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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넘기 전까지 나는 여행이라는 것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나는 여행이란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 다 떠나는 휴가철에도 도서관이나 집 근처만 전전했었다. 교회의 수련회나 회사의 워크샵 정도를 빼면 나의 여행지는 겨우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빈약했었다. 게다가 그렇게 갔던 곳도 대개는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여행지였기에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서른이 넘으면서부터 여행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 달라졌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일상에서 허덕이다가 한 번씩 주어지는 휴가철이 되고 혼자라는 사실을 느낄 때 그것이 아름답게 포장된 젊은이의 고독이 아닌 외로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제주에서 인천까지 배를 타고 가면 열 세 시간이 걸린다

제주도는 늘 내게 텔레비전의 드라마의 배경이나 뉴스의 영상으로만 존재하는 환상의 섬이었다. 야자수나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대농장의 이미지는 유럽 어느 작은 마을의 풍광과 겹쳐지면서 제주라는 섬은 더욱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오하마나호라고 제주행 크루즈 선인데 인천에서 배타고 가면 한 열 세 시간 정도 걸려."

오랜만에 만난 술자리에서 들려준 한 친구의 제주도 여행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부우웅~ 기적소리를 따라 배웅하는 갈매기의 울음소리. 멀어져 가는 항구를 바라보며 왠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 선상에서의 불꽃놀이, 격렬하게 이어지는 댄스타임. 술기운을 빌려서 들은 친구의 경험담이 나의 뇌리를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여행은 떠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일까?

그렇다. 여행은 떠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떠나지 못하는 자들에게 여행이란 단어는 국어사전 속에서 박제된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내 주변엔 여행이란 단어를 박제화 시켜 버린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들은 여행을 가고 싶지만 엄마라는 이유로 아내라는 이유로 그리고 무수한 이름으로 인해 떠나지 못한다. 나는 때로는 혼자이기에 그들보다 행운아였다.

또한 여행은 자기를 찾아 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를 버리기 위하여 떠나기도 한다. 무수한 갈등 속에서 켜켜이 묵혀 두었던 내면의 상처와 고통을 매순간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환경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허물처럼 벗어 버린다. 그리하여 내가 지나쳐 온 곳에 두고 온 나의 고통과 상처는 이제 더 이상 상처가 되지 못한다. 나는 이제껏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나를 발견했고 여행지에서 돌아오고 나면 한동안은 일상 속에서 홀가분한 자유를 만끽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제주행 '오하마나호'에 오르다.

인천발 제주행 오하마나호. 인천에서 제주까지 열세시간 정도 걸린다.
▲ 오하마나호! 인천발 제주행 오하마나호. 인천에서 제주까지 열세시간 정도 걸린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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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의 출발 시각은 오후 7시였다. '오하마나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 승선 인원은 대략 천 명 정도였다. 한 시간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마중 나온 여행사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들뜬 가슴으로 배에 올랐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은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단체로 온 사람들은 옷차림으로 봐서 설악산을 등반 하려는 것 같았다. 연인이나 가족끼리 온 사람들, 그리고 나처럼 홀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두루 섞여 있었다.

밤에는 라이브 카페가 되는 크루즈호의 식당

선상에서 제공되는 5000원짜리 식사는 꽤 먹을 만 했다. 레스토랑은 8시가 넘으면 라이브 카페가 되었다. 저녁을 먹고 바닷바람을 쐬고 싶어 선상에 나왔는데 항구는 점 하나로 사라지고 없었다. 매 순간 잔 물결치는 진한 고동색의 바다엔 갈매기만 끼룩 끼룩 울어댔다. 갈매기는 길게 늘어지는 항적을 따라서 비상하고 있었다.

오하마나호가 인천항을 출발한후 선상위에서 갈매기가 배 후미를 따라서 날고 있고 멀리 흐릿한 항구의 모습이 보인다.
▲ 멀어지는 인천항 오하마나호가 인천항을 출발한후 선상위에서 갈매기가 배 후미를 따라서 날고 있고 멀리 흐릿한 항구의 모습이 보인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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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로 돌아오는데 레스토랑에서 귀에 익은 팝송이 흘러나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한 쪽 테이블에 등산복차림을 한 사내 서너 명이 생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작게 마련된 무대에선 무명 가수가 팔과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허스키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옆에는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여자가 키보드를 쳤는데 표정은 화가 난 듯 했다. 나도 뭔가에 홀린 것처럼 한쪽 테이블에 앉았고 생맥주 하나를 시켰다. 그녀의 노래소리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고 곡목은 팝송에서부터 트롯트까지 다양했다.

