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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학자 겸 지식인이신 최장집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이제 곧 풀잎에 이슬이 내리는 백로(白露)이니 더운 여름도 거의 지나갔습니다. 작년 6월 정년퇴임하신 이후 건강은 잘 챙기고 계신지요? 일면식도 없는 제가 불쑥 편지를 쓰게 된 것은 그동안 최 교수께서 발언하신 내용 중에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입니다. 특히 어제 국회 진보개혁입법연대에서 하신 강연을 보고는 몇 가지 의문이 추가로 생겼습니다. (관련기사 : "DJ-노무현 계승해서 선거 이길 수 있나... 진보, MB비판 몰두 자기성찰 기회 놓쳐")

오랜만에 강연에 나선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현재 민주당은 두 전직 대통령을 계승하는 데만 몰두해 있다"고 비판했다.
 오랜만에 강연에 나선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현재 민주당은 두 전직 대통령을 계승하는 데만 몰두해 있다"고 비판했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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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께서는 진보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 교수 자신도 스스로 '유연한 진보'로 자처하신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진보주의란 '현재의 사회체제를 개혁하는 데 중점을 두는 가치관 또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 교수께서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대의정치로서 정당의 역할을 유달리 중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점으로 본다면, 최 교수는 진보인지 보수인지 판가름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교수가 바람직하게 여기는 정당이 어떤 정당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최 교수도 한국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구별하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과문한 탓으로 제가 최 교수를 안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인 1998년, 최 교수께서 김대중 정부의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입니다. 당시 최 교수는 <조선일보>가 제기한 야만적인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보>는 한국전쟁과 관련한 최 교수의 논문에 이적성이 있다고 주장했지요. 애석하게도 김대중 정부는 보수진영 쪽의 여론 악화를 우려해 최 교수를 위원장직에서 사임하도록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최 교수는 7년간의 재판 끝에 법원으로부터 무혐의 판결을 얻어냈습니다.

최 교수께서는 당연히 이 사회의 지식인입니다. 지식인이란 사회와 정치에 관한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하나의 대의에 대해 논리 정연한 주장을 피력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최 교수는 민주주의에 전문적 식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 대로 이 사회의 대의에 관해 자기주장을 펼쳐왔습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나빠졌다는 '궤변'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표지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표지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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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는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서두에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가 더 강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나빠졌다고 하면 민주화가 곧 사회 악화의 원인이라는 식으로 읽힐 소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가 강화되었다는 말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전, 즉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시절에는 대관절 어떤 정당 체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인지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나빠졌다는 말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매도하는 한나라당 사람들 주장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과도하게 강한 주장과 확신은 대개 무지의 다른 모습"이라는 최 교수의 말이 생각나는군요.(<위클리경향> 인터뷰)

견강부회와 양비론으로 점철된 강연

"(민주당이) 앞 지도자를 승계하는 데 경쟁하고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향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겠느냐. 민주정치는 책임정치가 핵심이기 때문에 (지난 10년간의) 민주정부가 뭘 잘 했고, 뭘 잘못했는지 객관적으로 되돌아봐야 한다." -1일 강연 내용 발췌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러십니까? 당연히 민주당으로서는 두 지도자의 뜻을 계승하겠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시기입니다. 두 분은 민주당이 배출한 대통령들입니다. 최 교수의 주장은 견강부회이며 말 그대로 '비판을 위한 비판'처럼 들립니다.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강하지만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두 전직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세가 회복되고 있다. (진보개혁진영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잘못한다고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촛불시위, 두 전직 대통령 사망 등 큰 정치적 사건들이 생긴 과정에서 지난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참패한 이유를 성찰하지 못하고 이명박 정부 비판만이 강해지는 경향이 일어났다. 이후 정치경쟁을 주도한 담론은 민주 대 반민주라는 이분법적 구도였다." - 위 강연 내용 발췌

참으로 모호한 화법입니다. 최 교수는 작년 촛불정국이 지나고 나서도 촛불시위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더 강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똑같은 말을 또 하고 있습니다. 여론이란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입니다. 청와대를 포함한 한두 군데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높게 나오자 이것을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발언하는 의도는 무엇인지요? 

