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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 97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정도로 발음이 정확했다. 인터뷰 내내 보여주었던 미소.
▲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 97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정도로 발음이 정확했다. 인터뷰 내내 보여주었던 미소.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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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정 할머니를 만나 뵈러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마침 제8호 태풍 모라꼿이 강력한 저기압 구름을 만들고 있어 하늘을 컴컴하고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기 일쑤였다.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열우물길'이란 표지판이 자주 눈에 띄면서 네비게이션은 목적지가 가까이 왔음을 간간히 알려주었다. 열우물길. 우물이 열 개 있던 동네였나? 그래서 십정(十井)동인가.

오래된 도시 인천. 낡은 건물들 뒤편,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주택가로 들어섰다. 이삼 층짜리 고만고만한 건물을 짓고 또 지어서, 앞집과 뒷집, 과일가게와 김밥가게가 서로 이마를 바짝바짝대고 있었다. 우물이 열 개나 있었다니 옛날에도 꽤 큰 주거지였나보다.

1930년대 사회주의 혁명가 이재유가 만든 경성트로이카의 일원이자, 그 경성트로이카의 조직원으로는 유일하게 생존해있는 이효정 할머니가 사는 집은 가옥과 점포들이 어깨를 겯고있는 좁은 골목 끝이었다. 더 이상 골목은 없었다. 그러나 그곳은 좁은 골목 못지않게 다닥다닥 붙은 연립주택촌이었다. 동과 동사이가 2미터는 될까? 지은 지 30년은 족히 넘었을법한 낡은 연립주택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낡은 연립주택에서 만난 97세의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가 살고있는 인천의 한 연립주택
 이효정 할머니가 살고있는 인천의 한 연립주택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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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효정 할머니는 처음 보는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올해나이 아흔 일곱. 97세. 

일제시대엔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이주하, 박진홍, 김태준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이후엔 여운형, 이승만, 박헌영, 김구, 김일성 등이 지도자로 서는 것을 보았으며, 좌우갈등 속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을 몸소 겪었을 그녀. 오랜 군부독재의 철권통치와 치열했던 민주화운동과 정권교체의 과정을 모두 보았을 그녀.

이효정 할머니의 97년의 인생이 곧 우리나라 근현대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약 100년의 세월동안 겪었을 풍파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가 반백년을 지배했던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 운동 경력자가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효정 할머니의 얼굴은 고생한 사람 같지 않게 평화롭고 온화했다. 검버섯이 내려앉았지만 얼굴빛은 맑았고 눈동자는 깊고 또렷했다.

그녀에게 광복은 어떤 의미였을까? 열여섯 동덕여고 시절부터 뛰어든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에서 기쁘게 '되찾은 빛'(光復)이 되었을까?

- 선생님, 1945년 해방됐을 때 선생님의 동료들이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에서 일하고 있었지요? 그때 당시 분위기 좀 말씀해 주세요.
"해방 당시 저는 서울에 있지 않고 시골에 있었어요. 울산에 있었지요."

- 울산이 고향이었나요?
"울산이 시댁이에요. 아주 벽촌에 있었어요. 해방됐다고 소리만 들었는데, 사람(남편)은 없어요. 벌써 가고 없어요. (이효정 할머니의 부군인 박두복 선생은 울산 건준 간부로 일했다.) 너무 감격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한 달 후에 남편이 가족을 데리러 왔어요. 그때 세 식구였는데, 친정어머니까지 네 식구였는데 울산시내로 나왔어요. 집이 없어서 부녀동맹회관에서 살았어요. 여운형 선생 와서 강연할 때 울산대표로 저하고 어떤 처녀하고 같이 갔었어요. 그때 서울서 활동하던 진홍이(박진홍, 건준 간부, 경성트로이카 동지)도 만나고…. 한 달 후에 이관술 선생(조선공산당 지도자)의 따님이 아버지에게 돈을 전달해달라고 해서 만났지요. 그런데 정판사 사건이 나서 체포되어 이후에는 뵐 수가 없었어요."

그에게 해방은 무엇이었나?

 동덕여고 시절의 이효정. 생애 중에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동덕여고 시절의 이효정. 생애 중에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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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과 동료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나요?
"어떤 나라? (웃음) 우리가 좋아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지요."

- 그게 어떤 거였어요?
"다 잘 사는 나라지요."

그러나 광복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극도의 좌우대립과 단정 수립, 분단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보다 더 혹독한 세월을 보내야 했으니,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여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대며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 해방 후 좌우대립의 상황은 어떠했어요?
"아주 어수선했지요. 서북청년단이 나와서 야단하고…."

