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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는 단순한 옛날의 이야기일 뿐만 아닌 그 속에 역사적인 사실들도 종종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에 관한 여러 설화들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에 관련된 여러 전승들은 설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역사적인 내용들도 여럿 있다. <가락국기>에는 그러한 일련의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끄는 기록 중 하나가 바로 신라 탈해이사금과 관련된 기록이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의 김수로왕과 신라 탈해이사금은 상당히 대립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히 설화로만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끄집어 낼 수도 있다.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과 탈해이사금의 조우와 대결에 대해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실존성에 대해 논란이 되곤 하지만, 역사적인 부분에서 해석하여 두 이주세력간의 대결을 설화화 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일단 이 설화를 한번 살펴보면서, 그 역사성에 대해 해석해보기로 하자.

<가락국기>에서 전해지는 탈해이사금 설화

신라탈해왕릉 신라 4번째 임금이었던 탈해이사금의 무덤이다.(사적 제 174호)
▲ 신라탈해왕릉 신라 4번째 임금이었던 탈해이사금의 무덤이다.(사적 제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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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기>에는 탈해이사금에 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완하국(玩夏國) 함달파왕의 부인이 임신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는데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다.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으로 오니 그의 키는 다섯 자였고 머리의 둘레는 한 자나 되었다. 혼연히 대궐에 나아가서 왕에게 말하였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고, 나는 장차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하네. 나는 감히 천명(天命)을 어기어 왕위를 남에게 줄 수 없으니, 또 감히 우리나라와 백성을 당신에게 맡길 수도 없네."
"그렇다면 기술(奇術)로써 승부를 결정합시다."
"좋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다.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그 동안이 촌음(寸陰)도 걸리지 않았다. 얼마 후에 탈해가 본모습대로 돌아오니 왕도 또한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탈해는 이에 엎드려 항복했다.

"제가 기술을 다투는 장면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서 죽음을 면함은 아마 성인께서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仁德)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왕과 왕위를 다툰다 해도 이기기는 진실로 어렵겠습니다."

곧 탈해는 하직하고 나갔다. 인교(麟郊) 변두리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 배가 와서 대는 뱃길을 따라 떠났다. 왕은 슬그머니 그가 이곳에 머물면서 반란을 꾸밀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을 실은 배 500척을 보내어 그를 쫒았다. 탈해가 계림의 영토 안으로 도망하니,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이 기사(記事)에 적힌 일은 신라 쪽의 기사와는 많이 다르다.

석탈해는 왜 가락국에 왔을까?

석탈해왕탄강유허 석탈해는 다파나국에서 신라로 도착하였다. 조선에선 그 도착한 자리에 하마비와 땅을 하사하였고, 석씨문중에서 유허비와 비석을 세웠다.(경상북도기념물 제 79호)
▲ 석탈해왕탄강유허 석탈해는 다파나국에서 신라로 도착하였다. 조선에선 그 도착한 자리에 하마비와 땅을 하사하였고, 석씨문중에서 유허비와 비석을 세웠다.(경상북도기념물 제 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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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이사금은 흔히 알려져 있듯이 신라 왕족 석씨의 첫째 왕이자 월성 석씨(月城昔氏)의 시조이다. 신라는 박씨, 김씨, 그리고 석씨가 왕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주로 세력변화에 따라 서로의 합의나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왕위계승이 이어졌다. 석씨는 박씨나 김씨에 비해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진 못하였으나 신라 초기엔 왕족의 일원으로서 활약하였다.

<가락국기>에서는 탈해이사금의 출자를 완하국이라 적어 놓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이라고 적으면서 동시에 정명국(正明國)이나 화하국(花廈國) 출신이라는 설도 제시해 놓았다. 그러면서 용성국의 위치를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리에 있다고 밝혀놓았다.

