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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후문에서... 봉원사 가는 길은 너무 멀다 ?
 
번잡한 신촌의 연대와 이대 후문 산책로에 천년고찰 봉원사가 있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 왔지만, 신촌에 가면 봉원사 구경을 꼭해야지 하는 생각을 항상 잊어버리고 만다. 어떤 날은 바로 봉원사 산문 아래서 지인들을 화려한 카페에서 만나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노닥거리면서도, '봉원사' 생각 잊어버린다. 그러니까 내게 봉원사는 신촌에만 가면 잊어버리고, 황지우 시인의 시집을 들추면 그리운  절 이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지인에게 빌려 온 카메라를 돌려주기 위해 나온 약속이 어긋나는 바람에 내 발길은 마치 자석처럼 이끌려 봉원사 산문을 넘는다.
                                                       
신록으로 우거진 여름 땡볕 쏟아지는 천년 고찰 봉원사 빈 마당의 적요는 왜 이리 낯설까. 그러면서도 그 낯선 적요 속에서, 나는 '봉원사' 산문 아래 골목골목 누비며 가택수사 당하는 여느 학생 자취방 앞 가로등 아래 서 있는 듯… 아니 갑작스런 죽음으로 저승에 온 느낌 같았다. 그리고 곧 키가 큰 연잎들이 사근거리는 연못가의 귀신 사자의 귀여운 미소에 온갖 아우성같은 번뇌의 소리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영조, 임금님 친필이 소실되었다니...
 
봉원사는 그 옛날 이름은 반야사. 이 절은 대한불교태고종의 총본산이다. 889년(진성여왕 3년)에 도선국사가 현 연세대(연희궁)터에 창건한 이 절은 고려말 공민왕대에 활약한 보우 스님이 크게 중창하여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여 당시 많은 사람들로 크게 찬탄 받았다고 전한다. 다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지인 스님이 크게 중창한 후, 다시 1748년(영조 24)에 찬즙·증암 두 대사가 현위치로 이전 중건하면서 '봉원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당시 영조의 친필로 쓰인 '봉원사'라는 현판은 6 ·25전쟁 때 소실되고, '명부전'의 글씨는 정도전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늙은 안산(鞍山)에서 본다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끝내는,
 
봉원사여(奉元寺)여
나로 대처(帶妻)하게 하라
 
불 켠 창을 바깥에서 보면
나는 세상에서 쓸쓸하여
 
저녁이 이렇게 몸서리칠 일이야
집이 내 육체였을 줄이야
 
나 이제 사무치는
사기그릇 가장자리, 내 새끼들 숟가락 소리
내 새끼들 주둥아리 밥테기들
 
에헤라 봉원사여, 세상에 나와
집을 나와서 보면
 
세상은 외등(外燈) 하나하나에
목숨을 켜놓고 저렇게 가물가물 깜박거리고 있다
 
취하면 몸이 찾아가던 그
골목골목 가택수사(家宅搜査)중인 가로등 아래
집들이 불탄 소리를 내는구나
 
집은 삐걱거리면서도 심호흡을 한다
나의 집은 그저 식사(食事)와 공창(公娼)이었으나
 
이제 보이지 않는 봉원사여
 
그러나 한번쯤은 제 집을 바깥에서 볼 일이다
 
오래오래 사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니
나 돌아가는 날까지 내 아내를 대처(帶妻)하여 내 뼈로 세운 집을 개축(改築)하여다오
 
<집> - 황지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로 불리기도
 
황지우 시인의 <집>에서 화자되는 '봉원사'는 '모든 길은 집에서 나오므로/ 모든 길은 집에서 떠나므로'의 집 밖의 공간이다. 황 시인의 시를 빌리면, 사람은 가끔 집(육체) 밖에서 스스로를 보고 깨달아야 하는 집으로 가는 도정의 나그네임을 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 시대에서 현재까지 많은 이 집(봉원사)를 거쳐 간 인물 중,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이색에게 명하여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로 국사의 문도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태조 5년(1396)에는 원각사에서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전각이 소진됨에, 17대 효중 2년(1651) 지인대사가 중창하였으나 동, 서 요사채가 다시 소실되어 극령, 휴엄 두 스님에 의해 중건되었고, 다시 제21대 영조 24년(1748) 찬즙, 증암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事)라 현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조 12년(1788)에는 전국의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가 설치되었으며, 제25대 철종 6년(1856) 은봉, 퇴암화상 등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동인 스님과 함께 개화파 일당의 갑신 정변의 요람처
 
