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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가히 신종플루 패닉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는 지금, 효과적 예방법을 설명한다거나 정부의 늑장 대응 비판에 한 목소리를 거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유전자 치료, 세포 복제, 인공지능, 나노 기술 등 눈부신 과학적 성취를 이룬 21세기에 인류가 왜 '여전히'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오늘,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지 다소 '원론적이고 한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패자의 역습 ; 전염병의 귀환

교육과학기술부와 보건복지가족부가 신종 인플루엔자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초중고교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발열 상태를 확인하는 고강도 대책을 발표한 가운데 27일 오전 서울 신용산초등학교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이 고막체온계로 체온을 측정 받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보건복지가족부가 신종 인플루엔자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초중고교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발열 상태를 확인하는 고강도 대책을 발표한 가운데 27일 오전 서울 신용산초등학교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이 고막체온계로 체온을 측정 받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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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여 년 간 신종 (emerging) 혹은 재출현 (re-emerging) 전염병은 전 세계 공중보건학계에서 핫이슈였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잊혀진 질병이었던 '학질' (말라리아)이나 이질이 다시 유행하고, 레지오넬라, 렙토스피라 증, 신증후 출혈열, 최근의 사스 (SARS)에 이르기까지, 나중에야 정식 진단명을 갖게 된 다양한 '괴질'들이 연이어 창궐했다. 지구촌 시대의 진가를 보여주듯 무섭게 퍼져나가는 조류독감과 신종플루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나간 시절의 질병인 줄 알았던 전염병이 저개발 국가는 물론 전 세계에 창궐하는 이유로  크게 생태계와 인간 형태의 변화를 지목할 수 있다. 열대 우림 등 인간이 살지 않던 곳을 개발하면서 (자연계에는 존재했지만 인간과 접촉한 적이 없었던) 새로운 병원체에 노출되는 경우가 늘어났고, 지구 온난화 때문에 미생물의 특성과 숙주들의 분포가 달라졌다.

한편 의학 기술과 항생제의 발전은 수많은 생명을 구하기도 했지만, 병원 감염과 항생제 내성균이라는 새로운 위험을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대량 생산체계와 운송의 발달은 전대미문의 대규모 위험을 가져왔다. 빠른 생장을 위해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이면서 시작된 광우병의 공포는 일국을 넘어 세계로 확산되었고, 수십만 마리의 닭이나 돼지를 한꺼번에 '생산'하는 현대적 목축업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효율적으로' 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좋은 시험장이 되었다.

오늘날 국경과 지역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리기조차 어렵고, 덕분에 수많은 병원체들은 여권과 비자 없이도 지구촌 방방곡곡을 손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해외에서 들어온 선박으로부터 전염병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할 목적으로 근대적 '검역' 제도가 생겨났지만 (잘 입지는 않지만 미국 질병통제센터 요원의 공식제복이 해군 복장인 것은 이런 연원을 갖는다), 이런 방식으로는 이제 전염병의 확산을 막을 길이 없다.  현재 전염병의 창궐은 인간의 의식적 행동, 개발주의적 발전전략이 가져온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자, 그에 대한 생태계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전염병은 예측 불가능한 '개인의 불운'이 될 것인가

한 사회에 새로운 질병이 나타나거나, 혹은 개인들이 어떤 질병에 걸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원인이 무엇일까?"  결핵의 원인은 결핵균이라고 쉽게 답할 수 있지만, 대장암의 원인에 대한 답은 그리 쉽지 않다. TV 건강 프로그램을 열심히 챙겨본 시청자라면, 유전적 소인, 고지방 식이, 운동 부족, 비만 등을 언급하며, '다요인성'으로 여러 가지 '위험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질병이 발생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맞는 이야기이다.

