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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역
 순천역
ⓒ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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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①] 지난 5월의 어느 주말, 친구와 둘이서 순천행 기차를 탔다. 선암사와 송광사에 가 보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우리 둘은 유적지 답사를 좋아한다. 직접 유적지에 가서 그 유물을 본 느낌, 가서 겪은 일들, 오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 이야기 등을 찍어온 사진과 함께 수업 시간에 풀어 놓으면 학생들이 좀 더 흥미롭게 들어주기 때문이다.

"참, 역 앞 광장에 여수순천 사건 관련 안내판이 있다. 2005년에 왔을 때 봤는데, 수업자료 하려고 사진도 찍어뒀어."
"그래? 태희야, 어디 있는지 알려줘. 나도 찍어서 수업자료로 쓰게."

순천역에 내린 우리는 그 안내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주 작은 광장을 아무리 헤매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안내판은 보수단체의 문제제기로 인해 2009년 3월 철거되었다고 한다. 정권이 바뀌자 역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여순사건은 한국군 제 6연대, 제 14연대 병사들이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 유격대에 대한 토벌 임무의 출동을 거부하며 일으킨 사건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창비, 2001. 에서 인용) 이 안내판을 읽어보자. 여순사건에 대해 찬양도 비판도 하지 않는다. 단순히 사건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고, 이 광장이 그 사건과 관련된 역사의 무대였다고 소개할 뿐이다. 하지만, 보수단체는 이 안내판의 '봉기', '진출', '경찰을 잇달아 물리치고서'와 같은 표현이 빨갱이를 두둔하는 표현이라고 문제 삼았다.
▲ 순천역 앞 광장에 있었던 여순사건 안내판 여순사건은 한국군 제 6연대, 제 14연대 병사들이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 유격대에 대한 토벌 임무의 출동을 거부하며 일으킨 사건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창비, 2001. 에서 인용) 이 안내판을 읽어보자. 여순사건에 대해 찬양도 비판도 하지 않는다. 단순히 사건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고, 이 광장이 그 사건과 관련된 역사의 무대였다고 소개할 뿐이다. 하지만, 보수단체는 이 안내판의 '봉기', '진출', '경찰을 잇달아 물리치고서'와 같은 표현이 빨갱이를 두둔하는 표현이라고 문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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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②] 지난 1월엔 제주도 올레길을 걸어 보았다. 노처녀라면 이 길을 꼭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혼자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기에도 좋고, 도중에 많은 노처녀들을 만나 삶의 희망(?)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걸으며 바라본 제주도는 진실로 아름다웠다. 푸른 보석같은 바다, 검은 바위에 앉아있는 철새들, 한겨울인데도 밭에서 자라고 있는 마늘과 유채꽃은 내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광경으로 깊게 각인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도에 참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너른 밭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격납고와 송악산 밑둥을 구멍 내 만든 인공동굴들이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말기에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일본은 제주도 사람들을 인간방패로 삼아 미국과 끝까지 싸울 계획을 세우고, 전원 '옥쇄(玉碎)'할 각오였다고 한다.

유적지와 유물이 아니면 결코 사진을 찍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나였지만, 이 아름다운 절경은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제주올레 10코스 사구언덕에서 바라 본 경치 유적지와 유물이 아니면 결코 사진을 찍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나였지만, 이 아름다운 절경은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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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격납고
 비행기 격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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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전쟁이 조금만 더 길어졌다면, 일제시대 말기에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해방은 제주도 사람들에게 나라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다.

제주올레 11코스를 걷다보면 '섯알오름'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4·3 사건 관련지로서 수십 명이 학살당한 곳이다(4·3 사건에 대해서는 제주반란, 제주 4·3 항쟁 등 다양한 용어가 있다. 여기서는 '4·3 사건'으로 칭한다).

4·3 사건으로 제주도에 있던 400여 개의 마을이 170여 개로 줄었다. 사망자 수는 대한민국 통신사 발표에 의하면 2만7719명,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3만 명이다. 그런데, 제주도 지사가 미국 정보기관에 비공식적으로 보고한 내용에는 6만 명이 사망하고, 4만 명이 일본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즉, 제주도 사람의 다섯, 여섯 명 중 한 명꼴로 죽었다는 것이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310쪽).

일본 교과서 왜곡 비난할 자격 있나?

이 시설은 일본이 비행기를 숨기기 위해 만든 격납고이다. 지금도 밭 여기저기에 20 여개가 남아있다. 내 모습을 넣은 사진도 찍었다. 내 키는 160cm이니, 격납고의 전체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제시대에 만든 비행기 격납고 이 시설은 일본이 비행기를 숨기기 위해 만든 격납고이다. 지금도 밭 여기저기에 20 여개가 남아있다. 내 모습을 넣은 사진도 찍었다. 내 키는 160cm이니, 격납고의 전체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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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아래 해안 절벽에 일제시대에 만든 인공동굴이 보인다. 일본은 이곳에 어뢰정을 숨겨놓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고 한다.
 송악산 아래 해안 절벽에 일제시대에 만든 인공동굴이 보인다. 일본은 이곳에 어뢰정을 숨겨놓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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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가 최근 발표한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은 이승만의 친일파 청산 노력에 대해 쓰고, 제주 4·3 사건은 누락했다(집필기준은 집필자들이 꼭 지켜야하는 것으로, 기준에 포함되지 못하면 집필할 수 없다). 4·3 사건은 친일파와 서북 청년단의 만행에 제주도민들이 저항한 사건이다. 일제시대 말기에 하마터면 죽을 뻔한 제주도 사람들은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이 설쳐대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집필 기준이 제시한 대로 이승만이 정말 친일파 청산에 노력했다면, 그래서 친일파를 차근차근 청산하는 모습이 보였다면, 4·3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현장에서 한국근현대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는 4·3 사건을 왜 역사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다. 4·3 사건이 교과서에 실을 필요가 없을 만큼 사소한 사건일까? 적게 잡아도 3만 명, 제대로 잡으면 6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천재지변도 아니고 정치적인 원인 때문에 살해된 사건이 교과서에 실릴 가치가 없을 만큼 작은 사건일까?

