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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부인 이희호씨와 유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안장식이 진행되고 있다.
 23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부인 이희호씨와 유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안장식이 진행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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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흙으로 돌아갔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그의 삶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그의 마지막 일기 그대로, 그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의 역사는 발전했다.

돌이켜보면 그의 역정은,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은 시지프스(Sisyphus)를 연상케 한다. 70년 당시 김대중은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 출마회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민주주의 승리를 위한 사명감과 신념을 갖고 절망을 모르는 시지프스(Sisyphus)의 신화처럼 최후의 승리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자신을 담금질하기 위해 비유한 이 '시지프스의 신화'가 투옥과 고문, 납치와 연금으로 점철된 그의 30년 인생험로의 운명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69년 11월 당시 42세의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가 40대 기수론을 처음 들고 나올 때만 해도 당대의 원로 정치인들은 '젖비린내 난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45세인 김대중 대변인에 이어, 48세인 이철승씨가 경선에 합세하자 '40대 기수'는 대세가 되었다.

결선투표에서 예상을 뒤엎고 김영삼 후보를 누른 그는 대통령후보로서 첫 공식회견 때 남북의 교류와 공존, 그리고 평화적인 통일정책을 제시해 다시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주장이지만, 반공이 국시이던 그 시절에 북한과의 공존은 금기였다. 유신-군부독재와 지역주의 그리고 색깔론이라는 3중 포위망에 갇힌 가운데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의 바위를 끌어올리는 시지프스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DJ, 5·16 군사쿠데타로 배지 잃고 동지 얻다

김대중에게 정치는 처음부터 형극의 길이었다. 고향에서 목포상고를 졸업후 목포와 부산에서 해운업으로 돈을 번 유망한 청년 사업가였던 그는 54년 3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과 달리 정치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네 번이나 고배를 마시는 동안 해운업으로 번 재산을 탕진하고 아내마저 잃었다.

그는 4·19 이후 허정 과도내각을 거쳐 새로 구성된 장면 내각에서 원외인물로서는 파격적으로 여당(민주당) 대변인에 발탁되었다. 얼마 후 그는 61년 5월 강원도 인제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사흘 뒤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어 버렸다(이 때문에 당선 기준으로는 6선의원이지만 의정활동을 기준으로 하면 5선 의원이다). 게다가 그는 잠깐 여당 대변인을 맡은 경력 때문에 군사정권에 구속까지 된 억세게 운 나쁜 정치인이었다. 박정희와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는 군사쿠데타로 배지를 잃은 대신에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자를 얻었다. 첫부인 차용애씨와 사별한 뒤에 천신만고 끝에 국회의원의 꿈을 이뤘으나 군사쿠데타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그는 그 무렵 부산 피난시절에 만난 적이 있는 이희호씨와 본격적으로 사귀어 청혼을 했다. 청혼도 정치적이었다.

이희호씨는 1980년대 미국 망명 시절을 두 사람만의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이때 같은 망명객이었던 필리핀 아키노 상원의원 부부와 만나 식사를 하곤 했다. 위 사진은 잡지 <피플>에 실렸던 것으로 이씨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시절 부엌에서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다.
▲ 가장 행복한 시절 이희호씨는 1980년대 미국 망명 시절을 두 사람만의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이때 같은 망명객이었던 필리핀 아키노 상원의원 부부와 만나 식사를 하곤 했다. 위 사진은 잡지 <피플>에 실렸던 것으로 이씨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시절 부엌에서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다.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며 나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시 YWCA 총무로 이화여대 강사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잘 나가던 골드미스'였던 이희호씨는 정치판에 가산을 탕진하고 앞날이 불투명한 김대중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이씨는 자서전 <동행>에서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

'대안있는 반대' 앞세워 여당으로부터 인정받은 야당 의원

그는 63년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에서 당선돼 '정식 의원'이 되었다. 10분 질의를 위해 10시간을 준비한 김대중 의원은 국회에서 곧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6개월 동안 본회의 발언 13회라는 최다 발언기록을 세웠다. 정부의 실정을 족집게처럼 집어낸 그의 주무기는 구체적인 사례와 수치를 들이대는 것이었다. 당시 기자들 사이에서는 김대중 의원을 만나려면 국회도서관에 가면 된다는 말이 돌았다.

