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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정의가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출마한다고 선언했다. 옆은 이기명 후원회장
▲ 대선출마선언 당시의 노무현-권양숙 부부 노무현은 '정의가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출마한다고 선언했다. 옆은 이기명 후원회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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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면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지난 5월 29일 고 노무현 16대 대통령 영결식에서 한명숙 공동장의위원장이 눈물로 읊은 추도사의 한 대목이다.

누리꾼 반달씨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이런 댓글을 <오마이뉴스>에 남겼다.

"처음으로 후회했습니다. 대통령으로 뽑지 말 걸…."

노무현, 왜 대통령이 되고자 했을까?

인간 노무현의 비극적 최후는, 그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정치인 노무현은 왜 대통령이 되고자 했을까? 그것은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하고 나서 가장 높은 산을 한번 정복하고 싶다는 본능적 목표였나, 아니면 그만의 어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나?

나는 2007년 9월 2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마주 앉았을 때 이렇게 물었다.

- 정치인으로서 내가 대통령을 꼭 해봐야 되겠다, 이렇게 작심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국회의원이 더 편할 것 같은데.
"내가 (2001년 12월에) 공식적으로 대선출마를 선언하기 전부터 <시사저널>이나 <한겨레 21> 같은 곳에서 여론조사를 하면 선호하는 대선주자 1위로 노무현이 나오곤 했지요."

그래서 어느 정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답이 뜻밖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이인제씨 때문이죠. 이인제씨가 2002년 대선 전에 우리 민주당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서였죠. 내가 그때부터 '이거 큰일 났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회창씨 쪽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내 상대는 이인제씨였어요."

그러니까 이인제씨(현 18대 국회의원)가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내가 출마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왜 그토록 이인제씨를 의식했던 것일까?

"그때 아마 내가 노여움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이인제씨의 행태를 보면서) 이게 정치냐, 이대로 가도 되냐, 그렇게 노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02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두 사람이 악수하고 있다
▲ 노무현과 이인제 2002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두 사람이 악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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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노무현이 그때 가지고 있었던 분노는 '반칙'에 대한 것이었다.

"경선불복 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우리 당으로 와서 여기서 또 후보하겠다고 하는데… 그  설명할 수 없는, 이치에 닿지 않는 현상, 그리고 그 현상에 영합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임과 세력을 보면서 이게 뭐냐, 이게 정치냐, 이대로 가도 되냐고 분노했지요."

"이인제 이기기 위해 하다 보니 대통령 됐다"

이인제씨는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예비후보로 나와서 당내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 졌다. 하지만 그는 경선불복을 선언하고 무소속 대통령 후보가 되어 3등을 했다. 이후 2002년 대선판이 무르익자 이번에는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기 위해 민주당으로 입당했다. 당시 민주당의 '대세'는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상태였다. 정치인 노무현은 그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끝까지 맞섰다'.

"내가 이인제와 끝까지 맞섰던 것은 그 사람의 정책이나 기능이나 역량이나 이런 것이 나보다 훨씬 더 처진다는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칙을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3당합당 때 YS를 따라간 것이나, 경선불복한 것, 그리고 다시 보따리 싸고 당을 나와서 이전해 온 것, 이런 것들이 정치윤리상으로는 하나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정치인 노무현은 "이인제를 이기기 위하여 전력투구"했다. 노사모 바람이 미풍에서 열풍으로 바뀔 때 그는 대통령으로 가는 길에 도전하는 것 자체에 부담감을 느낄 때도 있었으나 "이인제를 두고 볼 수 없어서" 최선을 다해 그 길을 갔다고 했다.

"노사모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회원들이 자기 식구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더라고요. 그러니 부담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어요. '야 이게 진짜, 중간에 포기하고 도망가 버릴 수도 없고,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 누구하고 지고 이기고 문제가 아니고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부담이 팍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이인제씨 때문에 끝까지 갔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은 그때를 돌아보면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웃기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사실 내가 이인제씨를 이기기 위해서 하다 보니까 대통령이 됐다고 말할 수 있어요."

- (웃음) 이인제씨가 역사적 기여를 많이 했네요?
"역설적으로 많이 한 셈이죠."