3000개의 불꽃놀이, 그리고 신나는 댄스타임!

그렇게 한동안 넋을 놓고 음악 감상을 하고 있는데 10시부터 선상에서 불꽃놀이가 열린다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삼삼오오 모인 채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꽃을 피우던 승객들은 선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제법 맵차게 불었지만 오히려 더 좋았다. 불빛으로 인해 선상은 환했고 반면 주변 바다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밤 열시경 오하마나호의 선상위에서 신나는 불꽃쇼가 벌어졌다. 이후 이십여분간 신나는 댄스 타임이 이어졌다.
▲ 선상에서의 불꽃 놀이 밤 열시경 오하마나호의 선상위에서 신나는 불꽃쇼가 벌어졌다. 이후 이십여분간 신나는 댄스 타임이 이어졌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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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수천발의 불꽃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고 어른 키 만한 두 대의 스피커에서 웅장하고 비트 빠른 음악이 흘러나왔다. 제복을 입은 선원의 추임새에 힘입어 선상에 있던 사람들이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이를 무등 태운 사내가 기분이 좋은지 시종 어깨를 들썩 거리며 벙글거렸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 둘이 작은 무대에 오르자 사람들의 환호성은 극에 달했다.

오! 오하마나호

객실은 크게 로얄실, 1등실, 1등 가족실, 2등 가족실, 2등실, 3등실로 나뉘어져 있었다. 내가 있던 3등실은 적게는 20명에서 50명이 잘 수 있었다.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50명까지 생활 할 수 있다.
▲ 호하마나호의 3등실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50명까지 생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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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잘 때는 1인용 담요와 작은 베개 하나를 쓸 수 있었는데 좋은 자리는 먼저 온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다. 3등실 한쪽에선 한라산 등반을 하려는 단체 승객들이 빙 둘러앉은 채 술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로비에는 대형 텔레비전이 있어서 날을 세는 사람들의 동무가 되어 주었고 그 외에도 안내데스크, 커피숍, 샤워실, 회의실, 이벤트실 등이 있었다.

패키지로 떠나는 여행! 글쎄?

오전 8시30분쯤 제주 항구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제주도의 항구는 육지의 다른 항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고 기적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이 오갔고 항구 뒤에는 굴곡진 능선을 만들어내는 작은 산들이 있었다. 배가 항구에 접안을 하자 기다리고 있던 관광 가이드가 우리를 관광버스로 안내했다. 그녀는 비행기로 오는 관광객이 있다면서 공항으로 향했다. 버스는 대략 오 분이나 십분 간격으로 이동을 했다. 애초부터 패키지로 온 여행이라 정해진 이동경로를 따라야 하는 점은 다소 불편했다. 소인국, 감귤 농장, 해저 잠수함, 모터쇼 등 비교적 볼거리는 다양했지만 대부분 따로 비용을 지불해야 해서 나는 그냥 구경만 했다.

패키지로 들렀던 곳중 하나인데 풍광이 멋있어서 찍었다. 가이드가 동굴 이름을 설명을 해줬지만 지금은 잊어 버렸다.
▲ 제주 풍경 패키지로 들렀던 곳중 하나인데 풍광이 멋있어서 찍었다. 가이드가 동굴 이름을 설명을 해줬지만 지금은 잊어 버렸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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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에 들렀을 때는 '동충하초'를 아예 노골적으로 판매를 하는 통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함께 다니던 어르신 중 몇 분은 농장 관리인의 달변 때문이었는지 카드로 몇 십만 원어치를 구입했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서 다니고 싶었지만 초행길이고 그렇다고 길눈도 밝은 편이 아니라서 얼마 안되는 내 돈지갑을 합법적으로 털어내려는 사람들을 피해 조용히 따라다니기로 했다.

저녁 7시, 다음번 제주 여행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패키지로는 오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나는 다시 인천행 '오하마나호'에 몸을 실었다. 일몰과 함께 멀어지는 항구를 바라보며 이번 여행은 왠지 제주에서의 짧은 하루 보다는 '오하마나호'에서의 무박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느적거리며 팝송을 부르던 무명가수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덧붙이는 글 | 2009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제주도, #여름휴가, #크루즈, #오하마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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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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