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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김대중
ⓒ 오마이뉴스 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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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정치사의 거목이 끝내 쓰러졌다.
 
김대중(DJ) 제15대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3분에 타계했다. 지난달 13일 폐렴 증상으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지 37일째만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동안 몇 차례 위기 때마다 의료진의 집중치료를 받아 고비를 넘기는 듯했다. 그러나 오랜 인공 혈액 투석과 호흡곤란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의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노무현 제16대 대통령이 서거한 지 87일 만이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두 전직 대통령이 한해에 타계한 것은 처음이다. 대(代)를 이어 집권한 두 전직 대통령이 같은 해에 나란히 타계한 것은 앞으로도 보기 드물 일이다. 이로써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계속된 보수정권 일색의 헌정사에서 유일하게 민주개혁 성향의 정부를 이끈 두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다.
 
향년 85세. 그는 일생 동안 5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집권에 성공할 만큼 강한 의지와 집념의 소유자였지만 노환으로 인한 병마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유족으로는 62년 결혼 이후 47년 동안 그의 정신적 동지이자 삶의 동반자였던 이희호(87) 여사와 홍일(61)·홍업(59) 전 의원과 홍걸씨(46) 등 세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있다.
 
해방후 '건준' 참여로 평생 '좌익 용공분자' 낙인
 
18일 타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남 무안군 (현재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97번지에서 김운식(金云式)과 장수금(張守錦)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1924년 1월 16일자로 출생등록(실제로 태어난 날은 6일)을 했으나, 1943년경 일제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해 이 내용이 김대중의 공식적인 생년월일이 된다. 이 때문에 그의 반대자들은 나이를 속였다고 비판하곤 했다.
 
그는 고향마을 '후광'을 평생 아호로 삼을 만큼 고향을 사랑했다. 수평선, 파도, 물새, 바람과 햇살은 그에게 꿈과 용기 그리고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뭍으로 옮겨,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현 전남제일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해 1943년에 졸업했다.
 
김대중은 졸업후 곧바로 해운회사인 목포상선회사에 취업해 회사관리인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등 청년사업가로 활동했다. 해방을 맞은 1945년에 그는 해운업계에 널리 알려진 성공한 청년사업가였다. 이듬해 차용애씨와 결혼해 슬하에 홍일·홍업 두 아들을 두었다.
 
김대중은 언론인이기도 하다. 그는 정부 수립 직후인 48년 10월부터 50년 10월까지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다.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해방이 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건준(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이듬해는 신민당 목포지부에 참여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좌경화 움직임이 보여 탈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건준 참여 등을 이유로 그의 정적과 보수우익 세력은 그를 평생 좌익 혹은 용공분자로 매도했다.
 
그는 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사업관계로 서울 출장중에 6·25를 맞아 걸어서 목포로 귀가하던 중 공산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총살 직전에 탈출했다. 인간 김대중의 첫 번째 죽을 고비였다. 이후 그는 '국민 방위군 설치법'에 준하여 창설된 '해상 방위대'에 참가해 전라도지구 부사령관으로 전쟁물자와 피난민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의 반대세력은 병역기피라고 몰아붙였다.
 
국회의원-대통령 선거 세 번 연속 낙선... '불굴'은 이희호씨와 신앙의 힘
 
그는 사업 근거지인 목포와 부산에서 6·25전쟁과 정치 파동을 겪으면서 올바른 정치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자로 군림하고,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하자 부패한 정권과 싸울 것을 다짐했다. 이후 그는 97년 집권할 때까지 독재와 타협하지 않고 평생 야당의 길을 걸었다.
 
정치는 그에게 숱한 좌절과 시련을 안겨주었다. 그는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직선)에서 모두 세 번 연속 떨어졌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물론 세계 선거사에서도 이런 도전과 시련 끝에 집권한 정치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는 60년 5대 민의원 선거까지 세 번 연속 떨어진 끝에 첫 부인과도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이듬해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민의원에 뽑혔지만 이번에는 당선 3일 만에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국회가 해산되어 그는 의원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암울했지만 그때 평생 반려자이자 동지인 이희호씨를 만난 것은 한 줄기 빛이었다. 그는 62년 이희호와 혼인해 3남이자 막내인 홍걸을 얻었다.
 
독재정권으로부터 숱한 투옥과 고문, 납치와 망명, 연금을 당하는 동안 늘 죽음의 위험이 따라다녔지만 이를 모두 이겨낸 데는 신앙의 힘도 컸다.
 
그는 1957년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영세명은 토머스 모어(<유토피아>의 저자로 영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사상가이며 정치가로 헨리8세의 교회 탄압에 항거해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했으나 400년 후 순교자로 기록되어 명예를 되찾았다). 숱한 세례명 중에서 그가 받은 토머스는 앞으로 펼쳐질 고난의 역정을 예고하는 예언적 세례명이었다. 그러나 신앙은 고난의 역정에서 의지가 되었을뿐더러 그로 하여금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게 했다.
 