대한의사협회와 서울시의사회 소속 의사들이 2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신종 인플루엔자 예방책과 감염시 대처방법 등을 홍보하기 위해 '신종플루 안내 및 상담센터'를 설치해 시민들에게 손 씻는 요령 및 치료거점병원에 대해 안내를 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와 서울시의사회 소속 의사들이 27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신종 인플루엔자 예방책과 감염시 대처방법 등을 홍보하기 위해 '신종플루 안내 및 상담센터'를 설치해 시민들에게 손 씻는 요령 및 치료거점병원에 대해 안내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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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전자의 간단한 대답, 결핵의 원인이 결핵균이라는 것은 과연 정답일까? 결핵균이 몸에 침입해야 결핵에 걸린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결핵균에 폭로된 모든 이들이 결핵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폭로된 결핵균의 양, 독성, 무엇보다 평소 건강 상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양결핍이나 면역능력이 저하된 이들이 결핵에 걸릴 가능성이 훨씬 높다. 물론 이는 결정론이 아니라 확률론적 모형에 근거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구 집단 사이에서 혹은 개인들 사이에서 '변이 (variability)'를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확률론적 변이 때문에 특정 개인의 질병 발생 가능성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고, 여러 가지 요인의 상호 작용 때문에 특정 질병을 발본색원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이들이 질병 발생 가능성이 동일하고, 우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뜻은 아니다. 국제 통계가 보여주듯, 말라리아와 결핵,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전염성 질환의 피해자는 저개발 국가의 시민들, 혹은 부유한 국가의 가난한 시민들이다. 우선, 이들은 각종 전염성 질환에 폭로될 가능성이 높은 환경에 살고 있다.

비위생적인 상하수도 시설이나 정비되지 않은 물웅덩이 등은 말라리아나 뎅기열 등을 전파하는 모기를 비롯하여 각종 병원체와 매개체들의 훌륭한 서식지가 된다. 또한 질병 발생 과정에서 핵심 요인 중 하나인 평소의 면역, 영양 상태가 안 좋을 가능성이 높다. 결핵은 물론이거니와 비교적 가벼운 설사병이나 호흡기 질환에도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질병이 일단 발병했을 때 치료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불평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효과적인 에이즈 약제가 개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약을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약값이 비싸서 못 먹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서구의 부유한 소비자를 위한 미용의약품 개발에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투자하는 기업은 많아도 수십-수백만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리슈마니아 증, 아프리카 수면병 등 열대성 전염병 치료약 개발에 나서는 제약회사는 드물다.

그리고 이러한 건강불평등 문제는 아프리카 최빈국과 선진국 시민들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 뿐 아니라 선진국 안에서도 재현되며, 전염성 질환을 넘어서 만성질환과 손상, 자살 등 다양한 건강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대한 역학자였던 웨이드 햄턴 프로스트는 20세기 초, "빈곤과 열악한 생활환경만큼 질병에 대한 비특이적 저항성을 변화시킨 것은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건강권에 대한 위협이며, 따라서 우리는 전염병의 예방과 관리에서도 사회적 조건과 영향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신종플루 예방백신 무료 접종, 진짜?

정부의 신종플루 대응을 지켜보면서 몇 가지 질문, 혹은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우선 정부와 한나라당은 신종플루 예방백신을 무료 접종하겠다고 했다. 예방접종은 접종 당사자는 물론 집단 면역도 상승을 통해 비접종자에 대한 보호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공중보건 프로그램이다. 더구나 접종 비용 때문에 생길 수 있는 경제적 장벽까지 없애겠다니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다른 전염병, 특히 세계보건기구에서 국가필수예방접종으로 정하고 있는 소아 전염병들에 대한 예방접종은 왜 무료가 아니고, 혹은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일까? 시급하거나 문제의 규모가 크지 않아서? 한편으로, 예방접종은 무료로 시행한다면서 왜 검사에 드는 비용은 상당한 본인 부담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일까? (한 병원에서 환자가 신종플루 검사에 지불한 본인부담금은 총 12만 6천 원이었다!) 아직 백신 공급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환자들이 조기 진단을 받고 전파 차단에 유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말이다.

국내 신종인플루엔자 세번째 사망자가 발생한 가운데 28일 오전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계동 보건복지부 브리핑실에서 정부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국내 신종인플루엔자 세번째 사망자가 발생한 가운데 28일 오전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계동 보건복지부 브리핑실에서 정부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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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정은 항(抗) 바이러스 제재인 타미플루의 강제실시를 언급하기도 했다. 만성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과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에 대한 강제실시를 주장했던 환자와 시민사회 단체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과거와 현재의 상황은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일까? 비단 신종플루만이 아니라 의약품 특허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업의 창의적인 노력과 투자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지적재산권과, 인간의 건강·생명의 가치는 어느 선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할까? 치료약제가 존재하고, 그것을 공급할 수 있는 방안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이윤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의 건강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은 과연 상식적인가?