- 한국전쟁 때 어디 계셨어요?
"전쟁 때는 저는 피난 다니느라고…. 대구서 있는데, 박격포가 터져서 힘들었어요."

- 미군 박격포요?
"네."

- 선생님은 보도연맹 가입하지 않으셨어요?
"안 했어요."

- 강요받지 않았어요?
"강요받지 않았어요. 뭣하러 가입하나요."
  

아는 사람이나 친척 중에 보도연맹으로 죽은 사람들이 있는지 말해달라는 질문에 아주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이효정 할머니 대신 옆에 있던 아드님이 대신 정리해주었는데, 6·25를 전후로 집안이 거의 풍비박산 난 것 같았다.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댁 친척들이 울산 보도연맹 학살사건 때 많이 돌아가셨고, 재주 많던 시동생은 간첩으로 몰려 자살했다고 한다.

- 선생님 집안은 어떻게 됐나요?
"우리 친정?"

친정 쪽 집안은 친가 외가 모두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유명하다. 증조부때 부터 의병장이 여럿 있었고, 유명한 이육사 시인도 친척 아저씨다. 이후 그녀를 포함해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도 여럿 나왔다. (이종희, 이종국, 이병기) 그러나 친일세력이 다시 득세했던 이승만 정권 때 독립운동가 집안이 온전할 리 만무했다. 그의 친정도 시가와 마찬가지로 죽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많았다.

동덕여고 졸업앨범 속의 경성트로이카 동지들 왼쪽부터 이관술(당시 동덕여고 교사, 조선공산당 핵심지도자, 한국전쟁당시 대전형무소학살사건때 사망), 이종희(이효정의 친척, 적색노조운동 참여, 종연방직파업때 이효정과 함께 검거됨. ), 이순금(이효정의 친구, 반제동맹 동덕여고 책임자, 해방후 남로당 중앙위원. 김삼룡의 처)
▲ 동덕여고 졸업앨범 속의 경성트로이카 동지들 왼쪽부터 이관술(당시 동덕여고 교사, 조선공산당 핵심지도자, 한국전쟁당시 대전형무소학살사건때 사망), 이종희(이효정의 친척, 적색노조운동 참여, 종연방직파업때 이효정과 함께 검거됨. ), 이순금(이효정의 친구, 반제동맹 동덕여고 책임자, 해방후 남로당 중앙위원. 김삼룡의 처)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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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더욱더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다. 할머니의 남편인 박두복 선생이 월북을 했기 때문에 그녀는 '빨갱이 가족'으로 손가락질 받는 것과 동시에 연좌제에 묶여 옴짝달싹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감옥에 두 번이나 갇혔다.

수시로 찾아오는 형사들 때문에 학교 교사였던 그녀는 교단에서도 쫓겨나 과일행상 등을 하며 세 아이를 키워야했다. 취직하는 곳마다 형사가 따라붙어 쫓겨나기 일쑤였고, 이사가는 곳마다 감시가 붙었다. 경찰서에 끌려가 매를 맞아 한쪽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불편한 팔로 노동을 하며 그녀는 어린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연좌제에 묶인 세월

 1930년대 동덕여고 졸업앨범 속의 동덕여고와 교무실의 교사들, 왼쪽에서 세번째 교사가 이관술.
 1930년대 동덕여고 졸업앨범 속의 동덕여고와 교무실의 교사들, 왼쪽에서 세번째 교사가 이관술.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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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엄혹한 세월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정권이 물러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든이 다되어서야 고난의 역사 속에 묻어두었던 개인적인 꿈 하나를 이루었다. 그것은 문학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문학회에 가입하여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회상>, 1995년 <여든을 넘기며>를 발간했다.

아흔이 넘고 백세가 가까워오는 연세 덕에 이효정 할머니는 외출을 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보내는 때가 많다. 이부자리 뒤로 빼곡이 쌓여있는 책과 문학잡지가 인상적이었다. 시집 두 권을 낸 시인이기도 한 할머니의 어릴 적 꿈은 문학가였을까?

- 원래 꿈이 뭐였어요?
"내 꿈은 명필이 되는 거였어요.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지가 매일 글씨 한 장 씩을 쓰게 했지요."

이효정 할머니는 동덕여고 시절 서예전에 나가서 장원을 할 정도로 글씨를 잘 썼다.

