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는 광복 64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덜 알려져 있거나 또는 재조명이 필요한 독립운동가 네 분을 선정하여 이들의 항일투쟁 활동을 되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대상자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예관 신규식 선생, '헤이그 밀사' 중 1인인 이상설 선생, 그리고 독립운동 당시 최고령 투사였던 강우규 의사와 일제하 여섯 차례 옥고를 치른 의열단원 김시현 의사 등 네 분이다. 집필은 역사소설가 김갑수씨와 친일문제 전문가 정운현씨가 맡았다. [편집자말]
지난해 8월15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광복63주년기념 8·15민족통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광복절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8월15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광복63주년기념 8·15민족통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광복절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어언 64돌 광복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가 8·15해방을 맞이한 것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해방은 전적으로 선열의 공로라고 믿는 것은 일면 낭만적이거나 아니면 상투적인 생각일 수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외재적 요인과 내재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그러므로 2차대전의 세계정세가 8·15해방의 외재적 요인이라면, 선열들의 독립투쟁은 8·15해방의 내재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2차대전의 와중에 미·영 등의 열강이 한국을 전후(戰後)에 독립시키기로 선뜻 결정하게 된 데에는 한국인의 대일독립투쟁이 부단히 전개되어 왔다는 점이 참작된 것이었다.(강만길, <20세기 우리 역사> 참조)

한국은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나라 중 가장 격렬하고도 끈질긴 저항을 보인 나라에 속한다. 공식적인 독립운동가의 숫자만 해도 1만 명이 넘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국가보훈처 지정 2008.3.1 현재 1만134명) 그 중에는 40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안중근 의사 가문, 3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동농 김가진 가문도 있다.

불행히도 8·15해방은 민족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연결되었다. 친일 청산은 번번이 무산된 채 그 후예들의 득세가 여전한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8·15는 '착잡한 경축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다 '건국절' 운운하는 뉴라이트와 정부· 여당 사람들의 몰 역사성은 우리를 한층 더 착잡하게 만든다.

하지만 오늘은 이런 착잡함을 뒤로 하고 조국독립을 위해 정말 매혹적인 삶을 살다가 비장하게 죽음을 맞이한 선열 두 분을 생각해 보려 한다. 이상설과 신규식 두 분은 참으로 순수하고 명민한 지도자였다. 실제적인 독립운동의 성과 면에서도 누구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 있다.

두 분은 조선 명문 가문의 후손들이었다. 따라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치열하게 실천한 분들이기도 하다. 참고로 필자는 민족진영 3대 독립운동가로 백범 김구와 이 두 분을 꼽는다는 점을 밝힌다.

[1910년대 최상 독립운동가 이상설] "아무도 내 제사를 지내지 마시오"

이상설 선생.
 이상설 선생.
ⓒ .

관련사진보기

이상설(1870~1917)은 1894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 수 있는 학자'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명민한 문인이었다. 그는 성균관 교수를 역임하고 궁내부 특진관을 맡고 있을 때,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의 저의와 부당성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으로 하여금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도록 했다.

그는 의정부 참찬으로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저지하기 위해 회의장 문을 밀치고 들어가려다 일본 헌병의 제지를 받게 되자 헌병 책임자의 어깨를 장죽으로 후려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고종에게 사직(社稷)과 함께 할 각오로 을사5적을 처단하고 5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또한 그는 종로 거리로 나가 군중을 상대로 민영환의 순국 자결을 알리는 가두연설을 하기도 하는 등 말 그대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이 포함된 밀사단의 정사(正使)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임무를 마친 그는 총독부가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해 놓고 있는 조국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콜로라도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회의에 연해주 대표로 참가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기보다 다섯 살 어린 이승만을 만난다. 당시 이승만은 국내에서 독립협회 사건으로 복역하다가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 조지워싱턴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이상설은 연해주 대표로서의 소임 수행을 위해 미국을 떠나게 된다. 이것이 같은 연해주 대표였던 이승만과 다른 점이었다. 이것은 이상설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이승만의 성향을 알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이승만은 독립운동보다는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우선했으며, 그가 독립운동 내내 취했던 노선은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어 독립하는 방법 외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이상설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이승희, 김학만, 정순만 등과 함께 흥개호 남쪽 봉밀산에 땅을 샀다. 그들은 100여 독립운동가 가정을 규합하여 이주케 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고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했다.