한편 지역별 거점병원 지정을 둘러싼 논란은 자연스럽게 '공공의료'가 무엇인지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온 나라가 사스라는 신종 전염병으로 시끄럽던 시절, 지역 주민들의 반대 의견을 들어 지정치료기관을 거부했던 시립병원이 있었다. 미국의 한 공공병원 의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사례를 이야기했더니, 그들은 믿으려하지를 않았다. (미국에서도 예외적으로 훌륭한 공공병원이기는 했지만) 그 미국 병원은 낮은 수익성 때문에 민간병원에서 기피하지만 지역사회에 필수적인 서비스 - 화상 전문센터, 교도소 수감자 응급진료실 -를 제공하고 있었다. 근처에 유명 대학병원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원장은 이 두 병원 사이의 "지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철학적 거리는 전혀 가깝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지역사회의 안전망으로서 공공병원의 역할을 강조했다. 공공병원이 반드시 국가나 정부의 소유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며, 또 가난한 환자들만을 위한 의료기관을 의미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신종플루 거점병원 지정과 관련된 논란을 지켜보며, "그럴 줄 알았어, 공무원들이 하는 게 다 그렇지 뭐!"라고 자조하면서 취약한 공공보건체계를 아예 포기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보건의료의 공공성이 무엇인지 다시금 고민하면서 공공성 강화의 계기로 삼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의료전달체계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신종플루 예방접종 우선 대상군 중 하나로 만성질환자들이 고려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만성질환자를 '선별'해서 접종을 시행할 수 있을까? 만일 대다수의 시민들이 주치의를 가지고 있다면 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건강상태에 대한 객관적 정보는 주치의가 가장 잘 파악하고 있을테니, 주치의 판단에 따라 예방접종 여부가 결정되고 직접, 혹은 진단서 발급을 통해 보건소 등 다른 기관에서 접종을 받으면 될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백신이니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일차적으로 주치의와 상의하면 된다. 치료 과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경미한 증상부터 중증합병증에 이르기까지 신종플루 환자들은 다양하고, 또 대다수의 환자들이 적절한 대증치료만으로도 회복이 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일차진료 현장에서 문지기 역할을 해줄 주치의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지금처럼 각자 알아서 돌파하는 자유방임 의료서비스 시장에서 과연 신종플루의 예방과 관리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원칙'을 잊지 말자!

신종 인플루엔자 환자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가운데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약제실에서 직원들이 신종 인플루엔자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응급환자에게 처방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신종 인플루엔자 환자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가운데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약제실에서 직원들이 신종 인플루엔자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응급환자에게 처방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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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플루를 비롯한 전염성 질환의 관리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원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전염병에만 특이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건강 문제 일반에도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건강권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건강문제의 원인과 건강결과에서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은 '과학적 진보와 그 활용에서 비롯된 혜택을 누구나 동등하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필수 의약품의 적정 공급을 보장함으로써 가용성을 확보하고 검사와 치료 과정에서의 경제적 장벽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둘째, 다수의 건강 보호라는 보건학적 목표와 질병에 걸린 이들의 인권 보호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쯤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명사회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전염병에 걸린 이들은 도움과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환자들이지, 나의 건강을 해치는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다. 신종플루에서는 그나마 덜하지만 에이즈나 성 전파 질환처럼 사회적 낙인과 결부된 질환의 관리에서라면 균형점을 찾기 위해 더욱 섬세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과장된 공포에 근거하여 특정 집단을 배제하거나, 자신의 동네에 거점병원이 지정되는 것을 기피하는 것 또한 지양해야 할 모습이다.

셋째, 전염병 관리 정책이나 프로그램은 최대한 과학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증거들에 기반하되, 불확실성의 가능성과 가치 판단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정치적 이득을 고려한 선심성 정책 결정은 혼란을 야기하며 한정된 자원을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시민들은 어떠한 최선의 과학적 결정도 불확실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전문가들은 과학적 결정에 가치 판단이 개입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정치적·사회적 압력이 드높다고 해서 백신의 안전성에 관한 임상시험을 소홀하게 해서는 절대 안 되며, 예방접종 우선 대상 선정과정은 정치적 영향력이 아닌 최신의 역학적 증거들에 근거하되 그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와 같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개발주의적 발전 전략이 우리 사회에 혹은 지구촌 공동체에 적절한 것인지 근본적인 성찰을 해야 할 시점이 온 것 같다. 인류의 그러한 발전 전략이 인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오늘은 신종 플루이지만, 5년 전에는 조류 독감이었고, 다음 5년에는 또 어떤 새로운 건강위협이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신종플루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크기는 매우 작지만, 오늘의 지구촌, 한국사회, 보건의료체계에 던지는 문제제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울림을 갖는다.

덧붙이는 글 | 김명희 기자는 을지의대 예방의학교실(사회역할전공) 교수입니다.



태그:#신종플루, #전염병, #타미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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