6대 국회의 최대 현안은 한일 국교정상화였다. 당시 야당은 교섭 당사자를 매국노라고 매도하며 협상 자체를 무조건 반대했으나 김대중은 "국익을 확보하면서 국교 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때가 왔다"면서 "야당도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자"고 제안해 국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만 해도 정치 논쟁에서 반일과 반공은 절대적 안전지대였고 친일과 용공은 치명적 위험지대였다. '김대중은 사쿠라다'라는 반일감정이 들끓었으나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않고 대안 있는 반대를 해 여당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그는 베트남 파병안에 무조건 반대하는 야당 내에서 '의용군 파병' 대안을 내놓았다. 그는 또 파병이 현실화되자 박순천 당수와 함께 베트남을 방문해 장병들을 위로한 유일한 야당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당이 한일협상 당시 비리를 폭로한 야당의 김준연 의원을 제거하기 위해 임시국회 마지막날에 구속동의안을 상정하자 이를 적극 방어했다. 당시 국회는 공화당이 절대다수였으므로 상정은 곧 통과를 의미했다.

전날 밤늦게까지 발언을 준비한 김대중 의원은 의사진행발언권을 얻어 한일 국교수립 과정의 잘못과 구속의 부당성 그리고 국정의 문제점에 이르기까지 원고 없이 5시간 19분 동안 발언함으로써 여당이 비집고 들어와 발언할 틈을 주지 않았다. 결국 이효상 국회의장은 폐회를 선포했고 구속동의안은 처리되지 못했다. 이 기록은 의정사상 가장 긴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 발언으로 남아 있다.

대선후보 당선... '시지프스 정치인' 신화 시작

아직도 그 유산이 남아 있는 독재와 지역주의 그리고 색깔론으로 상징되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에 맞서 민주주의와 보편주의 그리고 한반도 평화라는 거대한 바위를 정상으로 들어올리는 '시지프스 정치인'의 신화는 대선후보로 선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대통령후보로서 첫 공식회견 때 남북의 교류와 공존, 그리고 평화적인 통일정책을 담은 3단계 통일론을 제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외에도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노사위원회 설치, 지방자치제의 부활, 여성 지위 향상 같은 굵직한 사안을 발표해 '대중 시대를 열어가자'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전파했다.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이후락 정보부의 정치공작이 본격화되었다.

경상도 전역의 후보 벽보 가운데 '2번 김대중' 밑에는 "호남이여, 뭉쳐라!" "호남 후보에게 몰표를 주자! 같은 영남 유권자를 자극하는 원색적인 구호가 나붙었다. 그에게는 중앙정보부가 제작한 '지역주의를 부추겨 정권을 잡으려는 대통령병 환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에 앞서 치러진 63년 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구 출신의 박정희 후보가 호남에서 윤보선보다 무려 35만 표를 더 얻었다. 지역주의가 없었다는 얘기다.

또 63년 선거 때만 해도 윤 후보가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하는 색깔론 공세를 폈을정도다. 박정희는 48년 여순반란 사건 때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군법회의에서 무지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군의 남로당 조직원 정보를 제공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가 6.25가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한 전력이 있다. 당시 박정희는 윤보선의 공세에 이렇게 정면 반박했다.

"매카시즘이란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서 새빨간 빨갱이를 만들려는 수법이다."

이렇게 강변했던 그가 유신 강권통치 이후 수많은 반정부 인사를 조작간첩으로 만들고 공산주의자임을 부인하는 민주인사들을 용공분자로 만들어 희생시켰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색깔론과 지역주의, 그리고 '불신공작'

5번의 죽을 고비보다 그를 더 괴롭힌 형극은 색깔론과 지역주의, 그리고 인간 김대중을 믿을 수 없는 인간으로 세뇌하는 '불신공작'이었다. 심지어 같은 야당조차도 정보기관의 세뇌공작 놀음에 박자를 맞췄다.

"김대중의 자작극이다."

73년 8월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을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동료 의원을 향해 여당 의원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더 기막힌 것은 야당의 동조였다. 유진산 총재와 채문식 대변인조차도 김대중이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하면서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심지어 김일성의 연방제를 지지했다는 낭설을 퍼뜨렸다. 후일 전자는 '이중대'였음이 드러났고, 후자는 아예 여당으로 옮겨가 국회의장을 지냈다. 이들의 뒤에는 정보기관의 세뇌공작이 있었다.