지도자가 기회주의자가 되면 국민도 닮는다

그럼 정치인 노무현은 왜 그토록 이인제씨를 싫어했을까? 그것은 단순한 라이벌 게임이 아니었다. 그가 분노한 것은 이인제씨의 행로 자체가 아니라 반칙을 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었다. 또 지도자가 그렇게 만들어졌을 경우 그것이 국민들에게 끼칠 영향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대통령 노무현은 이 대목에서 지도자론을 길게 이야기했다.

"우리가 지도자를 얘기할 때 너무 기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도자 또는 지배집단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의 윤리의식, 가치형성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게 돼 있습니다. 그 윤리와 가치의 핵심이 신뢰입니다, 신뢰."

대통령 노무현은 지도자의 행위가 어떻게 그 사회의 신뢰수준으로 연결되는지를 설명했다.

"이 신뢰가 굉장히 중요한 것은, 지도자들의 행동에 따라서 그 사회 신뢰수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약속이 무력화되기 때문에 기능적인 기대도 다 배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정치에서 서로 대화가 잘 안 되고 조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도 한몫하지만 신뢰의 문제가 굉장히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07년 청와대 뒷산에서 <오마이뉴스> 기자들과 인터뷰하면서 웃음짓는 노무현 대통령.
▲ "이인제씨 때문에 대통령 됐어" 2007년 청와대 뒷산에서 <오마이뉴스> 기자들과 인터뷰하면서 웃음짓는 노무현 대통령.
ⓒ 청와대사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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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치인의 기회주의가 그 신뢰 파괴의 주범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신뢰를 파괴하는 결정적 계기가 기회주의입니다. 정치는 대의를 말하는 직업인데, 입으로는 대의를 말하면서 그 행동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쫓아가고 있을 때, 그런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일 때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죠."

그 결과는? 기회주의적 지도자는 기회주의적 국민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신뢰를 잃은 지도자가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거죠. 더욱이 그 사회 사람들의 가치의식과 윤리를 파괴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전부 다 이제 힘센 자에게 줄을 서고, 힘센 자 편에 가담하고 속이려고 하고, 연고를 가지려고 하고…전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게 되거든요."

대통령 노무현은 "그래서 보수적인 지도자냐, 진보적인 지도자냐를 따지기 전에 신뢰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면서 "그것이 이인제씨의 정책이나 역량을 떠나 내가 그에게 끝까지 맞섰던 이유"라고 했다. 지도자가 원칙을 지켜서 신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신념이었다.

"내가 그런 신념을 갖게 된 것은, 내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3당합당 때 YS와 결별하고 그동안 겪었던 인생이 하도 험악했기 때문에, 그 험악한 가운데서도 내 스스로 원칙을 유지해 왔던 그 개인사적인 경험 때문에 이런 신념에 집착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2007년 대선공간으로 이동해보자. 우리는 현직 대통령 노무현이 유독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상대는 손학규씨였다. 한나라당에서 경선을 앞두고 이명박 후보에게 승산이 없자 민주당으로 옮겨 대선 예비후보에 출마한 손학규. 정치인 노무현의 눈에는 그가 기회주의자일 뿐이었다. 그에게 2007년의 손학규는 2002년의 이인제였던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손학규의 선택과 함께 그를 따르는 "기회주의적 현상"을 비판했다.

"옛날에 YS의 3당합당을 그렇게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하던 사람들이 지금 손학규 뒤에 가 줄 서 있는 거 보면 그거하고 이거하고 뭐가 다릅니까? 나는 그런 것을 쳐다보고 이제 속이 타는 거지요.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다시 보는 대선출마 연설, 비겁한 교훈의 시대는 가라

원칙을 중시하던 정치인 노무현은 그렇게 반칙을 싫어했다. 그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반칙하는 자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반칙한 이인제를 패배시키기 위해 2002년 대선에 출마를 결심한다.

노무현은 2001년 12월 10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2002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출마선언 연설의 핵심은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600년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였다.

"비겁한 역사를 끊겠다" 2001년 12월10일 힐튼호텔.
▲ 대선출마 연설 "비겁한 역사를 끊겠다" 2001년 12월10일 힐튼호텔.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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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해야 했습니다.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면서 살아라'였습니다.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였습니다.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600년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 역사가 이뤄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의 '비겁한 교훈'을 당당한 교훈으로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 노무현은 스스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그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고졸 출신 변호사로 정계에 입문했던 비주류 정치인이, 어려움 속에서도 원칙을 지켰던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름으로써, 정계 최고의 성공을 보여줌으로써,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노무현은 왜 죽은 링컨을 만난 것일까

정의가 성공하는 사회. 정치인 노무현이 그것을 얼마나 갈망했는지는 그가 미국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을 열애한 이유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대선출마선언 한 달 전인 2001년 11월 펴낸 책 <노무현이 만난 링컨>(학고재)의 서문 '왜, 다시, 링컨과 만나야 하는가'에서 이렇게 적었다.