그는 일제가 조국을 병탄하자 독립결의선언서를 작성,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교포들을 규합했다. 그는 의병장 유인석을 필두로 하여 8624명의 독립운동가가 서명하는 거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선언서를 중국, 미국, 러시아 등의 정부에 우송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이름을 간직하고 한국인이라는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투쟁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을 의지를 갖고 있음을 내외에 천명한다."

독립운동 통합전선 구축에 관심... '13도의군' 결성

헤이그 밀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헤이그 밀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 .

관련사진보기

영어·불어·러시아어를 잘 알았던 이상설은 놀랍게 수학에도 천부적 능력이 있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 수학서인 <산술신서>를 출간해서 청년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독립운동의 통합전선 구축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의병 세력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권업회 결성과 <권업신문> 운영, 광복군 사관학교 설립 운영, 그리고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 등 독립운동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되어야 할 주요한 사업들을 성사시켰다. 그는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의 추대를 받아 대한광복군 정부의 정통령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이후 이상설은 국내 진공을 목표로 중국 대륙 내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헌신하지만 국제정세의 변화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상심이 워낙 컸던 탓인지 그는 병을 얻고 말았다. 그는 동지들의 주선으로 러시아 니콜리스크의 한 허름한 병원에 입원했다.

순수한 독립운동가의 좌절된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그는 회복되지 못한 채 이국 낯선 도시의 소독내 나는 병실에서 48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러시아의 차가운 강에 재로 흩뿌려졌다. 그가 남긴 유언은 참으로 침울하고 뼈아프다.

"광복을 못 이루고 죽은 자가 무슨 낯으로 고혼인들 조국에 가겠소? 나는 실패한 인간이니 내 몸과 유품을 전부 불태우시오. 그 재도 모두 바다에 날리시오. 아무도 내 제사를 지내지 마시오."

[임시정부 창업 1공로자 신규식] 단말마의 비명 "정부, 정부!"

예관 신규식 선생.
 예관 신규식 선생.
ⓒ .

관련사진보기

을사늑약 직후 25세 청년 신규식은 종로에서 이상설의 가두연설을 듣고 왔다. 그는 충정공 민영환의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을 처절히 읽고 나서, 독약 아고니친을 성큼 입에 넣었다. 그는 민충정공을 따라 순국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인 조정완의 슬기로운 구급으로 목숨을 건진다.

다만 약발이 시신경을 건드려 사시(斜視)가 되고 만다. 사시를 우리말로 하면 '흘겨보기'가 된다. 그리고 흘겨보기를 다른 한자어로 바꾸면 '예관(睨觀)'이 된다. 그날로부터 신규식은 자기의 호를 예관으로 정해 썼다. 예관 신규식, 그는 처참히 망해 버린 조국을 정시하기가 싫어 사시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충청도 문의에서 태어난 신규식(1879~1922)은 문무를 겸비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한성외국어학교와 경사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문과 무가 함께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을사늑약 후 자살을 기도했던 그는 끝내 경술국치로 나라가 결딴나자 분연히 총을 들고 서소문으로 나가 구식군대의 봉기에 가담했다. 그의 옆에는 훗날 독립군 장군이 되는 노백린이 있었다.

의병투쟁은 실패로 끝나고 그의 슬픔은 깊어만 갔다. 남편이 또다시 자살할 것이 두려워진 아내 조정완은 친정에 가서 아버지와 담판하여 자금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양 조씨 종손이자 경기도 부호였다.

그 해 꽃잎에 흙먼지가 이는 봄날, 신규식을 태운 준마는 북으로 달린다. 그의 말에는 지금 환산으로 무려 13억원의 현금 자루가 실려 있었다. 그가 말에서 내린 곳은 중국 땅 단동이 바라보이는 신의주였다. 그의 아이디어에는 상해가 박혀 있었다.

기차와 배를 번갈아 타며 상해 진입에 성공한 그는 가져간 돈의 절반을 손문의 혁명대에 과감히 '배팅'했다. 이후 그는 손문은 물론 중국 굴지의 혁명가들인 황홍, 송교인, 진기미, 당계요 등과 우호를 돈독히 했다. 그는 상해에 박달학원을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조선 청년 100명을 무관학교에 보내고 지원한 신규식

신규식은 100명에 가까운 조선 청년을 중국 각지의 무관학교에 보내고 지원했다. 이어서 그는 '동제사'를 결성했다. 동제사란 '물을 함께 건너자'는 뜻의 이름이다. 바로 이 동제사가 없었더라면 몇 해 후 임시정부가 조직되지 못했을 거라고 본다. 요컨대 신규식이 만든 동제사는 오늘날 우리가 훈장처럼 여기는 상해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조직이었다.