그는 63년 민주당 재건에 참여해 원외인사로는 파격적으로 대변인에 발탁되었다가 그해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목포에서 출마해 마침내 원내에 진입했다. 준비된 국회의원으로 그의 의정활동은 눈부셨다.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찾는 의원이었고, 다양한 상임위원회 활동을 펼치며 민주사회를 건설하고 통일로 가는 길을 거침없이 설파했다. 본회의 최장시간 발언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점차 국민들에게 철학과 소신을 갖고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국민 지지받을수록 고난받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 '아시아의 만델라'
 
가장 행복한 시절 이희호씨는 1980년대 미국 망명 시절을 두 사람만의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이때 같은 망명객이었던 필리핀 아키노 상원의원 부부와 만나 식사를 하곤 했다. 위 사진은 잡지 <피플>에 실렸던 것으로 이씨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시절 부엌에서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다.
 이희호씨는 1980년대 미국 망명 시절을 두 사람만의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이때 같은 망명객이었던 필리핀 아키노 상원의원 부부와 만나 식사를 하곤 했다. 위 사진은 잡지 <피플>에 실렸던 것으로 이씨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시절 부엌에서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 국민의 지지를 받을수록 정적으로부터 숱한 투옥과 고문, 연금과 망명 외에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어야 했다. 71년 후보 지원유세 때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73년 유신독재 때는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당해 수장되기 직전 극적으로 생환했으며, 80년 5·17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세력의 군사재판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렇지만 김대중은 불의에 꺾이지도 타협하지도 않고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독재정권은 그의 모든 것을 봉쇄했다. 국내에서 그는 '김대중'이라는 이름 대신에 '재야인사', '동교동', 'DJ'로 불려야 했다. 호칭도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국가반란의 수괴, 용공 분자 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김대중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라 안드레이 사하로프, 레흐 바웬사와 함께 세계 3대 인권수호자로 존경을 받고,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통했다.
 

그가 독재정권의 전면적 봉쇄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 된 것은 3·1구국선언 사건을 계기로 '처음으로 재야와 손잡은 정치인'이라는 점 말고도 그 고난의 시간들을 분노하거나 아파하면서 허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감옥에서 역사, 철학, 경제, 문학서적 등 수백 권의 책을 정독했다. 그러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삶의 고비마다 그를 이끌었던 통찰력과 판단력은 옥중에서의 독서와 묵상을 통해 길러졌는지도 모른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절명의 위기에서도 그는 내일을 준비했다.
 
김대중은 83년 미국 망명시절에 받은 미국 에모리대 명예법학박사를 시작으로 14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마침내 92년에는 러시아 외교아카데미로부터 정식 박사학위(정치학)를 받았다. 그는 또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80년 사형선고를 받고 가족에게 보낸 <옥중서신>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었다. 미국 망명 시절에 하버드대학에서 펴낸 <대중경제론>과 <3단계통일론>, 그리고 정계은퇴후 케임브리지대 객원교수 시절에 쓴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등은 그의 깊은 사색과 탐구의 결과물이다.
 
그는 또한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보편적 민주주의와 역사의 발전을 신봉한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수감중에 종교서적을 중심으로 문학, 철학 등 다양한 책을 읽었는데 신앙과 왕성한 독서욕은 수감생활을 견디는 두 기둥이었다. 그는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산물인 <김대중 옥중서신>에 이어 94년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와 벌인 지상논쟁으로 유명세를 탔다. 미국 학술잡지 <포린 어페어>에 기고한 그의 논문 <문화가 운명인가?>는 미국 대학의 정치학 교재인 <문화와 민주주의>에 실리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옥중 독서와 사색의 결과물이었다.
 
87년의 '과오' 이후 10년만에 건국 이후 최초 평화적 정권교체
 
물론 정치인 김대중에게는 정치적ㆍ정책적 과오와 성격적인 독선과 아집도 적지 않았다.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성취한 직선제 공간에서 김영삼 후보와 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군사정권 5년을 연장시킨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집권을 위해 분당과 창당을 되풀이하고 당을 제왕적으로 운영한 것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는 13대, 14대 대통령선거에 낙선하고 정계은퇴까지 선언했지만 97년 마침내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건국 이후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쾌거였다. 어떤 이는 단군 이래 최초의 민주적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라고 평가하지만, 그것은 분명 정치인 김대중이 신봉한 보편적 민주주의와 민주화 세력의 승리요, 국민의 승리이기도 했다.
 