"링컨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정치에 입문한 뒤였다. 기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왔다.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했다. 나의 답은 다른 이들도 흔히 꼽는 것처럼 김구(金九) 선생이었다. 김구 선생은 생을 마칠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지조를 지킨 지사였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에게 벗어나기 힘든 운명처럼 다가온 분단에 끝까지 맞선 분이 김구 선생 아닌가. 누구나 존경하고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김구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은 왜 패배자밖에 없는가'하는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왜 패배했는가? 역사에서 올바른 뜻을 가진 사람은 왜 패배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 역사에서는 정의가 패배한다'는 역설적 당위로 귀착됐고, 나는 그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패배하는 정의의 역사 ―. "

정의가 패배하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김구 대신 다른 인물을 찾아 나섰다.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는 자, 성공한 김구를 찾아나섰다. 원칙을 지켰으나 거듭 패배자가 된 당시의 그로서는 절박한 것이었다.

노무현이 링컨에 반하게 된 것은 2000년 4월 13일, 국회의원 총선 개표가 진행되고 있던 날 밤이었다. 당시 그는 지역주의 타파를 부르짖고 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출마했다. 그가 개표의 밤에 패배를 예감하고 있을 때 우연히 접한 책 <세계를 감동시킨 위대한 연설들>(월간조선, 2000년 4월호 별책단행본)을 통해 링컨을 만난다. 다시 서문을 보자.

"정치현실에서 나는 늘 쫓기는 입장이었다. 나의 결정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항상 들었지만 1992년 총선에서도,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1996년과 2000년 총선에서도 계속 떨어졌다. 당에서도 힘없는 비주류였다.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물었다. '옳다는 것이 패배하는 역사를 가지고, 이런 역사를 반복하면서, 아이들에게 옳은 길을 가라고 말하고 정의는 승리한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가?' 이 자문의 틈을 자연스레 비집고 올라온 것이 링컨이었다."

2001년12월10일 대선출마선언식 후 지지자와 기념촬영. 뒤의 구호는 링컨의 업적을 압축표현한 것으로 노무현의 링컨정신 계승을 말해주고 있다.
▲ 링컨에게 배웠다 2001년12월10일 대선출마선언식 후 지지자와 기념촬영. 뒤의 구호는 링컨의 업적을 압축표현한 것으로 노무현의 링컨정신 계승을 말해주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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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을 뛰어넘는, 한국의 링컨을 고대하다

링컨은 노무현에게 위안이 되기도 했다. 원칙을 지키지만 거듭 패배하는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에게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걸었던 긴 패배의 길은 위안이 되었다. 그는 링컨 패배의 역사를 서문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는 링컨이 능력 있고 현명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실패와 약점도 많았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스물두 살 때 처음 일리노이 주의원에 도전했으나 패배했고, 재수해서 주의원이 되었다. 서른다섯 살에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할 때는 공천조차 받지 못했고, 그 2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1846년에 비로소 연방 하원의원에 선출됐다. 임기를 마친 후 대통령에 당선되는 1860년까지 11년 동안의 정치 도전은 모두 실패로 점철된다. 1849년 테일러 대통령에게 국토관리청장직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했고, 1855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낙선했다. 1856년 부통령 후보에 낙선했고, 대통령에 당선되기 2년 전에는 또다시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그런 링컨은 미국의 16대 대통령이 되었고, 노예해방이라는 정의를 위해 싸워 이겼으며, 남북전쟁 후에는 갈라졌던 국가를 통합하기 위해 관용의 정신으로 패자를 감싸 안았다. 그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대통령 1위로 꼽히곤 한다. 역사적 평가에서도 승리한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패배를 딛고 정의의 개념을 내세워 승리한 링컨을 통해 "자신감과 용기를 얻었다."

