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89년 5월 28일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이라는 참교육의 기치를 내걸고 출발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1524명의 해직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교육개혁과 합법적인 노동조합의 지위를 얻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전교조 정해숙 전 위원장은 이 과정에서 5대와 6대(1993년~1996년) 위원장을 맡아 해직교사의 복직을 이끌고 전교조 합법화의 산파 노릇을 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93년 당시 오병문 교육부장관은 '탈퇴 각서 제출 조건부 선별 복직 방침'을 제시하였다. 정해숙 당시 위원장은 여러 차례의 회의와 고뇌 끝에 "교육부의 방침을 수용하거나 복직문제를 종결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학교로 돌아가 교육개혁을 실천하고, 전교조 합법화를 앞당기기 위해 복직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로써 1294명의 해직교사들이 학교로 돌아가게 된다. '신규채용' 형식이었다.

 

정해숙 전 위원장은 해직된 지 10년 만인 1999년 복직하지만 교원 정년 단축으로 이듬해 퇴직하게 된다. 지금은 이미 칠순(1936년생)이 넘었고 교단에서 물러난 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존경받는 교육계의 스승이요, 교육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활동가이다. 전교조의 비합법 10년과 합법 10년 사이의 거멀못 같은 존재가 바로 정해숙 전 위원장이다. 전교조 창립 20주년에 즈음해 광주에서 정 전 위원장을 만났다.

 

1993년 10월 15일, 복직 수락 기자회견에 대한 기억

 

정 전 위원장은 옛 상무대가 있던 자리에 위치한 사찰로 기자를 불렀다. '무각사(無覺寺)'라는 현판 앞에서 잠깐 고민한 끝에 '깨달음이 없다'는 황량한 풀이보다는 '무한한 깨달음의 경지'라는 미려한(?) 풀이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선생과 만나기로 한 경내 찻집으로 들어섰다.

 

정 전 위원장은 온화한 미소로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찻집에서 기자가 오미자차를 주문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통했다"라고 했다. 자신도 오미자차를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오미자차를 좋아하니까 아는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빨갱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듣지' 하고 말예요." 그러고는 다시 웃음을 머금는다. 열매가 빨갛게 우러난 오미자차를 두고 하는 소리다. 빨간 색을 좋아하면 빨갱이가 되기도 하는 참 유치한 시절의 일화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지금은 색깔과는 상관없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이들이 아직도 종종 있다. 이 지독하고 천박한 레드 콤플렉스!)

 
오미자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난 정 전 위원장은 1993년 10월 15일 해직교사의 복직을 수락하는 기자회견 당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조합원 선생님들이 복직 문제를 위원장에게 위임해주었어요. 그러기에 내가 역할을 할 수 있었어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계 원로들을 비롯해 고 김수환 추기경까지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듭된 내부 회의와 '싸우더라도 학교로 돌아가서 싸우라'는 각계 원로들의 조언을 충고 삼아 마음을 굳히고 교육부의 요구를 수락하기로 했어요."

 

1993년 10월 15일이 바로 그날이었다.

 

"기자들을 불러놓고 기자회견을 해야 하는데 참교육 실현을 위해 돌아가신 열두 분과 살아있는 선생님들에게도 미안해 자꾸 눈물이 나서 (기자회견장으로) 못 나가겠더라구요. 결국 당시 이수호 부위원장 등이 들어와서 (내가 우는 걸 보고) 한참 서 있다 나가서 기자회견을 30여 분 연기시켰던 것으로 알아요."

 

'선탈퇴 후복직'이라는 당시 교육부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마음의 짐이었는지를 알게 하는 부분이다.

 

"전교조, 앞으로도 끊임없는 성찰 과정 필요"

 

전교조가 이룩한 성과에 대해서도 자부심이 커 보였다.

 

"전교조는 어떤 조직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을 했어요. 국방비를 절감하고 통일교육(반공교육 아니라)을 하자고 앞장섰잖아요. 툭하면 간첩 운운하던 시절에 통일 이야기를 누가 할 수 있었겠어요? 전교조나 되니까 하지. '노동=빨갱이, 노동=천한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에 전교조가 있었어요. 언론사 기자들도 인터뷰가 끝나면 '전교조가 부럽습니다'라고 하던 시절이었어요."

 

"전교조 없는 교육현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그 어려운 속에서도 전교조 선생님들이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아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전교조 역할론이자 예찬론이다.

 

그러나 전교조에 대한 칭찬에만 그치지 않았다. 선배로서 매운 충고가 이어졌다. 전교조가 통일문제·노동문제를 참교육 실현의 투철한 의지로 실천한 것은 훌륭한 성과이지만 이제 성년이 됐으니 내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합원 수가 늘어나는 데 연연하기보다 과거처럼 1당 백의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해요. 내․외부의 타이트한 연수와 노력이 느슨해지기도 한 것 같고. 끊임없이 성찰의 과정이 필요해요. 보수 세력들이 전교조 선생님들이 입시 위주로 수업을 하지 않는다며 담임 거부 운동을 하는 건 슬픈 일입니다."

 

적극적으로 현실 문제에 대응하라는 주문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가르치는 것이 전교조"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을 일러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 꾸짖음은 냉정했다.

 

"경기도교육감 선거가 이명박 교육정책에 대한 평가였어요.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들 가운데 사형제가 존속돼야 한다고 한 사람이 지금 대통령이에요. 다른 후보들은 다 반대했어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우리 조직과는 상당히 다른 차이가 있어요. (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은) 인간 공동체의 삶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이에요."

 

전교조가 '초심'을 잃었다고 지적하는 세간의 말들에 대해서는 "고마운 지적이지만 전교조가 초심을 잃기를 바라는 이들이 하는 말"이라고 일축했다. 이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가르치는 것,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의 자세로 살아가는 걸 추구하는 것이 전교조"라며 "능력이 따르지 못한다고 젖혀두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런 자세로 가면 된다"고 말했다.

 

안팎에서 위기를 말하는 가운데 20살 성년이 된 전교조의 오늘을 지지와 염려로 지켜보는 정 전 위원장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투명했다.

 

"남이 아닌 나를 돌아보는 자세로 아이들과 사회 변혁을 꿈꾸어야 해요. 정부와 일일이 맞서는 것보다 형이 동생한테 하듯이 전교조가 협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정부가 협상을 안 하려 해서 문제이지만.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으니 우리 것만 고수해서는 안 돼요."

 

그는 전교조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를 인터뷰를 마치는 순간까지 빠트리지 않았다.


태그:#전교조, #정해숙, #이명박, #해직교사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