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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일본 큐슈 남단에 위치한 구마모토현 한 대학에서 열린 안중근 심포지엄.
 5일 일본 큐슈 남단에 위치한 구마모토현 한 대학에서 열린 안중근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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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석 남짓한 일본 구마모토학원대학(熊本學園大學) 강의실이 꽉 찼다. 주최 측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딱딱한 강의실 의자에 펜을 들고 앉은 사람들은 대학생이 아닌 청장년들과 백발이 성성한 일본 시민들이었다.

강의실 중앙에는 '안중근과 구마모토(熊本)를 생각하는 심포지엄'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들을 강의실로 이끈 이는 안중근 의사였다. 몇몇 일본 시민들이 실행위원회를 구성해 조선의 국적 1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준비한 심포지엄에 일본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지난 5일 오후 1시. 행사시간을 앞두고 강의실 앞쪽으로 낯익은 영정이 등장했다. '명성황후을 생각하는 모임'을 이끌고 있는 카이 도시오(甲斐利雄·80)씨가 준비해온 '명성황후'의 영정이었다. 카이씨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대부분이 구마모토(熊本) 사람인 것을 알고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15년 째 시해자들의 뒤를 쫓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안중근 심포지엄'에 명성황후 영정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카이씨는 "안중근 의사가 적시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 중 그 첫 번째로 '한국의 황후를 시해한 죄'를 꼽은 것을 알고 명성황후 영정과 시해에 가담한 구마모토 출신 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해 왔다"고 말했다. 강의실 뒷 편에는 그가 정리해온 '명성황후 암살 관계자 일람표'가 붙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과 그 의미'에 대해 강연하고 있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오른쪽).  왼쪽은 통역을 하고 있는 재일교포 주영덕씨. 오른쪽 상단에 명성황후의 영정이 세워져 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과 그 의미'에 대해 강연하고 있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오른쪽). 왼쪽은 통역을 하고 있는 재일교포 주영덕씨. 오른쪽 상단에 명성황후의 영정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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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심포지엄에 등장한 명성황후 영정

심포지엄 주제를 '안중근과 구마모토'로 정한 의문이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첫 주제발표자인 '천주교도 안중근'의 저자인 츠르 케사토시(津留 今朝壽·65)씨도 구마모토 사람이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청년해외협력대 일원으로 일본 외무성, 농림성 등에서 일하며 지금까지 80여 개 나라를 방문했다.

츠르씨는 "1975년 일본 문부성에서 벌인 일한 청소년의식조사를 위해 한 달간 한국에서 조사를 벌였다"며 "이 때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1위 이순신, 2위 안중근, 3위 김구라는 답변이 나왔다"고 밝혔다.

그는 곧바로 안중근 기념관을 들려 안중근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한 일을 알고는 오히려 흥분했다.

"알고 보니 일본 초대 총리대신을 하얼빈에서 죽인 사람이더군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안중근에 대해 구체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구마모토로 돌아와 여러 학자들을 만났지만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 관련 책을 찾아 읽으며 안중근에 대해 공부하다 오히려 푹 빠졌다. 그는 1995년 출간을 꺼리는 출판사를 전전하며 어렵게 '천주교도 안중근'을 펴냈다. 이 책은 그가 20년간 공부하고 조사한 것을 모아 놓은 '안중근 보고서'다.

"안중근과 만난 이후 안중근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50여 차례에 걸쳐 지인들을 한국의 안중근기념관에 데려갔습니다. 또 어느 나라를 가든 꼭 한국인 식당을 찾아 한국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천주교도 안중근'의 저자 츠르씨 "안중근 위해 살고 있다"

 '천주교도 안중근'의 저자인 츠르 케사토시(津留 今朝壽.65)씨. 그는 스스로 "안중근을 위해 살고 있다"며 안중근 의사를 알리는 일에 적극 나서고 있다.
 '천주교도 안중근'의 저자인 츠르 케사토시(津留 今朝壽.65)씨. 그는 스스로 "안중근을 위해 살고 있다"며 안중근 의사를 알리는 일에 적극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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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르씨가 쓴 책에는 안중근 의사와 각별했던 또 다른 구마모토 사람이 등장한다. 안중근 의사가 체포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까지 5개월 동안 통역을 맡았던 소노키 스에키(園木 末喜)씨다. 실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며칠 전 소노키씨에게 '日韓友誼善作紹介'(일본과 한국의 친선과 우의를 위해서 좋은 것을 만들어 소개하자)라는 휘호를 써 주었다.

츠르씨는 이날 강연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소노키씨는 안중근의 재판 과정 등을 통역하며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그 전에는 알지 못했던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의 죄상들을 처음 듣게 된 것이죠. 이후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접하며 크게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안중근은 태양빛 같은 인류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초청인사로 참여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올해 초 <안중근 평전>을 펴낸 바 있다. 

김 전 관장은 먼저 "일본 일각에서 안 의사를 암살자·테러리스트 운운하는 것은 폭력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라며 그 예로 신라의 대표적 지식인이며 불승이었던 원효(元曉) 대사의 '일살십활론(一殺十活論)'을 제시했다.

"원효대사가 어느 날 길을 가는데 큰 독사 한 마리가 까치새끼 10마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대사는 거침없이 지팡이로 독사를 내리쳤습니다. 제자가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물으니, '한 마리 독사를 죽임으로써 10마리의 죄 없는 까치새끼를 살리는 것이 참 불법의 가르침'이라 답하였습니다. 안중근은 폭력주의 상징을 제거함으로써 조선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기도하였습니다. 크리스찬이고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의 행위에 추호도 후회하지 않으면서 떳떳하게 교수대에 섰습니다."

김삼웅 전 관장 "테러리스트 운운은 인식 부족...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자"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과 그 의미'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과 그 의미'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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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관장은 "안중근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중일이 동양평화회의를 구성하고 국제 분쟁지인 여순을 중립화해 동양평화회의 본부를 설치하고 은행을 설립해 공통화폐를 발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며 "이는 당시 일본의 침략주의를 억제하는 틀로 오늘날 유럽공동체(EU)와 같은 지역경제 공동체를 제안한 것으로 놀랄만한 선각적인 혜안"이라고 평했다.

김 전 관장은 이날 강연을 통해 동양평화의 구체적 방안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구성을 제시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대책위원회의 한ㆍ중ㆍ일 3국의 공동 TV채널 설치안, 일본 민주당 새 총리로 예견되는 하토야마 유키오의 '동아시아 공동체',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의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 제안 등을 열거했다. 

"안중근 의사가 일찍이 제안했던 대로 동양평화회의를 구성하고, 공용통화와 평화유지군을 창설하면 동양평화는 물론 세계평화에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3국이 공동교과서를 만들고, 공동 출자하는 대학을 설립해 아시아 평화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는 이어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시민계급의 성장과 열린 역사인식이 요구된다"며 "19세기부터  이어져온 침략주의 사관과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청산하고, 동아시아 연대의 평화이념과 노선으로 바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연이 끝난 후 많은 질의 토론이 이어졌다.

한 참석자는 "그동안 안중근을 테러리스트 정도로 생각해 왔다"며 "오늘 심포지엄을 통해 안중근이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폭력'을 행사했고, 많은 일본인들을 감동시킨 평화주의자라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약 4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날 행사는 일본 구마니치 신문(熊日新聞)에 소개된 데 이어 구마모토 지역방송(RKK)에서도 다큐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한 참석자가 심포지엄 후 소감을 묻는 방송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 참석자가 심포지엄 후 소감을 묻는 방송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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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안중근, #구마모토, #감삼웅, #명성황후, #동양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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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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