"내가 존경할 만한 인물은 누군가? 동서고금을 막론해 인류가 부정할 수 없는 정의의 개념을 내세워 승리하고, 바른 역사를 이루어낸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천 년이 지나도 부정하기 힘든 '정의'라는 주제를 가지고 역사를 일군 사람. 그래서 인류에게 '정의가 승리한다'는 희망을 제시한 사람이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모두에서 성공한 사람이 링컨이었다. '정의는 항상 패배한다'는 것이 가당찮은 역설에 지나지 않도록 만들면서 진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이중성을 깨끗이 씻어준 본보기는 김구 선생이 아니라 링컨이었다. 나는 훌륭한 역사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링컨에게서 얻는다."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 : 정의가 성공하는 사회 만들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1년 펴낸 책(스캔본)
▲ <노무현이 만난 링컨>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1년 펴낸 책(스캔본)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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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노무현은 김구 선생을 뛰어넘는 '한국의 링컨'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해방 이후의 한국사는 현실주의의 미명 아래 여러 가지 왜곡된 타협을 강요해왔다. 이상이 현실에 굴복하고 현실이 이상을 구박하는 시대를 극복하자면 김구 선생을 뛰어넘는 대안이 나와야 한다."

정치인 노무현은 스스로 그 대안이 되고자 했다. 그것이 그가 "정치를 하는 이유"였다.

"나는 감히 말한다. '역경 속에서 연마한 건전한 상식'을 가진 링컨이 없었다면 미국의 정치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낮은 사람이, 겸손한 권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든 전형을 창출한 사람. 그가 곧 링컨이다. 그는 옳은 길을 갔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 길을 가 성공했기에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

지난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옳지 못한 길을 가야 하고, 정직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왔다. 이러한 의식, 이러한 문화를 바꾸지 않고서는 한 차원 높은 사회발전도, 역사발전도 불가능하다. 이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자존심이 활짝 피는 사회, 원칙이 승리하는 역사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자 정치를 하는 이유이다."

그런 "간절한 소망"을 가진 정치인 노무현은 이 책의 서문을 쓴지 6년만에 결국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링컨을 닮고자 했던 그는 공교롭게도 링컨처럼 16대 대통령이었다. 닮은 것은 더 있다. 두 사람은 모두 1) 어린 시절,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2) 최상급학교(대학)를 다니지 못했고 3)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고 4) 몇 차례씩 선거에서 낙선했으며 5) 재임 중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최후까지 닮았다. 한국과 미국의 16대 대통령은 모두 천수를 다하지 못했다. 링컨은 암살 당했으며, 노무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무현 "링컨도 사후 100년에야 후한 평가 받아"

그렇다면 역사적 평가는? <노무현이 만난 링컨>의 에필로그 제목은 '성공한 대통령의 길'이다. 그 첫 대목에서 노무현은 이렇게 적었다.

"역사적 인물 링컨에 대해 미국인들은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링컨이 대통령직에 있던 당시, 언론은 종종 링컨을 '독재자, 폭군' 등으로 불렀다. 링컨의 고향인 일리노이 주에서 발행되던 신문조차도 그를 '미국의 공직을 불명예스럽게 만든, 가장 간계하고 가장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로 욕을 했다. 이러한 비난 섞인 평가는 물론 링컨의 반대자들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아무튼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결코 호의적인 것이 못되었다. 링컨의 사후 100년이 지난 뒤에야 좀 더 나은 평가가 내려졌다."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은 사후 100년에 어떤 평가를 받을까?

인물연구 노무현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것은 불과 8년 전에 그토록 "간절한 소망"으로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를 토해냈던 그가, 정치의 최고봉인 대통령이 되어 임기를 다 채운 그가, 퇴임 직전까지 '시민사회 재조직'을 구상했고 퇴임 후에는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어 운영했던 그가, 2009년 봄에 검찰수사를 받으면서 "정치 하지 마라"는 글을 썼다는 사실이다.

2009년 5월 23일 새벽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바위에 올랐을 때,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노래했던 그와 "정치 하지 마라"는 글을 쓰고야말았던 인간 노무현. 45미터 낭떠러지로 몸을 던질 때 그는 '정의가 성공하는 사회'는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까지 버린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지금 오지 않았지만 100년 후에라도 올 수 있으리라는 한 조각 희망을 지녔을까?


태그:#노무현, #링컨, #이인제, #정의, #성공, #인물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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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대표기자 & 대표이사. 2000년 2월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988년 1월 월간 <말>에서 기자활동 시작. 사단법인 꿈틀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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