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신문은 왜 필요한가.

우선 다양한 정보와 소식을 제공, 구체적인 판단이나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이 있다. 그리고 독자들이 사건의 전후 사정을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일도 한다. 이는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는 기능이다. 또 의식주 생활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여러 가지 일들에 관해 필요한 정보와 자료들을 제공하는 일도 한다. 물론 가십도 흥미를 위해 필요하다.

 책표지
 책표지
ⓒ 개마고원

관련사진보기

그럼, 우리는 신문을 왜 읽는가.

"신문을 읽지 않으면서부터 실로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다. 사람들은 남이 하는 일들에만 관심을 갖고 자신의 중요한 의무는 아주 쉽게 잊는다"라고 말한 이도 있는데, 우리는 굳이 왜 신문을 읽으려고 하는가. 요즈음은 온라인으로 보는 인터넷신문들도 많아서 뉴스를 주기적으로 보는 이들은 보통 하루 예닐곱 개의 신문매체를 접하는 것이 사실이다.

괴테가 한 말에 비해 데이빗 소로우가 한 말은 더 나아간다.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에 눈을 돌려 그것을 통해서 신을 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 읽지 않으면 더 행복할 것에 왜 오늘도 눈을 들이대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매일 신문을 읽는다. 저자는 '제대로' 읽기를 주문하면서 그렇지 않은 독자가 되느니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낫다고까지 말한다. '성숙한 독자'가 되기 위해서 신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꿰뚫어보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까지 잘 알고 지면을 '입체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러기 위해 '신문 읽기'는 행간읽기나 기사읽기를 넘어선 '편집 보기'를 해야 한다.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입체적으로 편집을 읽어낼 때만이 그 신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가 정말 올바른 것인지 곧이곧대로 내가 취해도 될 만한 것인지의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

'흔히 언론계에서 편집부를 '편집국의 심장'에 비유한다. 사람 몸 속의 모든 피가 심장에 모인 다음 다시 모든 기관에 보내지듯이, 모든 기사가 편집부로 모아져 편집된 다음 인쇄 과정에 들어가 모든 독자에게 보내지는 까닭이다.……중략……따라서 각 지면별 편집기자가 자기 지면에 무한책임을 지게 된다. 표제의 착오나 잘못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쇄되어 나오기까지 일어나는 모든 과정이 편집기자의 책임이다.……권한은 무엇일까. 기사의 취사선택권, 원고 첨삭권, 기사 배정권, 제목결정권, 조판권, 강판권, 개판권, 호외발행권이 그것이다.'

편집에 대한 중요성을 모른다면 신문을 모르는 것이나 다름 아니다. 편집부에서는 뉴스가치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잘 판단해야 하고, 이를 놓치는 것은 명백한 실패가 된다. 표제와 사진, 기사의 배치와 크기 결정도 다 가치와 비중의 판단을 통해서 지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를 각 신문별로 비교해 보는 것이 '신문 공부'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책에선 여러 사례를 들어 비교해 놓았으니 편안하게 보면서 읽기만 하면 된다. 동시에 오늘 신문을 비교해보는 것이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 되겠다.

굳이 성향을 따지자면 조중동과 한경오로 나눈다. 이를 우(右)와 좌(左)로 나누기도 하는데 여기에 여러 인터넷 매체들을 포함하면 그래프로 위치 잡는 것도 볼만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놓았을 때 위치가 그 신문의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저 성향이고 이도 다양성으로 인정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신문의 편집이 지향하는 이념과 사상이 대중 다수에 있지 않고 일부 기득권세력과 편협한 이념논쟁으로 사회적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드는 일부와 최상위의 부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이 책은 - 물론 읽지 않겠지만- 조·중·동을 애독하거나 요즘 득세하고 있는 뉴라이트 계열(?)의 독자들은 읽지 않는 것이 좋겠다. 5년이 넘은 개정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역시도 그들 입장에서 애독하는 신문의 과거가 심하게 편중된 논리의 증명들과 편집실패의 사례들이 가득 하니 악의적인 모욕이 아니냐며 치를 떨 수 있음이 예상된다.

다소 기사의 배치와 표제어가 실제 사건을 작위적으로 해석함을 명백히 드러내는 사례는 우리가 일간신문을 대충 훑어보는 '습관'을 버려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1면에서 쓰인 기사 중 주요기사들은 다른 면으로 이어지는데 이때에도 1면의 기사내용을 배반하는 후면기사가 있을 수 있다는 증거가 보인다. 섬뜩하기까지 하다. 모르면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언론이 의도하는 대도 독자는 따라줄 뿐이다.

'입체적 읽기'란 어떤 기사가 한 면에 실렸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문전체와 심지어 전에 발행된 신문의 내용까지 유추하여 찾을 수 있는 슬기를 갖추어야 한다. 이에 다른 신문의 관련기사들을 비교하면 좀 더 정보의 핵심으로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아마, 높으신 분들이 십 여권의 신문들을 아침마다 스크랩하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 어떻게 보는 것이 입체적인 건가. 신문의 성향을 알고, 신문 소유주가 어떤 기업인지, 종교단체인지, 혹은 개인인지 등을 아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사주의 성향과 신문의 편집은 거의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신문전체 면과 기사의 표제(제목)와 기사의 상관성, 1면과 이어지는 후면 기사의 연속성 등을 다 따질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을 정부권력이 완전히 통제했던 보도지침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는 요즈음이다. KBS, YTN 이후 MBC까지 권력의 손이 뻗고 있다. 자전거와 상품권, 심지어 현금을 동원해서 구독수를 늘려온 신문들. 돈벌이를 위해 소외받는 국민과 평화통일을 외면하고 가난과 질병은 그들을 포장하는 화장품 정도로나 취급하는 언론권력의 태도는 독자가 아니고서는 심판할 방법이 없다.

언소주가 벌이고 있는 광고주불매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 운동이 지금 필요하며 우리가 동참해야 하는지 스스로가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다면 한낱 한때의 소동으로밖에 남지 않는다. 왜 우리가 조중동을 비판하고, 그들이 뭘 그리 '잘못'을 해 왔는지를 알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혹자는 편협한 사고에서 비롯된 '운동'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스스로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어두운 곳의 진실을 알려는 '수고'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에 대해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언론이 가져야 할 사명임을 안다면, 본인의 신문읽기도 좀 더 날카로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문은 결코 독자를 능가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물이 원천보다 높이 올라갈 수 없다는 비유도 잇따른다. 한 나라 한 시대의 언론 수준이 그 나라 그 시대의 독자 수준이자 국민 수준을 반영한 것이라는 이 말은 신문의 왜곡 편집을 독자들의 책임으로 돌리자는 데 뜻이 있지 않다. 오히려 독자인 국민들이 적극 나서서 신문을 올바르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독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신문 편집자가 되어 신문을 읽을 때 비로소 신문편집이 바로 설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신문읽기의 혁명/개마고원/손석춘/8,500원



신문 읽기의 혁명 - 편집을 읽어야 기사가 보인다, 제3판

손석춘 지음, 개마고원(2017)

이 책의 다른 기사

편집을 읽어야 기사가 보인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