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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상사병(相思病)'이라합니다. 또 '괴롭고 견디기 힘든 혼자만의 짝사랑'을 말할 때 상사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어쩌다 잘못된 만남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다 또 작정 없이 기다리게 될 때 그 고통과 신열이 얼마나 뜨겁고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릅니다.

상사화는 8월쯤 꽃이 피어나 초록잎을 영원히 볼 수 없습니다.
 상사화는 8월쯤 꽃이 피어나 초록잎을 영원히 볼 수 없습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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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相思花), 오랜 세월 침묵과 어둠 속에서 나눈 사랑 법으론 아무리 기다려도 서로를 만날 수 없다는 진리, 안타까운 현실을 어찌 해결해야 좋단 말인가요. 조물주의 사랑법칙을 그 누가 헤아리랴만 죽어서라도 초록 잎은 꽃을, 꽃은 초록을 한 번 만나 뵐 그 날을 위해 오늘도 목을 길게 빼고 따가운 햇살을 올려다봅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자꾸만 맨땅을 헤집어봅니다.

상사화 잎은 일찍 피어났다 여름이 가까워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 때부터 상사화의 끝없는 사랑은 몸살을 앓기 시작합니다.
 상사화 잎은 일찍 피어났다 여름이 가까워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 때부터 상사화의 끝없는 사랑은 몸살을 앓기 시작합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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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작열할수록 더욱 뜨겁게 자신을 달궈내며 펄펄 끓는 땅바닥을 후벼내 고개를 내미는 '상사화'를 만나봅니다. 잎은 영원히 꽃을 만날 수 없고, 꽃은 잎을 만날 수 없는 현실 앞에 온몸에서 신열이 솟아납니다. 폭염이 이글거려도 태양이 불을 피워도 임 찾아 붉은 손을 내미는 처절한 모습은 차라리 몸부림입니다. 목을 길게 뺄 때마다 뜨거운 피가 붉게 물들어가는 그리움의 각혈(咯血), 급기야는 이마에, 얼굴에, 입술에, 가슴에, 온 몸에 불이 활활 타오를 지경입니다.

상사화가 잎을 찾아 뜨거운 사랑을 시작합니다.
 상사화가 잎을 찾아 뜨거운 사랑을 시작합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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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은 미모가 출중하고 지혜가 뛰어나 남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으로 먼발치서라도 한 번 쳐다보면 상사병에 걸리게 된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선덕여왕 4년, 영묘사에 불공을 드리러가는 날, 시종들은 소문 없이 다녀와야 한다고 야단입니다. 더구나 여왕을 흠모하는 지귀(志鬼)라는 청년이 무례한 짓이라도 저지르면 어쩌나 싶어 한 걱정입니다.

상사화의 뜨거운 몸짓
 상사화의 뜨거운 몸짓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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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왕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불공을 드리는데 어찌 몰래 간단 말인가? 그토록 보기를 원한다면 좋은 일이 아니던가? 흠모함이 어찌 죄가 되랴!"
영묘사에 불공하러 감을 만백성에게 알리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선덕여왕은  지귀가 영묘사 근처에 와 자신을 보도록 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깊이 사랑하면 마음만 먹어도 행복함이 아니던가. 잠깐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소식을 들은 지귀는 반갑고 기뻐 영묘사로 달려갔습니다.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운 지귀는 영묘사 뜰 탑 아래 앉아 여왕을 기다리다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여왕을 볼 수 있다는 안도감이 깊은 잠 속으로 유혹했던 것입니다. 불공을 마치고 환궁하려던 여왕이 탑에 기대어 곤히 잠든 지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습니다. 다소곳한 그가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상사화의 몸짓은 그냥 그대로 각혈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상사화의 몸짓은 그냥 그대로 각혈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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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고마운 일이로구나.' 자신의 팔찌를 빼 품에 안겨주고 돌아갔습니다. 몸에 분신인 팔찌를 안기고 떠났다는 것은 애민정신(愛民精神)의 극치라 할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지귀는 팔찌를 보는 순간 숨이 멈출 지경이었습니다. 잠들어 있던 자신이 죽고 싶을 만큼 미웠습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왕에게 받은 은혜를 잠으로 인해 놓쳐버린 아쉬움에 실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웃다가 울다가 땅을 치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지귀의 심장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왕의 팔찌가 펄펄 달아 으르다 급기야는 몸이 불덩이처럼 활활 타올랐습니다. 불귀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 죽기 전에 단 한 번만! 불기에 휩싸여 타들어가는 갈망은 차라리 몸부림이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습니다. 타오르는 불덩이 앞에 펄쩍펄쩍 날뛰다 탑 속으로 몸을 숨기는 순간 탑이 순식간에 하얗게 타 재가 되었습니다.

상사화의 개화순간
 상사화의 개화순간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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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전해들은 선덕여왕은 술사(術士)에게 주사(呪詞)를 지어 화귀(火鬼)가 된 지귀의 심화(心火)를 달래도록 했습니다.

 지귀 마음에 불이 일어나
 몸을 태우는 화귀가 되었네.
 멀리 바다 밖으로 쫓아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리.

술사들이 주사를 지어 부름으로 나라 안이 잠잠해 졌습니다. 모두 선덕여왕 은덕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하찮은 남정네에게 팔찌를 안겨주다니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귀를 물리친 주사의 구절을 글로 써  벽에 붙임으로써 화재를 미리 막는 풍습이 이때부터 생기게 되었습니다.
박인량 수이전 <심화요탑>요약

활짝 만개한 상사화,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임은 만나볼 수 없습니다.
 활짝 만개한 상사화,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임은 만나볼 수 없습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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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대한 무모한 사랑과 허망을 잠재워내는 금팔찌, 잠재우기에서 오는 연민과 한없어 보이는 보시의 정, 욕망의 불을 가슴에 질러놓고 물로 다스려내는 순리와 한풀이 정서,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의 감정을 암시하는 불씨 등... 천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을 뜨겁게 달궈내고 있습니다. 영원히 서로를 만나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름이면 자신을 활활 태워내는 상사화의 사랑법 앞에... 가슴을 태워내기보다는 마음속 깊은 곳을 훈훈하게 데워줄 사랑을 한번 만나보고 싶은 올 여름입니다.

덧붙이는 글 | 윤희경 기자(011-9158-8658)은 지난 4월, 동안의 귀농체험을 바탕으로 꽃과 나무와 새, 농촌풍광이 어울리는 산촌일기 포토에세이 '그리운 것들은 산 밑에 있다.'를 펴낸 바 있습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를 방문하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태그:#상사화, #지귀의 상사병, #박인량의 수이전, #선덕여왕의 필찌, #심화요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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