대통령 김대중은 취임하자 자신을 그토록 핍박했던 독재자와 군사 지도자들을 용서했다. 그는 당선자 시절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석방을 건의함으로써 용서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줬다. 1980년 11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진정으로 관대하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항상 인내하고, 우리가 우리의 적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자. 그래서 사랑하는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하자."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한국은 사상초유의 외환위기로 국가부도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일하면서 관치경제의 적폐에 대수술을 단행했다.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그는 투자를 끌어오기 위해 누구라도 맞았고 누구라도 찾아갔다. 그리고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차입금을 전액 상환해 굴욕적인 IMF체제를 벗어났다. 세계는 한국을 경제우등생, 모범국가로 불렀다.
 
대통령 김대중은 경제위기의 와중에서도 전국에 초고속통신망을 설치하고 범국민적 정보화 교육을 추진하여 한국을 세계 선두의 IT강국으로 이끌었다. 민주화운동보상법, 의문사진상규명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 각종 민주화 입법을 추진하여 민주주의와 인권을 확고히 뿌리 내리게 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또한 그가 추진한 '생산적 복지' 정책은 그의 저술 <대중경제론>의 경제철학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의 복지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2000년 6월에는 마침내 분단 55년만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그의 '햇볕정책'은 남과 북의 증오를 녹이고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 평화의 기운이 움트게 만들었다.
 
남북 화해협력의 첫발을 내딛은 현대 정치사의 거목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지난 2000년 6월 13일 오전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역사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지난 2000년 6월 13일 오전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역사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
ⓒ 평양=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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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은 정규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프리슨(감옥) 대학'에서 독학으로 공부해 92년 러시아의 외교아카데미로부터 정식 박사학위(정치학)를 받고 모스크바대학 평생 명예교수 자격을 딴 입지전적인 인간 승리의 표상이었다. 그는 또한 역사의 진보를 낙관하면서도 늘 역사 앞에 겸손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다.
 
그는 정계 입문 이후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에서 숱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지만 평생 독재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야당의 길을 걸은 비주류 정치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라도 출신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단군 이래 최초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이뤄낸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또한 단군 이래 최대의 국란으로 간주된 환란(IMF 긴급구제금융)을 국민과 함께 최단기간에 극복한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71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4대국 한반도 평화보장론'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이래 군사정권 30년 동안 줄곧 '빨갱이' 혹은 '용공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왔다. 그럼에도 그는 레드 콤플렉스가 지배하는 분단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와 남북 화해협력의 첫발을 내딛음으로써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내고 냉전의 섬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은 '현대 정치사의 거목'이었다.
 
민주진영의 단일화 실패로 민주주의를 5년 지체시킨 정치인으로서의 과오와 대통령 재임중 두 아들을 관리하지 못한 인간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김구와 이승만에서부터 박정희와 김영삼 그리고 작고한 노무현까지 한국 현대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정치인은 많지만,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헌신한 위대한 사상가로서 '성공한 정치인'은 그가 처음이자, 아직은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김대중은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의 '햇볕정책'은 노벨평화상을 타기 위해 급조한 것이 아니다. 오래 숙성된 것이다. 그가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진' 71년 대선 때 이미 '4대국 보장론'을 주창한 이래로 일관되게 다듬어온 것이다. 작가 유시춘씨의 표현대로 "이 평화주의 노선은 국제공인을 획득했고 노벨평화상이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다시 남은 자들의 몫이 된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
 
2000년 노벨평화상을 안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노벨위원회의 객관적 평가에 따르면, 그의 치열한 삶은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와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상징하는 '햇볕정책'이라는 세 가지 열쇠말로 요약된다.
 
실제로 그는 정계에 입문한 이후 50년 동안 이 세 가지 가치를 위해 국민보다 반 보 앞서 설득하면서 국민과 함께 투쟁해왔다. 그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하기 며칠 전까지도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그리고 남북관계의 3대 위기를 걱정하며 국민들에게 각성과 행동하는 양심을 촉구했다.
 
"우리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냐?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 새 되돌아가고 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하다.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되어야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다."
 
그가 일생의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것도 한반도 평화를 통한 동북아평화 구상이었다. 지난 7월 14일 주한유럽상공회의소 초청연설을 위해 준비했다가 하루를 앞두고 폐렴증세로 입원하는 바람에 발표하지 못한 연설의 제목도 '9·19로 돌아가자'였다.
 
"오늘의 북핵문제 해결방안은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길뿐입니다. 이 외에 대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원칙에 합의한 바 있습니다.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의 공동성명, 그것을 준수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도 좋고, 일본도 좋고, 중국도 좋고, 러시아도 좋고, 한국도 좋고, 북한도 좋은 것입니다. 다시 9·19 선언으로 돌아갑시다. 그리하여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안전, 협력의 시대를 열어갑시다."
 
노정객이 평생 국민과 함께 추구했던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라는 큰 숙제는 다시 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주최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서 '6·15로 돌아가자!'(Let's Return to 6.15)의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6월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주최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서 '6·15로 돌아가자!'(Let's Return to 6.15)의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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