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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광화문광장에 제작중인 세종대왕상, 세종대왕이 과연 저토록 높고 불편한 자리에서 후손을 만나고 싶어 했을지는 의문이다. 서울시민 역시, 왜 저런 동상이 서울 한 복판에 세워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는데 어떻게 해서 저 동상은 저 자리에 세워지게 되는 것일까.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에 제작중인 세종대왕상, 세종대왕이 과연 저토록 높고 불편한 자리에서 후손을 만나고 싶어 했을지는 의문이다. 서울시민 역시, 왜 저런 동상이 서울 한 복판에 세워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는데 어떻게 해서 저 동상은 저 자리에 세워지게 되는 것일까.
ⓒ 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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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흔히,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거나 무엇인가 이 세상의 비정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았을 때 자조적으로 쓰게 되는 말이다. 또, 세상이라는 곳에 조금 더 오래 있었거나 깊숙이 겪어 봤다고 여겨지는 이가 그보다 덜 겪어 본 이에게 충고조로 쓰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이란 원래 그런 거야', 참으로 '쿨'한 인식의 태도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식하고 말하는 이의 세상은, 말하는 이의 여집합이 아니다. 세상은 어느 누구에게도 여집합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부분집합이며 어떻게든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받는다. 잘 느껴지지는 않을지언정, 이 세상의 비정함은 자기 자신의 비정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세상의 따뜻함은 자기 자신의 따뜻함에서 비롯된 것인 것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스스로가 원래 그런 것이다.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자조적 인식을 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 스스로가 원래 그런 사람에서 벗어나면 된다. 우리는 원래 이기적이고 주체 중심적이며 시쳇말로 남 탓하기 좋아한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인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변하려는 의지는 생략한 채, 세상의 비정함을 남 탓으로만 돌리려는 자기반성 없는 정신의 정체를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한 때 우리사회에, 이제 마음껏 비판적이어야 할 대학생에서부터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까지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정치적 무관심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라는 허무주의적 논리는 쉽게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무관심을 하나의 정치적 태도로 내세웠던 이들이 실제로 어떤 고도로 합리화 된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정치적 무관심은 그런대로 하나의 시대적 유행이었다. 정치적 무관심은 쉽고 간편하며, 복잡하지 않고 당당했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적 무관심을 말하는 자들은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 정치 자체가 남의 일이 아니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공디자인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남 탓을 즐긴다. 디자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정치적 호흡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비판은 쉽다. 그러나 그 비판과 반성의 방향이 이제 사업의 진행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돌려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공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주체이면서 수혜자인 시민 자신은 늘 이렇게 이야기 한다. "공공디자인 사업이 마음에 안 든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닌데", 심지어는 "내가 해도 저것 보단 낫겠네" 등등. 이 모든 반응은 시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반론권의 표현이지만 시민으로서 가지는 주인의식으로의 반응은 결여되어 있다. 이는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에서 느껴지는 방관과 방기의 세계관이 바닥에 깔려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진지하게 따져 물을 때" 라든지, "구체적인 참여 방안과 문제 해결 방안의 모색"등을 기대하는 것은 정녕 어려운 일일까.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공공디자인의 수준 역시 국민의 수준에서 디자인 될 것이다. 훌륭하고 멋진 건물이 하나 비약적으로 지어 질 수는 있겠지만 전체적인 수준에서 국민의 역량과 수준을 뛰어넘는 공공디자인이 나오기란 힘든 일이다. 공공디자인의 어떤 단계를 뛰어 넘는 성숙을 위해서는 국민 스스로 내 탓, 내 반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참여 의지가 형성될 때 가능한 일이다.

그 과정은 그러나 매우 더디고 지난한 과정이다. 일단 티끌만한 실수일지언정 스스로의 잘못을 먼저 시인하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다. 게다가 뭘 잘못했는지 잘 잡히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공공디자인의 영역에서 주민이 잘못한 일? 그리고 그 반성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참여의지? 이쯤 되면 공공디자인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어떤 것 쯤으로 여겨질 정도지만, 사실이 그렇다. 공공디자인은 도시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철학의 문제이고 사상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잘못을 먼저 반성해보자. 도시와 도시를 이루는 문화와 철학을 경제나 눈에 보이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긴 잘못, 공공디자인은 지역민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화두를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만 맡겨버린 잘못.이것이 왜 우리만의 잘못인가. 아프다. 그러나 아픔을 참고 미래를 생각한다.

그러면 정치인들과 자치단체들도 자기를 스스로 반성할지 모르는 일이다. 국민 개개인의 반성과 정치인의 반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건강한 민주주의를 기대해 보는 것처럼, 같은 의미로 지역민의 참여와 정치인과 공무원의 진정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공공디자인도 기대해 본다. 우리가 나서지 않는데 공무원인들 무슨 수로 지역민과 함께 만들어 가는 공공디자인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지역주민들은 더욱 더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 하고, 정치인과 공무원은 지금보다 더 지역민이 참여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면서 사업을 진행하여야 한다. 이것이 앞으로 공공디자인 사업이 가야 할 더디고 분명한 길이다. 수변개발 사업이든, 재개발 사업이든, 공공디자인 사업이든, 그것의 밀어붙이기식 진행이란 그 자체로 저개발 국가 시절에서나 가능했던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 낳은 비극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http://www.design2.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서울시청,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공공디자인, #유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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