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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현은 평양 보통강물이 휘돌아 나가는 양각도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름 하늘에 뚜렷이 빛을 내고 있는 직녀성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이두오를 생각하고 있다가 그의 더벅머리를 떠올리고는 풋풋한 미소를 지어 보았다.

그녀는 손바닥을 펴 아랫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지난달까지 도툼한 정도였던 그녀의 아랫배는 이제 불룩 솟아나 완연한 잉부의 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녀의 제대 신청은 수월하게 받아들여졌다. 물론 뱃속에 있는 이두오의 아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아름다운 사람들은 모두 남쪽 하늘 밑에 있었다. 그녀는 이두오와 김성식과 박미애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의 근황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들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행히 그녀가 떠나던 그날 밤 폭격이 없어 산에 올라간 이두오는 무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침낭만 제대로 챙겼더라면 얼어 죽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 점령한 미군과 국군의 치하에서 제대로 삶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김성식 선생은 부산 피난 생활을 마치고 별 탈 없이 서울 정릉 배밭골에 복귀할 수 있었는지? 그토록 단아하고 예민한 분이 무례하고 사악한 남반부 군경들의 행태를 끝내 제대로 감수할 수 있었겠는지? 경상도 지역에 빨치산과 남측 군경들의 전투가 격렬했다던데, 그 와중에 총이나 파편에 맞아 다치거나 죽지는 않았는지? 온갖 생각과 추정이 꼬리를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면에서 박미애는 그녀의 가슴에 가장 아리도록 남아 있는 추억의 편린이었다. 조수현은 서울을 벗어나던 날 밤의 긴박했던 상황을 되새겨 보았다.

그 날 이두오의 움막에 가서 허탕을 친 인민군 사령부 감찰반 체포조는 어두워질 무렵 조수현의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그들의 뒤에는 박미애의 아버지 박광태가 포승에 묶인 채 핏발 선 눈빛으로 서 있었다. 처음 보는 감찰부 간부인 듯한 사람은 전형적인 공산주의 군인이었다.

"조수현 동무의 결백을 믿고 싶소. 하지만 조수현 동무도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되오. 시간이 없소. 짤막하게 답변하시오."

감찰부 간부는 권총을 빼들었다.

"동무가 북으로 데려가야 할 과학자를 은신시킨 후 도주하게 만들었다는데 사실이오?"

조수현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 자를 움막에 은신시킨 것이 동무가 아니란 말이오?"
"동무, 계급을 알 수는 없지만 목소리를 조금 낮출 수 없습니까?"
"묻는 말에만 답하시오."
"나는 그 과학자가 움막에 있다는 것을 제보한 사람입니다."

간부 뒤에 있는 박광태가 몸을 움찔 했다.

"그렇다면 왜 가까이 있는 동무가 그를 직접 체포하지 않았소?"
"동무도 알다시피 부대원 전원이 비상 대기 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리다. 해방구 주민과의 간통은 중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소?"
"그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어요?"
"그럼 왜 남반부 청년과 간통을 한 거요?"
"간통한 적 없어요."

조수현은 단호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러자 감찰부 간부는 총부리를 박광태에게 들이댔다.

"어서 입증해 봐!"

박광태는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으며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려 소리쳤다.

"미애야! 들어와라."

박미애가 들어오는 순간 조수현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박미애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걸어왔다.

"저 애가 증인이오."

다른 체포조 요원이 끼어들었다. 그는 조수현에게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당원 동무, 저 여자는 고소인의 가족입니다."

감찰부 간부는 당원인 모양이었다. 당원은 눈썹을 치켜뜨며 요원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증인 자격이 없다는 거지요."
"당신들이 일을 그 따위로 하니까 우리가 다시 미제놈들에게 밀린 거요. 지금은 전시란 말이오. 전시에는 가족도 범인 은닉죄 또는 고발 및 증인 자격을 똑같이 적용하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요원은 입을 다물었다. 박광태가 박미애에게 말했다.

"미애야, 앞으로 나와서 네가 본 대로만 말해라."

당원이 신경질적으로 박광태에게 소리쳤다.

"넌 가만 있어!"

간부는 박미애에게 총을 겨누었다.

"동무는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답해야 한다. 동무의 부친은 동무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했다."

박미애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당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버지와 조수현을 번갈아서 보았다.

"그 과학자라는 청년과 이 장교의 사이를 아니?"

박미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대답해!"

당원은 다시 권총을 올려 들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나?"

박미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둘은 연인 관계였나?"

박미애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말로 대답해!"
"아닙니다."

당원은 맥이 풀린 듯 박광태를 쏘아보더니 조수현에게 말했다.

"미안하오. 공화국의 규율을 위해서는 엄정히 할 수밖에 없었소."

당원은 권총으로 박광태를 가리키며 체포조 요원에게 말했다.

"저 자는 요원 동무가 즉결 처리하시오."

요원이 권총을 빼들고 박광태에게 다가갔다. 박미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때 조수현이 나섰다.

"저 자에게 무고를 당한 사람은 나니까 나에게 처리하도록 해 주시오."

당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태그:#양각도, #조수현, #이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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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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