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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주택을 임대해 사용하는 한국춤문화자료원. 좁은 공간이지만 그래도 방 하나를 김천흥 선생의 방으로 꾸며놓았다. 선친의 자리에 앉아 옛일을 회상하는 심소의 차남 김정완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무엇 무엇이 등재되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고 그 때마다 온 나라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단지 기뻐할 뿐이다. 이이러니하게도 자랑은 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지키려는 노력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이런 이중적 태도 아래 여전히 우리 문화와 역사가 신음하고 있기는 과거와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세계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은 더 말할 것도 없다.

 

1961년 문화재보호법이 발령된 이후 정부와 기관은 결코 적지 않은 노력을 우리 문화유산 지키기에 쏟아왔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 와서는 문화유산을 대하는시각의 변화가 요구된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참 아름다운 임종이 있었다. 심소 김천흥, 근현대 한국궁중무용의 가장 중요한 이름이다. 김천흥 그 이름만으로 춤이었으며, 자칫 사라질 뻔한 조선궁중무용의 아버지이자 산 역사였다. 99세의 임종이었으니 홀로 온전히 1세기를 그것도 가장 중요하고, 위기를 무사히 넘긴 한 세기를 보내고 그도 역시 역사 속에 묵묵히 잠들어 있다.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의 50세 탄신 축하연에서 춤을 춘 심소 김천흥에는 '조선의 마지막 무동'이라는 수식이 항상 따라붙었다. 그가 이후 춤을 떠났다 해도 그 사실은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될 터이다. 그러나 해금과 양금으로 이왕직아악부를 수료했으나, 정작 김천흥 선생이 주력한 부분은 한국의 춤이었다.

 

 1920년대 어느날. 이왕직아악부의 연주 장면. 중앙의 아쟁연주자가 심소 김천흥 선생.

당시 엄격했던 궁중예술과 민속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두 영역을 아우른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민속춤의 대가 한성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키 어려운 파격이었다.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고는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에서 해금과 일무 부문의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1971년에는 제39호 처용무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왕직아악부가 문을 닫은 1945년 이후 그 기능을 이은 국립국악원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부산서 개원하였고, 그나마도 그저 명맥만 유지하던 형국이라 궁중예술의 전승은 백척간두에 선 채 고사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해라 할지라도 국립국악원이 국립극장에 셋방신세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중요무형문화재 제정까지 그 어려운 종묘제례악의 전모를 지켜온 사실은 지난한 인고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국립국악원이 개원한 때나,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68년이나 한국의 경제상황은 어려웠다. 그랬기에 21세기 현재 당연하게 생각되는 많은 궁중무용이 이왕직아악부 이후 80년대까지 추어지지 않았던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그렇기에 80년대 김천흥 선생이 궁중무용 복원에 매진하여 40여종의 정재를 다시 세상 빛을 보게 한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업적이다.

 

물론 언제라도 문헌과 홀기(제례절차를 기록한 글)을 바탕으로 복원 및 재현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어린 기억이라도 직접 경험한 것과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조선의 마지막 무동' 김천흥이 있었기에 자칫 잃어버렸을 조선궁중무용들을 오늘날에도 세상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심소 김천흥 선생은 90을 넘긴 나이에도 직접 무대에 서거나, 후진을 가르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 2002년 무악 80년 기념무대에서 춘행전을 추는 모습.

결국 심소 김천흥이란 이름을 빼고는 적어도 종묘,문묘제례악에 있어서의 일무와 궁중무용 정재를 거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천흥이란 이름 석 자 자체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가난한 나라도 아니고, 문화유산에 대해 눈 어둡던 시절도 아니건만 선생 사후 2년이 지나도록 그가 남긴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정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후손과 몇몇 제자들의 노력이 외로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작년 선생 1주기를 맞아 하루미(국립국악원) 등 제자들이 뜻을 모아 '우리춤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김천흥 기록을 책으로 엮어 냈고, 얼마 전 2주기를 맞아 '김천흥의 해맑은 삶(김정완.하루미 엮음)'이란 제목의 추모사진집을 냈다.

 

김천흥 선생의 차남인 김정완을 주축으로 해서, 용인대 김정수 교수, 정재연구회 김영숙 등이 심소 김천흥 기념사업회를 결성하였고, 김정완씨는 김천흥 선생 장례 때의 부의금에 사재를 더해 1억원을 기탁했다. 그것을 과거 김천흥 선생이 모 신문사에서 받은 상금을 대학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듯이, 10년 정도 지속될 국악상 제정에 쓸 예정이다.

 

이런 움직임에 한국춤문화자료원(원장 신상미)이 가세하여 우선 웹상 김천흥아카이브 구축에 힘을 쏟고 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현재 춤자료원 사이트(www.kdrc.or.kr)를 방문하면 김천흥 선생 자료를 만날 수 있다.

 

 가지런히 정리.정돈은 되었지만 박물관급 수장기능이 전혀 없어 화재나 기후 변화로부터 유품과 자료를 지킬 방법이 없다. 이를 안타까워 하는 김정완씨.

이 정도라도 다행이긴 하나 정작 문제는 여기부터다. 마포구 성산동 일반 주택 1층을 임대해 쓰고 있는 그곳을 찾았다. 국악상 기금으로 쓸 돈은 묶어둔 채, 모든 경비를 스스로 해결해가야 하는 형편인 한국춤문화자료원에 보관 중인 김천흥 선생의 소중한 자료들은 화재, 도난 등에 무방비 상태였다.

 

사설 경비조차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료보관에 필요한 항온항습시설은 생각할 수도 없는 형편. 한국춤문화자료원 신상미 원장은 "국가기관이 맡아서 관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우리들도 항상 자료의 훼손에 걱정을 떨칠 수 없지만 당장은 해결책이 없다"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한국전쟁 당시 겨우 몸만 피신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해방 이전 자료를 모두 유실한 경험이 있는 김천흥 선생의 이후 자료들도 지금은 괜찮다 하지만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르는 위험에 빠져있다. 현재 한국춤문화자료원에는 설치할 자리를 못찾아 보관 중인 김천흥 선생 흉상을 포함해서 2,600여점의 자료들이 보관 중이다.

 

우리가 현재 보고 즐기고 혹은 알지 못하더라도 전통에 대해 자랑 삼는 한국춤의 뿌리는 두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다. 민속춤에서는 한성준이고, 궁중무용에서는 김천흥이다. 다행히 한성준 기념관은 홍성군에서 건립이 시작되었으나 아직 김천흥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상태다.

 

국립국악원에도 국악박물관이 있으나 사실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시설면에서 매우 부족한 실정이어서 이 참에 심소 김천흥 선생을 비롯해 국악사의 중요한 자료들을 한데 모을 수 있도록 국악박물관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소리들도 들리고 있다. 문화부건, 문화재청이건 관심을 갖고 근현대 사료들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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