"정치생활 30년을 일관한 신뢰성이 전혀 없는 위험인물."

지난 1990년 10월 4일,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의 '사찰자료'에 올라 있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이 자료에는 1947년 5월 흥국해운 사장시절에서부터 1988년 12월 1일까지 40여 년 동안의 김대중의 중요 활동기록이 기록돼 있었다. 이렇게 보안사령부의 불법 감시를 받아온 사람은 1303명에 달했다.

군이 아닌 민간인을 사찰한 것은 대전복(對顚覆)과 반(反)쿠데타가 주임무인 군정보기관의 본령(?)을 벗어난 것이다. 군정보기관이 이럴진대 하물며 고문과 정치공작, 심지어 납치살해까지 기도했던 '김대중 죽이기'의 총본산이었던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1970년에 중앙정보부가 각종 정보력을 동원하여 그에 대한 방대한 조사보고서를 만든 이후 각급 정보기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출생 이래의 모든 것을 샅샅이 뒤지고 가공하여 만든 보고서 여러 편이 남아 있다. 1970년대 이래 그가 야당과 재야의 중심인물로 떠오르면서 보수언론과 적대세력에서 활용한 김대중 공격자료는 대부분 중앙정보부에서 만든 보고서가 텍스트가 되었다."(김삼웅, <후광 김대중 평전>)

그러나 그는 71년 대선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주도한 온갖 정치공작과 지역감정 조장에도 불구하고 95만 표 차이로 석패해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진 이 선거는 박정희로 하여금 "더 이상 선거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만들었다.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독재의 시작이었다. 그에게는 혹독한 감시와 회유공작이 뒤따랐다.

"보통 사람들도 우리 집에 다녀가면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다. 심지어는 전화 한 번 했다고 사업을 망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내장산의 한 호텔은 선거 때 우리를 돈 안받고 재워줬다고 해서 문을 닫게 했다. 우리를 가까이 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은 용기 하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내외 또한 피해를 줄까 두려워 누구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이희호 자서전, <동행>)

처음으로 재야와 손잡은 '원조 촛불' 정치인

그런 상황에서 돌파구는 재야와 손잡는 것뿐이었다. 그는 독재정권의 끝이 안보이는 암울한 현실에서 처음으로 재야인사들과 결합해 이른바 '3.1구국선언' 사건을 주도했다. 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운동 기념 기도회에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폐지하고 의회정치의 회복과 사법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선언문을 읽고 촛불을 든 것이 전부였다.

그 점에서 그는 처음으로 재야와 손잡은 '원조 촛불' 정치인이었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반대'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온건한 요구였으나, 당시의 검찰도 이 '원조 촛불'을 '정부 전복 선동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 사건으로 김대중·문익환 등 11명이 구속 기소되고, 윤보선·정일형 등 7명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김대중은 구속자 중에서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재판 결과 김대중, 문익환, 윤보선, 함석헌 등이 각각 징역 5년을 선고받는 등 대부분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이 사건은 국내 언론에는 보도조차 되지 않았지만 외신에는 자세히 보도되었다. 오충일 목사의 증언이다.

76년 3월 1일 암울했던 유신시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일형 박사(앞줄 오른쪽) 등과 함께 서울 명동에서 유신철폐를 위한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왼쪽이 김옥두 전 의원이고 김대중 뒤로 부인 이희호씨와 권노갑 전 의원이 보인다).
▲ '원조 촛불' 정치인 김대중 76년 3월 1일 암울했던 유신시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일형 박사(앞줄 오른쪽) 등과 함께 서울 명동에서 유신철폐를 위한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왼쪽이 김옥두 전 의원이고 김대중 뒤로 부인 이희호씨와 권노갑 전 의원이 보인다).
ⓒ 김대중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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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은 76년 3·1구국선언을 주도했다. 당시 한국은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전 세계의 양심이 일어난 것이다. 국제적으로 교회가 연대하는 계기가 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양심의 증언과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라는 희망의 싹을 틔웠다."