신규식의 집은 독립투사들의 기숙사나 다름없었다. 박은식, 신채호 등의 기라성들이 그의 집에 기식하며 적지 않은 경제적 원조를 받았다. 마침내 그는 대망의 임시정부를 결성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일체의 보직을 사양했다. 그 전에 간도의 거목 이상설과 제휴하여 당을 만들었을 때에도 상해 지부장 외의 모든 요직을 다 양보했던 적이 있었다.

신규식은 명저 <한국혼>을 저술했다. 이 원고는 상해 유수 출판사에서 자원 출간되었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예관은 손문과 필적하는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유감스럽게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직무유기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나타난 임시정부의 분열은 그에게 신경쇠약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결국 이승만이 임시정부를 방기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리면서 신규식에게 전권을 맡겼다. 사실 애초부터 신규식이 맡았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법무장관 직을 받아, 거덜 난 임시정부를 수습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울러 그는 박찬익, 민필호 등을 대동하여 손문의 광동정부를 방문했다. 손문은 신규식을 환대하면서 임시정부를 비록 약식이지만 승인해 주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임시정부가 이루어 낸 전무후무한 외교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파리강회회의 진입 실패로 임시정부의 분열과 반목이 다시 도지게 된다. 임시정부가 와해 위기에 빠지자 신규식은 매일 밤 통곡으로 지새웠다. 그는 잘 우는 기질과 약간 염세적인 세계관을 타고난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해 주던 손문의 광동정부가 진형명의 반란으로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자 그의 좌절은 더욱 깊어져 갔다.

신용우-신규식-민필호-김준엽... 4대에 걸친 독립운동

그는 갑자기 식음을 전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음 전폐 후 며칠 후부터 유령 같은 헛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죄가 없소이다. 나에게는 죄가 없소이다."

임시정부의 분열과 반목을 보고 누군가를 탓하고도 싶었겠지만, 그는 생전 그것을 안으로 삼키며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는 말로 대신하지 않았는가 싶다. 그로부터 그가 허락한 것은 물 몇 모금뿐이었다. 이후 그는 보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정부, 정부"라고 단말마의 비명을 토하고는 영구히 잠들어 버렸다. 그 비명은 너무도 모호해서 아무도 그 뜻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었다.

그의 부친 신용우 공은 정2품 의금부도사였는데 나라가 망하자 홀연히 의병장으로 나선 인물이다. 신규식의 동생 건식은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했으며, 신규식의 조카 신필호는 국내에서 세브란스 의사를 하며 독립운동가를 은신시키고 자금 등을 지원했다.

신규식에게는 외동딸 명호가 있었는데 훗날 이 소녀와 결혼한 사람이 민필호이다. 신규식의 사위가 된 민필호는 나중에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을 맡는다. 민필호는 중국군 고급장교 신분을 유지하며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을 도맡기도 했다. 그는 중경으로 쫓겨 간 임시정부의 청사를 마련했으며 해방 후까지 임시정부를 지켰다.

민필호에게도 딸이 생겼다. 딸의 이름은 민영주였는데 그녀는 독립군 지대장 이범석의 비서를 하다가, 학병에서 탈출하여 중경임시정부를 찾아온 청년 김준엽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신용우 - 신규식 부자(父子), 신규식의 사위 민필호 그리고 민필호의 사위 김준엽, 이렇게 4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한 예는 세계 역사에도 없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독립운동가의 등급을 운운하는 것이 경망해 보일 것 같아 조심스럽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의 서훈을 5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지금까지 1등급인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인물은 27명인데 그 중에는 이승만 서재필 임병직 등 독립운동과 거의 관계가 없거나 아주 작은 활동밖에는 하지 않은 인물이 들어 있다. 이상설과 신규식은 2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장 서훈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한편 이상설은 사후 84년인 2001년에야 러시아 수이픈강에 유허비가 세워졌고 신규식의 유해는 사후 74년인 1996년에야 고국으로 이장될 수 있었다.



태그:#이상설, #신규식, #이승만, #독립운동, #광복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