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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는 29일 오후 2시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시국선언 교사들에 대한 징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교조는 29일 오후 2시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시국선언 교사들에 대한 징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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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이 한창이던 87년 여름, 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어느 날 시내에 갔다가 시위대열을 만났는데, 시위 구호가 '호헌철폐, 독재타도'였다. '독재타도'는 이해가 가는데, '호헌철폐'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수업이 시작될 때 선생님께 '호헌철폐'가 뭔지 물었다. 선생님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단호하게 한 마디 했다.

"그런 건 시험에 안 나온다. 너희는 쓸데 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책이나 펴라."

난 그 때, '호헌철폐'가 무슨 뜻인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선생님이 비겁하다는 것 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어느 선생님께도 더 이상 '호헌철폐'가 뭔지 묻질 않았고, 뒤이어 나온 '6·29 선언' 과 '7·8·9 노동자 대투쟁' 역시 나와 상관 없는 일로 여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역사의 현장에서 살면서도 그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것도 학생이.

전교조 압수수색, 불순한 의도가 보인다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의 기치를 내건 전교조가 설립된 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9년 5월이었다. 전교조 선생님이라면 '호헌철폐'가 뭔지, '6월 항쟁'이 왜 발생했는지 이야기해 줬을 텐데, 난 불행히도 더 이상 학생이 아니었다. 전교조 설립 이후 10년간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학생들이 선생님을 되돌려 달라며 종이 비행기를 날릴 때, 난 3자의 입장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부모도 아니었으니까.

3일 새벽 5시 경찰 50여명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본부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관계자들이 시국선언 관련 자료를 가져나오고 있다.
 3일 새벽 5시 경찰 50여명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본부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관계자들이 시국선언 관련 자료를 가져나오고 있다.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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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이가 태어나던 1999년, 전교조는 합법화되었고, 해직교사들도 다시 교단으로 돌아왔다. 2002년에 큰 아이가, 2005년에는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난 내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은 전교조 소속이기를 바랐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고, 시험 범위에 속하지 않는 이야기마저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넉넉히 해 줄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랐다. 적어도 '호헌철폐'가 뭔지도 설명해주지 못하는 비겁한 선생님만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내 아이들 역시 전교조 선생님을 만나지는 못했다. 2008년 말 기준으로 전체 교원 약 40만명 가운데 20%가 채 되지 않는 7만여 명이 전교조에 가입되어 있고 그중에서도 국공립 학교에 많다 보니 사립학교에 다녔던 내 아이들이 전교조 선생님을 만날 확률은 너무 낮았다. 2006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나와 아이들은 그렇게 끝끝내 전교조 선생님과 아무 인연을 맺지 못했다.

전교조 설립 20년 만에 처음으로 전교조 본부 사무실이 검찰의 압수수색을 당했다고 한다. 지난 6월 18일 시국선언을 빌미로 교과부가 전교조 소속 교사 88명을 중징계하고, 41명을 검찰에 고발한 것에 대한 수사의 일환이라고 한다.

전교조의 시국선언문을 찾아 읽어봤다. 학생들이 궁금해 할 만한 '촛불과 PD수첩 건, 용산참사' 등에 대해 입장을 밝혔고, 교육현장에서 느끼는 위기감을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다. 이명박 정권의 독선적 정국운영을 지적하며 국정 쇄신을 요구했다. 그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들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정부는 선생님들의 고언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징계와 고발을 통해 전교조를 압박하고, 검찰은 전교조가 불법일 때도 하지 않았던 압수수색을 서둘러 실시했다. 선생님들의 시국선언이 법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건 교과부 내부 문건에서도 이미 인정한 바이고, 또 다른 교원단체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던 정부가 전교조의 시국선언에 만큼은 이처럼 강하게 압박을 하는 건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고발한다고 전교조 선생님들 입을 막을 수 없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직접 경험하는 사회의 모습이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너무도 큰 차이가 있음에 때론 절망하고 때론 분노했었다.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학교에서 배우는 게 사회상을 제대로 담지 못하면 그날 저녁에 바로 깨닫고 분노하는 그런 시대다. 하지만 정부는 지금도 선생님들에게 교과서에 나오는 것만, 시험 범위에 드는 것만 가르치기를 강요하고 있는 형국이다. 공포가 지배정서였던 80년대, 학교에서 '호헌철폐'의 의미조차 설명하지 못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 가길 바라는 것이다.

징계하고, 고발한다고 해서 전교조 선생님들의 입을 막을 수 없다. 정부는 1차 시국선언에 참여한 1만6171명의 선생님 모두를 교단에서 쫓아 내고 그 자리에 정부의 말을 잘 듣는 고분고분한 선생님으로 채울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 벌이고 있는 전교조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지해야 한다. 선생님들의 입을 막을 게 아니라, 정부의 귀를 열어야 한다.

난 내 아이들이 대한민국 학교로 다시 돌아갈 때 반드시 전교조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선생님, 사람들이 왜 촛불을 드는 거예요?"라고 물었을 때, "그건 말이지…"하면서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아이들이 역사의 현장을 사는 동안 그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게 교육이다.


태그:#전교조, #시국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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