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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을 돌아 나오는 길 성전면 월하리 월출산 동남쪽 자락, 동편이라 그런지 산의 곡선은 월출산의 위용에 걸맞지 않게 완만하다. 강진 방향의 너른 지평을 널리 끌어안고 신라 617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무위사가 그 옛날 갈옥사(葛屋寺) 시절의 수많은 승려가 주석했던 왕성함의 영광을 뒤로한 채 한적한 자태의 극락전이 동그랗게 눈을 치뜨고 선객(禪客)을 맞는다.

 

관음사(觀音寺, 신라 617년), 갈옥사(葛屋寺, 875년 헌강왕 1년), 모옥사(茅玉寺) 등으로 몇 차례 사명(寺名)을 바뀐 뒤 명종 10년(1555년)에서야 현재의 무위사(無爲寺)라는 사명으로 되었다.

 

국보 13호인 극락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그 형태를 맞추어간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 조선 초기의 최고의 건축물이다.

극락전 앞 경내는 소슬한 바람에도 가볍게 털어 흙 안개가 일어나는 황토 빛이다. 어디하나 뾰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무디니, 모든 것은 완만하여 둥근 세상의 이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몇 걸음 옮기면 우리가 알고 있는 비천상의 벽화전시관이 있다. 벽화전시관에는 최근 고시되어 국보승격을 앞두고 있는 보물 1313호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후불벽화가 전시되어 있다.

 

무위사의 벽화는 그 아름다운 채색이 조명의 조도에 따라서 살아있는 듯 꿈틀댄다. 허공을 훨훨 나는 비천상의 손끝에서 후구를 막고 불어대는 피리소리가 들리는 듯 착각이 일 정도다.

 

무위사의 벽화에는 전설이 숨어있다. 법당이 완공되어 스님들이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남루한 차림의 노승이 찾아와 법당의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자청하였다. 차림보다 기품이 있어 보였던 노승은 주지에게 49일 동안 법당 안으로 사람을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는 법당 안으로 들었고, 이후 49일이 다 되어도 인기척조차 없어 주지스님이 창문의 구멍을 통해 법당을 들여다보는 순간 노승은 보이지 않고 파랑새가 붓을 물고 관음보살의 눈을 그리려는 순간 인기척에 놀라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무위사 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는 벽화는 1476년 제작된 것이다. 흙벽에 채색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아미타불이 죽은 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도상화(圖像化)한 것이 대부분이다. 원래는 극락전 서측 벽면에 있었던 것을 1976년 극락전을 수리할 때 벽채로 떼어내어 보존각에 보존하였다. 내영도는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사자의례(死者儀禮)와 깊이 관련된 것이며, 한국에 전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감로탱화(甘露幀畵)라는 불화에서 내영의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감로탱화의 구도는 극락과 지옥을 대비시켜, 상단에는 극락을, 하단에는 지옥을 묘사했다. 그리고 내영의 모습도 아미타불 단독으로 맞이하는 것,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이 25보살과 함께 와서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과 성중(聖衆)이 맞이해 가는 것 등이 있다. 이 내영도는 아미타불이 8보살 및 8비구(比丘)와 함께 와서 맞이하는 극락내영도이다.본존인 아미타불은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듯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뻗고 왼손은 들어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둥근 육계(肉)에 중앙의 계주(珠)만 표현한 머리모양, 사각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길게 올라간 긴 눈, 구불구불한 옷자락의 표현은 고려 말 불화(佛畵)의 특징이며, 군의(裙衣)를 묶은 매듭끈을 법의 자락 앞으로 대칭시켜 늘어뜨린 것은 조선 초의 특징이다. 관음보살상은 보관(寶冠)에 화불(化佛)과 보병(寶甁)을 강조하였으며, 대세지보살은 정병(淨甁)과 경함(經函)을 들었고, 무릎 부근을 구슬로 장식하였다. 그 밖의 보살들도 제각기 특징있는 물건을 들고 있으며, 지장보살의 경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두건을 쓰고 있는 점 등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벽화의 지장보살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점은 이들 일련의 작품이 동일 작가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보살들 위로 상체만 묘사된 8비구들은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여 전체 화면이 활기를 띤다. 화면 전체적으로 풍기는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은 고려 불화의 양식을 보여주며, 나한(羅漢)의 등장과 세부묘사에서는 조선 초기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무위사 홈페이지 자료 인용)

 

 

일제패망시 일본인들이 이 무위사 벽화를 탐을 내 각판으로 떠서 일본으로 가져가려 하다가 '쫓김'에 밀려 가져가지 못하고 각판 그 자체로 일부를 쌓아두었다고도 한다. 1956년 극락전 해체보수 공사 시 분리된 벽화 벽체 27점을 시작으로 해서 무위사 벽화는 몇 차례 보존처리 과정을 통해 현재에 이른다. ( 한국애석문화연구소 자료 인용)

 

 

문화재청은 현재 보물 1313호 아미타후불벽화를 국보로 승격 지정 예고하고, 국보로 승격되면 지정 명칭도 아미타여래삼존벽화로 바뀔 것이라 했다. 아미타후불벽화는 고려 후기 불화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조선 초기 양식을 반영함으로써 불화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직도 그 질감이나 색감은 그 원료가 무엇인지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을 정도로 신비롭다. 모든 이의 경탄을 자아내는 벽화 그 화려함은 노변방초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꽃과 같은 무위사의 질그릇과 같은 소박함과 대비되는 품격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기사는 CPN문화재방송국 뉴스와 동시제공 됩니다.>


태그:#무위사, #극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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