탈해이사금, 즉 석탈해가 완하국을 떠나 가야에 왔다는 사실은 흥미로우면서도 단순히 설화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도 탈해왕이 금관국, 즉 금관가야의 해변에 닿았다가 다시 신라로 가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사실은 이 설화가 단순한 설화로만 치부하기 힘들게 한다. 역사성을 부여한다면 석탈해 세력은 신라로 가서 권력층의 일부가 되기 전 가야에 먼저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탈해왕의 키를 9척이라고 적은 것에 비해, <가락국기>에서는 키가 5자이고 머리 둘레가 1자로 적고 있다. 수로왕의 키가 9척임에 비한다면 석탈해의 모습은 흡사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9척이라고 하는 것과 비교하여 좀 더 시간적으로 앞선 일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수로왕릉 수로왕은 둔갑을 겨룸으로서 석탈해를 쫒아내었다. 이러한 설화는 당시 이주세력간의 알력다툼을 보여준다.(사적 제 73호)
▲ 수로왕릉 수로왕은 둔갑을 겨룸으로서 석탈해를 쫒아내었다. 이러한 설화는 당시 이주세력간의 알력다툼을 보여준다.(사적 제 73호)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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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석탈해는 수로왕에게 가서 다짜고짜 왕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다. 수로왕이 왕의 자리를 내놓을 수 없자고 하자 서로의 기술, 즉 둔갑으로 승부를 가르자고 한다. 한국 설화에서의 둔갑은 흔히 볼 수 있으면서 신이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펼치는 기술이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도 하백과 해모수가 서로 둔갑을 겨루는 것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예전부터 이런 이야기가 많이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둔갑겨루기의 승자는 수로왕. 석탈해는 자신의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그만 자리에서 물러선다. 그러면서 수로왕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을 인덕이라고 치켜세운다. 하지만 석탈해가 배를 타고 달아나자, 오히려 군대를 동원하여 뒤쫓는다. 문제는 여기에서 함선을 500척이나 동원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설화에 나오는 것으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500척이라는 숫자는 당시 쉽게 동원하기엔 큰 무리가 따른다. 삼국통일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해전인 백강구싸움에서 신라의 편을 든 당군의 함대가 170척, 백제의 편을 든 일본군의 함대가 400척 이상이었다는 점을 본다면 특히 그렇다. 가야의 모든 함대를 동원하더라도 500척을 동원하기 무리인데 겨우 석탈해를 쫒기 위해 500척이나 동원 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 이 기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수로왕과 탈해왕의 대립을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면, 둘 다 이주세력이고 가야국 내에서의 주도권 싸움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최종적인 승자는 수로왕이 된 것이며, 그에 따른 군사적인 행위가 있었으리라. 500척의 함선은 이를 설화화 하는 와중에서 가야국의 힘을 과시하려던 의도에서 덧붙여진 게 아닐까 싶다.

역사 속의 수로왕. 그 이미지는 어떨까?

신라오릉 박혁거세거서간과 알영부인,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파사이사금의 분묘가 있다고 전한다.(사적 제 172호)
▲ 신라오릉 박혁거세거서간과 알영부인,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파사이사금의 분묘가 있다고 전한다.(사적 제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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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의 실존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다. <가락국기>의 내용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기엔 무리인 부분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기록에서 수로왕의 존재가 보인다는 점을 볼 때 무조건 가상인물로 보기도 힘들 듯하다.

<삼국사기>에서도 수로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내용 자체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썼기에 가야에 대한 내용은 약간씩 언급되는 정도일 뿐이어서 건국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가 없다는 점은 아쉽다. 신라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 음집벌국과 실질곡국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이를 파사이사금이 중재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파사이사금도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한다.

이때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게 많다고 하여, 그를 초청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수로왕은 음집벌국에게 그 땅을 주기로 하였고, 문제가 해결된 것을 기념하여 신라에서 연회를 베풀게 되었다. 이 연회는 신라의 대표적인 귀족집단인 6부에서 관장하였는데, 이중 5부에서는 두 번째 관등인 이찬을 보내는데, 한기부에서만 직위가 낮은 자를 보냈다. 이를 본 수로왕은 크게 노하여 그의 종인 탐하리를 보내 한기부의 우두머리인 보제를 죽여 버리고 가야로 떠나버리는 국제적인(?) 사건을 일으킨다.

수로왕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신비로우면서도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탈해이사금과의 대결이나 신라에서의 일을 본다면 결코 인자한 할아버지라기보다도 한 성질 있으면서도 오만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그래도 왕으로서 품격이 떨어진다고 보기보다 인간적이면서도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은 과한 시선일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수로왕의 태도가 건방지고 오만하다고 보기보다 역시 시조왕다운 모습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한 왕조의 시조는 유화하고 인자하기보다도 강하면서도 확실한 지도력이 필요하다. 석탈해나 신라에서의 이야기는 그러한 수로왕의 진면모를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파사이사금이 신라의 대표적인 귀족을 죽인 수로왕에게 해코지는커녕 항의조차 못하고 음집벌국을 정벌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을 본다면, 수로왕 또한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고, 신라 또한 이를 응징하기엔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고대의 인물들은 고리타분하고 온화하다고만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자세히 그 면모를 바라보면 인간적이면서도 강한 모습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역사가 지금보다 결코 조용하지만은 않은, 훨씬 다양하고 역동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시대였기 때문이리라.

덧붙이는 글 | 수로왕과 관련된 설화 중 석탈해와의 대결 이야기를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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