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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함박눈이 내리는 어느 날, 인민군 장교 조수현이 탄 지프가 정릉 김성식의 대문 앞에 멈췄다. 두 손으로 챙을 올려 방한모를 고쳐 쓴 조수현은 대문을 조용히 밀어 보았다. 마당에 들어선 그녀는 우리에 어미 염소와 새끼 염소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집에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희색이 돌았다. 하지만 여러 번 주인을 불러 보아도 집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들이 모두 떠났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집 뒤란을 통해 작은 문을 빠져 나갔다. 밭이 있었고 왼쪽 멀리로 너럭바위가 있는 숲이 보였다. 밭 너머 오른쪽에는 기울어져가는 움막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만 없을 뿐, 추억의 바위와 움막은 작년 모습 그대로 그녀를 맞이해 주고 있었다.

 

밭에는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북악을 타고 내리는 모진 바람이 쌓인 눈을 건드리며 사납게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눈가루들이 솟아 날리며 조수현의 목으로까지 차갑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밭 너머에 있는 움막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보나마나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움막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그때 움막 옆으로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보자기로 머리와 귀를 둘러 쓴 젊은 여자였다. 그녀가 밭 너머 이랑으로 돌아나가고 있었다. 조수현도 걸음을 옮겨 그녀와 마주칠 수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보자기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바삐 걸어오던 처녀는 인민군을 보자 움찔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박미애였다.

 

"아니, 미애 동무 아닙니까?"

 

박미애도 조수현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장교님, 다시 오셨군요."

"움막에는 무슨 일로, 혹시 안에 사람이 있나요?"

 

박미애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더니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두오 오빠가 많이 아파요."

 

박미애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조수현은 움막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조수현이 움막의 거적을 들치고 들어가자 이두오의 말소리가 들렸다.

 

"미애냐?"

"조수현입니다."

"뭐라구요?"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윽고 조수현이 말했다.

 

"혹시나 두오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와 봤어요. 사람이 없더라도 움막과 너럭바위라도 보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구요."

 

이두오의 얼굴에 감동의 물살이 지나갔다.

 

"그런데 두오씨야말로 웬일로 여기에 계시는 거죠?"

 

이두오는 조수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남들은 서울에서 남으로 갈 때, 나는 반대로 서울로 왔습니다. 인민군이 다시 서울에 왔다고 하는데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어나 앉은 이두오는 조수현에게 손을 뻗었다. 조수현이 이두오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이두오는 힘들게 침을 한 번 삼키더니 말했다.

 

"수현씨가, 한 번은, 움막을 찾아 주리라 하는 기대로…."

 

조수현은 이두오 앞에 앉았다. 동시에 두 사람은 와락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두오의 병은 그리 위중한 것이 아니었다. 영양 부족에 독감이 겹친 것이었다. 그러나 박미애가 돌봐주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만큼 박미애는 이두오를 정성스럽게 간호해 주었다고 했다.

 

조수현이 가져다 준 약과 음식을 먹으며 이두오는 차츰 기력을 회복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들은 너무도 서로를 원했으므로 비록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 될지라도 그들의 감정과 욕망에 서로의 몸을 아낌없이 맡겼다.

 

박미애의 상심과 김성식의 근황

 

며칠 후 박미애는 밭이랑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보자기를 둘러 쓴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숭늉 주전자와 찐 고구마 봉지를 들고 움막의 거적문을 열었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움막 안의 남녀는 깊은 포옹을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녀를 보기 전에 얼른 거적을 내린 그녀는 왔던 길을 급히 되돌려 걸었다. 손에 든 숭늉과 고구마가 그녀 스스로 민망스러웠다. 눈발이 희끗거리고 있는 길을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무심히 걸어 나갔다. 그녀는 자기가 어떤 정황에 처했는지를 비로소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정릉 마을은 돌아온 바닥빨갱이 박광태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피난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박광태를 상전 모시듯이 대우하고 있었다. 그가 부녀자에게 수시로 손을 댄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다.

 

조수현은 박광태의 행동을 제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부하 한 명을 박광태에게 밀착시켰다. 그와 함께 어울리게 하여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조수현은 틈나는 대로 이두오를 찾아갔다. 이두오는 기력을 회복하여 다시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식을 끼적여 놓은 종이들이 책상 위에 쌓여가고 있었다. 그들은 화롯불에 감자를 구워먹으며 헤어져 있던 석 달 동안 있었던 일을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또한 그들은 너럭바위 대신 움막 화로 앞에 앉아 미처 다하지 못한 별과 우주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조수현이 이두오에게 물었다.

 

"김성식 선생님은 어디로 가신 겁니까?"

"나도 그때 헤어지고 뵙지 못했는데 학교 관계자 말을 들으니 마침 부산에서 전사 편찬을 하는 일이 생겨 내려가셨답니다."

 

"그 분 같으면 여기에 계셨더라도 아무 탈이 없었을 텐데."

"학교 인민군 자치위원회에서 그 분을 심사 탈락시킨 것을 모르고 있었지요?"

 

"아, 그런 일이 있었나요? 그때 나한테 말씀하셨더라면 어떻게든 도움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태생적으로 그런 부탁을 못하시는 분 아닙니까? 그때 나도 수현씨를 생각했었는데 김 선생님이 펄쩍 뛰며 말리셨어요."

 

"이 혹한에 가족을 이끌고 모진 고생을 하시겠군요."

 

그들은 마음속으로 김성식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움막에는 밥상만한 크기의 창이 있어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두오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통일만 된다면야 서울이든 평양이든 미국이든 러시아든 아무 곳에서라도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그런데 요즘 물리학의 추세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가고 있지요."

 

"어떻든 전쟁은 저질러졌으니 통일로 끝나지 않겠어요?"

"내 계산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계산이라니요? 추정이 아니고요?"


태그:#조수현, #이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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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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