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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남 목사가 지난 달 1일 남긴 유서성격의 '마지막 고별사' 일부
 강희남 목사가 지난 달 1일 남긴 유서성격의 '마지막 고별사' 일부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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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강희남 목사가 알려진 유서외에 지난 달 1일 유서성격의 '8천만 동포들' 앞으로  '마지막 고별사'를 남긴 것으로 확인됐다.  

강희남 목사 유가족들은 "6일 밤 A4 용지 두 장 분량으로 강희남 목사가 직접 컴퓨터를 이용해 작성해 놓은 이 글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강희남 목사는 이날 단식에 들어가시 앞서 '이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라는 글귀와 함께 고별사를 함께 준비한 후 죽음을 결행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강 목사는 이 글 첫머리에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때만 해도 민영환 송병선 등 애국지사 10여 명이 순절했고 송병선 선생이 남긴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의조차 망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 내 가슴에 사무쳤다"는 말로 자신의 죽음이 같은 성격의 순절임을 시사했다.

강 목사는 미국에 대해 "전쟁 끝나고 북에서는 중공군이 완전 철수했으나 저들의 군대는 지금까지 떠나지 않아 식민지화에 200%쯤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 영토 영해 영공을 완전히 자기들(미국의) 임의에 맡겨있으니 이것만 보아도 (한미)방위동맹은 허울뿐이고 예속동맹"이라며 "외세 척결과 민족통일을 바라다 쓸모없이 늙은 이 한 마리 학은 목이 길어서 더욱 서럽다"고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다.

강 목사는 "대전감옥에 있을 때 꿈에 대마도에서 절식(단식)으로 운명하신 최익현 선생을 뵈었다"고 소회했다. 그는 "양키추방과 연방제 통일만이 민족의 살길이라는 신념하나로 내 집을 양키대사관 앞이라 여겨 입 대신 몸으로 말하려고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이 길을 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래는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강희남 목사가 남긴 '마지막 고별사' 전문이다.

 강희남 목사가 지난 달 1일 '마직막 고별사'와 함께 남긴 '이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라고  쓴 글
 강희남 목사가 지난 달 1일 '마직막 고별사'와 함께 남긴 '이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라고 쓴 글
ⓒ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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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고별사
8천만 동포들에게

더는 그만두고 왜놈들과 강제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때만 해도 민영환 송병선 등 애국지사 10여명이 순절했는데 그중에도 민영환 선생을 모시던 일력거꾼이 뒤를 따라 자살했고 송병선 선생댁 소녀 식모 공림이 식도로 목 찔러 죽었다. 송병선 선생은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의조차 망해서는 않된다"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 말씀이 항상 식민지 백성된 내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돌아 보건데 1945년 종전 공간에서 양키 제국주의자들이 제 맘대로 38선을 그어 쏘련 측의 동의를 얻어 국토를 량단해 놓고 마땅히 전승국 대우를 받아야 할(북에서 쏘련군은 그렇게 했음) 이 땅의 주인이 자기들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들은 군정에서 북의 쏘련군과는 정반대로 친일파를 대거 등용함과 동시에 상해 림정 등 민족주의 세력들은 완전 배제해 버림으로 이 땅의 역사를 개판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송진우 여운형 등 애국지사들을 차례로 제거해 버리고 저들의 똘마니 리승만을 세운 뒤 소위 비밀주권을 움켜쥐어 오늘날까지 무불간섭이요 무불착취다 포츠담선언에 의해 48년 북에서 쏘련군이 철수하자 양키군들도 49년 7월에 일단 철수했으나 저들은 곧 이를 후회해서 이땅에 재상륙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함으로 에치슨 라인을 설정하여 일본까지만 자기들 방위선 안에 두어 지키고 한반도는 방위선 밖에 버려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북측에 보여줌으로 북을 유인하여 한국전쟁을 일으켜 이 땅을 재점령한 뒤에 전쟁끝나고 북에서는 중공군이 완전 철수했느나 저들의 군대는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이땅 식민지화에 200%쯤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또 방위동맹의 차원에서 우리 령토 령해 령공 할 것 없이 완전히 자기들 임의에 맡겨있으니 이것으로 보아도 방위동맹은 허울뿐이고 완전히 례속동맹인 것이다.

력사와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분로하고 통탄하지 않겠는가? 실로 해저믄 날 따옥이 소리에 한숨짛고 북으로 날아가는 기럭이 울음에 눈물짛던 새월이 얼마이던가? 외세 척결과 민족통일을 바라 쓸모없이 늙은 이 한 마리 학은 목이 길어서 더욱 서럽다.

통일운동은 바로 양키추방 운동과 직결된다는 신념으로 오랫동안 싸워본다고 했지만 이 땅의 괴리정권과 보수주의 매국로들의 세상에서 이란격석이 아니었던가? 이 치욕스러운 력사를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엣 어른들은 "가이생어사(可以生於生)이오 가이사아사(可以死於死)라 가히 살만한때에 살고 가히 죽을만 한때에 죽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던가. 살아도 애국이요 죽어도 애국이 있을 뿐이다.

나는 민족적으로 못하면 개인적으로라도 그들에대한 노례신분 청산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몰려 있음을 어찌하랴? 내가 대전감옥에 있을 때 꿈에 대마도에서 절식(단식)으로 운명하신 최익현 선생을 뵈었는데 내가 선생을 부액해 모시고 가면서 춘추를 물으니 73세시란다. 그렇다면 나는 선생보다 17개년을 덤으로 살았으니 이것도 하나의 죄의식으로 남는다.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 오자서가 목숨을 피해 오나라 망명길에 올으면서 피떵이 같은 어린 왕손 승을 안고 그 천신만고 9사1생의 길을 간 것은 오직 그 어린애만이 장차 초나라 왕통을 이을 존재라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나 자신도 그동안 기막히게 고독하고 서러운 운동의 세월을 살았고 이제 또한 오자서 처럼 양키추방과 련방제 통일만이 이 민족의 살길이라는 신념하나로 멍든 가슴에 안고 내집을 내집을 양키대사관 앞이라  여겨 입대신 몸으로 말하려고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조국과 민족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목숨으로 말이다.

 단기 4342(2009)년 5월 1일.
(**맞춤법에 따리지 않고 원문 그대로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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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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