 나타난 적이 있다. 옛날 전대협 사람들이었다.

 

막 회사에서 퇴근하다가 급히 뛰어들었는지, 어른들은 넥타이에 양복 차림이 많았다. 아마도 회사에서 과장, 부장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일 테다. 허무성과 같은 세대의 어른들. 그 어른들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보다 더 슬프게 보일까? 나는 그렇게 '핫'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걸 아무래도 실감하지 못하겠다.

 

독자여, 절망의 기록이 던지는 고민을 받아라

 

일찍이 지은이 현기영은 국방부에 의하여 '불온작가'로 선정된 바 있었다. 역사를 담담한 글로 풀어내는 노장(老將)이다. 현기영의 <누란>은 과거의 상처에 시달리며 현재를 사는 386 지식인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는 절망의 기록이다. 아직도 박정희의 유령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어찌하면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세계화를 운명론으로 만드는 작업은 가히 국가적 사업이다. 공공의 영역까지 민영화의 신앙 간증이 벌어진다.

 

파시스트들은 자유주의와 법치주의 따위의 이름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다. 어린아이처럼 악다구니를 쓰며 토익책을 마냥 붙들어야 하는 깜깜하고 어지러운 시대다. 현기영의 책은 위로보다 고민을 준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역사는 진보한다'는 해묵은 말을 믿는다. 허나 이는 실증적인 말이라기보다 실천적인 말이다.

 

실천이 없다면 당연히 진보도 없을 테니까. 현실에 마주한 벽이 강철처럼 단단하여 너무 아파 가끔은 눈물도 흘릴 테다. 그러나 눈물이 모여 강물이 될 것이고 마침내 벽을 부수어 무너뜨리고야 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흘린 눈물이 점점 거세게 흐르고 있음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래도, 역사는 진보한다.


누란

현기영 지음, 창비(2009)


태그:#누란, #현기영,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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