"(민주대연합론은) 억압적 담론이다. 현 보수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은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이러한 대동단결론은 이해관계를 억압하기 쉽기 때문에 곤란하다. (MB 비판이) 민주주의를 권위주의화하는 양상을 드러내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의미가 있긴 하지만 진보파가 스스로의 문제를 성찰하고 논의하는 걸 놓치게 된다. 역설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강화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를 악으로 규정하면 이명박 정부가 조금만 잘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심리적 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 위 강연내용 발췌

이것은 전형적인 양비론입니다. 양비론이란 논리의 포기거나 논리의 위장이 되는 수가 많습니다. 게다가 '민주대연합론'을 억압적 담론이라고 규정하셨군요. 그렇다면, "한국의 운동권 진보파들은 민주주의가 표를 모으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외면했다"(노회찬 마들연구소 강연 2006.12.23)라고 비판했던 것은 무슨 말씀이었는지요.

노무현보다 이명박이 더 민주적이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
▲ 최장집 고려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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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는 말,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성찰이란 어느 시대 누구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도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실 용의는 혹여 없는 건지요?

"이명박-한나라당 정부는 지난 10년간 진보개혁세력의 민주정부가 실패한 결과로 등장했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긴 하지만 앞 시기에 진보개혁정부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진보의 대안이 존재하지 않으면 반드시 보수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보수우위 양당체제는 진보개혁세력에도 책임이 있다."

지면상 최 교수의 1일 강연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 김대중, 노무현 계승에 연연하지 말라, 이명박 비판하지 말라, 대연합 만들지  말라, 그 시간에 자기성찰해라. 내 말대로 하면 이긴다. -

이것이 과연 진보학자의 발언입니까? 그리고 이것이 지식인의 언어란 말입니까? 우리는 헷갈릴 따름입니다.

이날 강연에 참석한 장세환 민주당 의원은 최장집 교수에게 "이명박 정부는 어떤 정부냐?"며 성격 규정을 요청했다. 이에 최 교수는 '인상적 비평'임을 전제로 "한나라당만 해도 많이 변했다"며, "과거 권위주의 정권 때와는 다른 정당이 됐다"고 답변을 시작했다. 최 교수는 "지금 체제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선거 등 기본적인 민주주의 제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라고 본다"고 말했다. - 오마이뉴스 <"DJ-노무현 계승해서 선거 이길 수 있나... 진보, MB비판 몰두 자기성찰 기회 놓쳐">

여기서 갑자기 '인상적 비평'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한나라당이 변했다구요? 저는 견해가 다릅니다. 최 교수는 2007년 7월 3일 <프레시안> 강연에서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지금 이명박 정부는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 교수는 지난 대선 전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최 교수 말대로 학자로서 원론적이고 이론적인 의견 개진이었을 터입니다. '선거에서 지면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취지의 말이었다고 나중에 해명하셨더군요.

하지만 최 교수의 그런 발언이 왜 하필 민감한 고비마다 터져 나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선 직전 가뜩이나 민주개혁세력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영향력 있는 학자 분께서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된다고 말하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몰랐다는 것입니까?

현실에 취약한 건가요, 다른 의도가 있는 건가요

최 교수는 작년 촛불 정국이 한창이던 때에도 촛불 시위를 격하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촛불시민을 마치 정부 전복 세력이나 되는 양 몰았습니다. 최 교수 말대로 최 교수는 학자이자 이론가입니다. 하지만 이론이라는 것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다양성과 구체성을 뜬 구름 속에서 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최 교수가 안고 있는 최대의 문제점은 바로 이 점, 현실에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태그:#최장집, #민주대연합,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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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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