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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낙안읍성은 민속마을(촌)이기 이전에 사적지다. 사적지라는 뜻을 사전적으로 풀이해 보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시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의미한다. 그럼 낙안읍성에는 무슨 중요한 사건이나 시설의 자취가 남아있을까?

 

낙안성은 '101년 전까지 전라도 지방 남쪽에 있던 낙안군의 치소(治所)로서 사라진 낙안군의 자취를 되살려 놓은 낙안군성(樂安郡城)이라는 역사적 시설물'이다. 이곳의 시대는 조선시대로 맞춰져 있으며, 조선시대 낙안군의 모습과 형태를 갖췄다. 하지만 현재의 낙안성은 전라도 낙안군성이 아닌 순천시 낙안면성이라는 지적이다. 적어도 낙안읍성 역사 자료관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낙안성내에 있는 역사 자료관에 가보면 온통 순천시 낙안면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해 놨다. 정작 낙안군에 대한 역사 기록은 그저 양념 정도에 불과하다. 낙안의 지형이나 낙안의 문화, 낙안의 생활모습 모두 낙안군의 이름을 빌어 낙안면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낙안읍성은 사적지이기에 역사적인 측면에서나, 교육적인 측면에서나 관람객들에게 충실한 사실과 정보를 전달해줘야 하는데 왜 이렇듯 왜곡된 모습으로 버젓이 자리하고 있을까? "여기가 순천시 낙안면이니까요." 한 주민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상한 것을 넘어서 신기(?)할 따름이다. "여기가 순천시 낙안면이니까 그렇게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민이나, 예전에는 벌교 일대 또한 분명 낙안군 땅이었는데 보성군 땅으로 변했다고 역사에서 슬그머니 지우고 순천시 낙안면만 강조한 행정이나 참으로 코미디 같은 재미난 역사관이며 역사 자료관이다.

 

사실, 낙안은 낙안면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낙안군을 얘기한다. 낙안군 수군이 진을 치고 왜구를 맞이했을 현 보성군 벌교읍 선수마을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고, 홍교다리도 낙안군의 보물이었다. 벌교의 홍암 나철도 낙안군의 훌륭한 인물이다. 하지만 낙안군의 치소였던 낙안성의 역사 자료관은 그것들에 대한 기록을 외면하고 있다.

 

역사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임의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며, 잘된 것은 잘된 것대로 잘 못된 것은 잘못된 것대로 기록하고 후대에 알려, 반성하거나 이어받는 것이 역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안성 역사 자료관은 반쪽자리 왜곡된 역사자료를 싣고 있다.

 

뜻있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역사관을 '낙안군 역사 자료관'으로 바꾸고 낙안군에 관한 역사를 가감 없이 기록하고 전시해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성(城)의 모습과 생활 형태는 조선시대 낙안군이면서 자료는 온통 순천시 낙안면에 관한 것이라면 "요강을 가져다 놓고 국그릇이라고 설명하는 모양새"라는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 자료관엔 벌교는 없다?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은 역사적으로 낙안군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역사자료관에는 낙안군에 대한 기록은 없고 낙안면의 기록만 있다는 지적이 있다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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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예고: [09-008] 낙안읍성 가야금병창 공연, 그거 상품성 있네

남도TV에 실렸습니다


태그:#낙안군, #남도TV, #스쿠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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