2006년, 참여정부 때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되면서 그녀도 드디어 독립운동 유공자 포상을 받게 되었다. 동덕여고 시절 반일 동맹휴학과 종연방직 파업 활동 등이 7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드디어 공로를 인정받고 그녀도 명예를 회복한 것이다. 그가 받은 독립운동가포장엔 노무현 대통령의 직인이 찍혀있다.

-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어떠셨어요?
"……"

이효정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으셨다. 그리고 잠시 머리맡에서 무언가 꺼내신다. 신문 하나가 나왔다. 노대통령의 사진이 실려 있는 신문이었다.

- 많이 슬프셨어요?
"이젠 늙어서 슬픈지도 어떤지도 몰라요. 텔레비전에서 영결식은 봤어요."

일제시대에 태어나, 식민지 젊은이의 설움과 희망을 함께 나누던 동지들의 죽음, 해방의 감격도 잠시, 단독정부수립기의 혼란과 한국전쟁 속에서 죽음으로 영영 이별했던 가족, 그리고 민주주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전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까지 그가 봐야했던 수많은 죽음 앞에서 그녀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선물로 주었던 조국은 그녀에게 어떤 나라였을까 궁금해졌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슬프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효정 할머니는 말없이 신문을 꺼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슬프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효정 할머니는 말없이 신문을 꺼냈다.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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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거의 백년을 사셨잖아요. 우리나라는 선생님에게 어떤 나라였어요?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고 믿으세요?

그는 내 질문을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저 웃음 지을 뿐이었다. 이효정 할머니는 여전히 말이 없고, 나는 질문을 바꾸어 할 수 밖에 없었다.

- 선생님, 혹시요, 다시 태어난다면 또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으세요?
"네."

예상외로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왜요? 이렇게 고생만 하셨는데, 우리나라에 또 태어나고 싶으세요?

이효정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그리고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100살이 가까워오는 초고령임에도 이효정 할머니의 모습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겸손함과 기품이 느껴졌다. 옛날 선비의 모습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녀를 인터뷰하는 내내 우리나라에 이런 집안도 있었구나하는 경이로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들었다.

경상북도 안동의 한 양반가문의 구성원들이 대를 이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다가 질곡의 근현대사 속에서 철저하게 매장당하고 이제 자취조차 사라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깝다. 그 천만금보다 더 귀한 정신을 물려받을 후손이 적으니.

삶의 기쁨을 노래한다

역사에서 '만약'을 말해서는 안 된다지만, 만약에, 광복 후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랬다면 오늘날의 이 혼란과 대립이 존재했을까?

여차하면 퇴보하려는 이 민주주의란 놈의 발목을 지금처럼 힘겹게 붙들고 있지도 않겠지. 민주주의는 아주 굳건한 반석위에 서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효정 할머니와 그 집안의 불행이 곧 나의 불행이며 대한민국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인터뷰 말미에 이효정 할머니는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어 보여주었는데, 그 속에는 동덕여고 졸업앨범, 경성트로이카 조직원들의 검거내용이 실린 신문기사, 지인들이 보내준 편지, 사진 등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보물 상자였다.

 이효정 검거 기사. 동아일보 1933년 10월 19일자 종연방직 파업사건으로 동대문서에서 이효정과 동료들을 검거했다는 내용(위), 1935년 11월 8일자. 서대문형사대에서 이효정을 다시 검거했다는 내용(아래).
 이효정 검거 기사. 동아일보 1933년 10월 19일자 종연방직 파업사건으로 동대문서에서 이효정과 동료들을 검거했다는 내용(위), 1935년 11월 8일자. 서대문형사대에서 이효정을 다시 검거했다는 내용(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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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들 사이에서 엽서 몇 장이 떨어졌다. 그 엽서엔 할머니의 시 한 편이 인쇄되어 있었다. 제목은 '삶의 기쁨'. 여든이 넘어 쓴 시일게다. 시련과 역경 많은 삶에서 기쁨을 찾아낸 곳은 물방울 같은 작은 것에서였다.

삶의 기쁨

이효정

작은 물방울 한 알에도
크나큰 고마움을 기울이다 보면
아리도록 맑은 하늘이
살짝 안겨올 때가 있습니다

어제에도 내일에도 매이지 않고
오늘만의 묵정밭을 일구다보면
향긋한 오월 바람이
땀방울을 쓸어 줄 때가 있습니다

어제엔 미처 몰랐던 것을
오늘 용케도 깨닫다 보면
여지껏 살아 남은 대견함이
잔잔히 스며들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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