이 사건은 정치인 김대중이 문익환 목사, 함세웅 신부 등 재야인사들과 만나 이후 집권으로 가는 돈독한 연대를 맺은 계기가 되었다. 또 이때 옥바라지를 함께 한 가족들이 석방투쟁을 위해 만든 '구속자협의회'는 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되어 80년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로 확대 발전했다. 실제로 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직선제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와 경쟁했던 DJ가 재야로부터 '비판적 지지'를 얻게 된 것도 3·1구국선언 사건으로 맺은 끈끈한 연대 덕분이었다.

한반도 평화 기운 불어넣은 그의 '마지막 선물'

3·1구국선언 사건은 또한 정치인 김대중에게 내공을 다질 수 있는 계기였다. 서울에서 가장 멀리 있는 진주교도소로 보내진 DJ는 옥중에서 마치 대학 입시생처럼 시간을 짜놓고 역사와 문학, 철학 등 다양한 책을 무섭게 독파했다. <김대중 옥중서신>과 84년 미국 망명시절에 하버드대에서 집필한 <대중참여경제론>, 94년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와 벌인 지상 논쟁으로 유명세를 탄 <문화가 운명인가?>(<포린 어페어> 기고문) 등은 '프리슨 대학'(감옥) 옥중 독서의 결과물이었다.

알다시피 김 전 대통령은 정규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프리슨 대학'에서 독학으로 공부해 92년 러시아의 외교아카데미로부터 정식 박사학위(정치학)를 받고 모스크바대학 평생 명예교수 자격을 딴 입지전적인 인간 승리의 표상이었다. 그는 또한 역사의 진보를 낙관하면서도 늘 역사 앞에 겸손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다.

그는 정계 입문 이후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에서 숱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지만 평생 독재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야당의 길을 걸은 비주류 정치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라도 출신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단군 이래 최초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이뤄낸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또한 단군 이래 최대의 국란으로 간주된 환란(IMF 긴급구제금융)을 국민과 함께 최단기간에 극복한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71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4대국 한반도 평화보장론'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이래 군사정권 30년 동안 줄곧 '빨갱이' 혹은 '용공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왔다. 그럼에도 그는 레드 콤플렉스가 지배하는 분단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와 남북 화해협력의 첫발을 내딛음으로써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내고 냉전의 섬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은 '현대 정치사의 거목'이었다.

민주진영의 단일화 실패로 민주주의를 5년 지체시킨 정치인으로서의 과오와 대통령 재임중 두 아들을 관리하지 못한 인간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김구와 이승만에서부터 박정희와 김영삼, 그리고 작고한 노무현까지 한국 현대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정치인은 많지만,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헌신한 위대한 사상가로서 '성공한 정치인'은 그가 처음이자, 아직은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23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안장식에서 부인 이희호씨와 장남 김홍일 전 의원 등 유가족들이 허토를 하고 있다.
 23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안장식에서 부인 이희호씨와 장남 김홍일 전 의원 등 유가족들이 허토를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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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행동하는 양심'으로 한 평생 짊어지고 온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라는 거대한 바윗돌은 마침내 노벨평화상이라는 국제공인을 획득했다. 그러나 노정객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묻힌 지석(誌石)의 문안대로 그는 "2003년 2월 퇴임하여 서울 동교동 사저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가 평생 끌어올린 '시지프스의 짐'은 이제 후배들의 몫이 되었다.

그는 죽어서도 국민에게 많은 선물을 남겼다. 그의 병상에서는 70~80년대 민주화를 이끈 정치권의 두 축인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의 화해가 이뤄졌고, 장례식장에서는 12개국 조문사절단이 그를 기리며 국격(國格)을 높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죽어서도 한반도에 '햇볕'을 쬐어 이명박 정부의 첫 고위급 남북대화라는 '마지막 선물'을 남겼다.

평생 동지로 47년을 '동행'한 이희호씨가 전한 남편의 유지는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평화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70년대 한국은 아무런 희망이 없었고,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을 때 전세계의 양심을 일깨워 민주주의라는 희망의 싹을 틔운 이 '원조 촛불 정치인'은 마지막까지도 자신을 녹여 세상을 밝히는 촛불 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는 우리에게 '촛불'을 유산으로 남겼다. '행동하는 양심의 촛불'을.




태그:#김대중, #시시포스, #원조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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