나는 시원한 풀벌레 울음 소리가 들려오는 천년나무 그늘 아래서 문득 니체의 말을 떠올린다. '불교는 이미 죄에 대한 싸움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현실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면서 고뇌에 대한 싸움을 말한다.' 이처럼 황지우 시인 역시 <집>을 통하여 철저한 현실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며 고뇌에 대한 투쟁의 중심체로서의 '봉원사'임을 읽는다. 
 
조선 말기 젊은 피가 끓는 김옥균, 박영호,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 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던 봉원사는,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병화(兵火)로 광복기념관이 소진되었고, 이때 영조의 친필 현판 등 사보와 이동인 스님 및 개화파 인사들의 유물이 함께 소실되었다고 한다.
 

 
모든 길은 집으로...
 
1966년 주지 영월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대원군의 별처였던 아소정을 헐어 옮긴 것. 1991년 32세 주지 김성월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삼천불전 건립도중 대웅전이 소진됨에 즉시 중건을 시작하여 1994년 주지 혜경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대웅전을 복원 낙성하였고 같은 해 1100평 규모의 삼천불전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현재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총본산으로서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신도는 10만을 헤아리며,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단청) 이만봉 스님과 제50호(범패) 영산재보존회에서 단청과 범패분야의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모든 길(道)은 끝내는 집으로 가는 길, 그 길(道)의 열반에 든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름은 열 개가 넘고, 보살의 이름 또한 헬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중생은 고작 한 개의 이름으로 찰나와 같은 생을 살다 간다.
 
불공견색관음은 고해에 잠기는 중생을 그물이나 실로 건진다는 뜻… 머리 위에 마두가 있는 분노상은 마두관음보살… 허공과 같이 무진장 지혜와 덕공을 가지고 있는 허공장보살을 향해 합장해 본다. 그때 다정불심처럼 승복 입은 보살 한 분 내게 다가와 말을 전한다. 곧 봉안사 연꽃 축제라고 그때 오시면 더 풍성한 봉안사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내게 마치 감로수처럼 시원한 미소를 짓는다.
 

봉원사 스님들

이동인 스님 : 구한말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이동인은 봉원사에 주석하면서 김옥균 등과 함께 교류하며 일본과 서양문물에 관한 지식을 쌓아갔으며 승려의 신분으로 수차례 일본을 내왕하며 당시의 선진문물을 소개하여 김옥균등의 개화파가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하는 직접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신사유람단의 일본행에도 결정적 막후역할을 수행하는 등 개화운동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만봉 스님 : 스님은 단청장으로서 70년대 초부터 일찍이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어 지금까지 독보적인 불화의 세계를 구축하고 후학양성에 여념이 없으시다. 만봉스님은 영조때의 유명한 도화서의 화원이었던 석상겸의 화맥을 이은 분으로서 1910년생인 스님은 6살에 동진출가하여 불화와 단청을 그리고 대가를 일컫는 금어(金魚)가 되기까지 20여년에 걸처 시왕초, 천왕초, 여래초라는 3단계의 습작훈련을 거쳤다고 한다.

 

송암 스님 : 1915년생인 스님은 봉원사에서 태어나 한 번도 주소를 옮긴 적이 없는 분으로 19세부터 범패를 배우기 시작하여 1940년에 어산 범패 일체를 섭수하셨다. 스님은 이월하스님과 남벽해스님 모두에게로 부터 사사를 받으시고 후진양성에 큰 힘을 기울여 범패의 계승과 전수에 일생을 다 바치시고 2000년 세수 86세, 법랍67세로 입적하셨다.

 

봉원사, 자료 빌려옴 

덧붙이는 글 | 봉원사에 가려면, 지하철2호선 신촌역 4번출구 7024번 원버스(구 봉원교통)로 15분(종점)- 지하철3호선 독립문역 4번출구 7024번 원버스(구 봉원교통)로 5분 소요된다.  봉원마을버스 배차시간 은 10분 간격,  일반버스 : 272, 470, 700, 751, 6714, 7012, 7017, 7020번이 있다. 
 


태그:#봉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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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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