일본 정부는 관동대지진의 발생으로 분노한 일본인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들이 이 기회에 약탈을 한다'며 조선인 학살을 부추겼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관동대학살 사건이다. 이 때 일본인 자경단에 의해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는 이 사실이 중요하게 실려있고, 가르치는 나도 배우는 학생들도 일본인들의 만행에 울분을 느낀다.

4·3 사건은, 집계한 숫자가 정확하다고 가정한다면, 이보다 10배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다른 점은 관동대학살 사건은 일본인들이 일으켰고, 4·3 사건은 우리가 스스로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만행만 정확히 알고 우리 스스로의 잘못은 그냥 덮어버리는 것이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올바른 태도일까?

있지도 않았던 이승만의 친일청산 노력을 교과서에 싣고, 뻔히 일어났던 4·3 사건은 교과서에서 삭제한다면 앞으로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는 뭐라고 항변할 것인가? 우리 스스로도 교과서 왜곡을 하면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은 잘못이라고 항의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제주4·3·여순사건 없애도 '특강'으로 대체할 것

4.3 유적지 섯알오름 학살터 안내판
▲ 섯알오름 학살터 안내판 4.3 유적지 섯알오름 학살터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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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교사들에게 "이런 말하면 잡혀갈지도 모르지만…"이라는 말과 "사실은 이렇다"라는 말을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21세기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고등학교 교사인 나도 "이런 말하면 잡혀갈지도 모르지만…"과 "사실은 이게 아니야"라는 말을 수업시간에 하게 생겼다.

나는 파워포인트(PPT) 프로그램으로 만든 수업 보조 자료를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수업을 한다. 내가 만든 이 PPT 자료에는 주로 교과서 내용의 증거자료나 사진을 실었다.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을 위해 한 일이 없다. 그는 방해만 하다가 결국에는 반민특위를 해산하여 친일파 청산을 막았다. 그런데 대체 어디에서 이승만의 친일청산 노력을 보여주는 자료를 찾을 수 있고,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존재한 적이 없는 사실을 있다고 하는 것은 왜곡이다.(만약 이승만의 친일청산 자료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부디 보내주시기 바란다, 특강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약속을 드리겠다)

만약 교과서에 이승만의 친일청산 노력이 들어간다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얘들아, 이거는 순 뻥이란다. 왜냐고? 일어난 적이 없거덩… ^^;;"  대신 1시간은 교과서에 없는 내용을 특강으로 강의할 수밖에 없다. 주제는 제주도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 사건이다.

세계사를 가르칠 때, 난 성 아우구스티누스 특강을 꼭 1시간씩 했었다. 내가 만난 최고로 멋진 남자라는 이유가 가장 컸고, 두 번째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교과서 내용보다 한참 깊게 들어가지만 학생들은 열심히 들어주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야 내가 좋아해서 한 특강이지만, 제주도 4·3 사건과 여수 순천 10·19 사건은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교과서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특강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다.

[에필로그] 억압은 반발을 낳는다

뒤에 보이는 나무울타리를 친 곳이 학살사건이 벌어진 현장이다.
▲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뒤에 보이는 나무울타리를 친 곳이 학살사건이 벌어진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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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사건 발생지
 학살사건 발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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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금은 서로 다른 학교에서 근무하는 옛 동료와 술을 한 잔 했다. 그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화제가 전교조의 시국선언으로 넘어갔다. 동료가 물었다.

"작년 전교조 위원장이 누군지 알아?"
"어?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렇지? 나도 그래. 그런데 올해 전교조 위원장은 아마 전 국민이 다 알걸. 맨날 뉴스에 나오잖아. 시국선언 따위 그냥 무시하면 뉴스에 나와도 그 다음에는 잊어버릴 건데, 징계한다니까 자꾸 뉴스가 되잖아. 그런 걸 보면 저번 각하들은 지능적 전교조 안티였어."
"김대중과 노무현이?"
"그 시절에는 전교조가 할 일이 없으니까 거의 죽었었잖아. 기억 안 나? 그런데 이번 각하는 이렇게 뉴스를 만들어서 죽어가던 전교조를 오히려 살려주시잖아. 분명 각하께서 전교조를 사랑하시는 거야."
"그래. 맞다맞아. ㅋㅋㅋㅋ."

현 정부는 국민 다수의 지지로 선출된 정통성있는 정부다.  국민다수의 지지를 얻어 출범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정부가 과거 독재 정부의 행동을 비호하고 그들의 행동을 정당하다고 대변해 주어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정당성과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4·3 사건은 뺄 필요도 없고, 이승만이 하지도 않은 친일파 청산을 조작해 낼 필요도 없다. 있었던 사실 그대로, 해방 후 많은 부조리와 독재도 겪었지만 차근차근 극복해 나갔다고 가르치면 된다. 현대국가 설립 초창기에 겪은 독재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에 비애를 느끼는 덜떨어진 젊은이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반공교육과 독재 미화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세대가 대학생이 된 후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하고 독재에 저항했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좌편향'이라고 보수단체가 주장하는 교과서로 배운 세대들이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억압과 왜곡은 반발과 저항을 낳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쓰고 알려주는 것이 가장 쉽고도 올바른 방법이다.


태그:#4.3사건,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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