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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홍승준어른을 찾아간 적십자회원 적십자 회원들이 쌀과 부식을 배달해주고 있다.
▲ 혼자 사는 홍승준어른을 찾아간 적십자회원 적십자 회원들이 쌀과 부식을 배달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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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리고 마른 나무에 꽃이 피고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입니다. 말 그대로 화창한 계절이지요. 그리고 오늘 5월8일은 어버이날입니다. 기자도 오늘은 어머님을 모시고 나들이라도 다녀올 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웃 동네에 혼자 살고 계시는 홍승준(1929년생) 어른의 안타까운 삶을 우연히 듣고부터 가끔 찾아뵙는데 그 어른은 어버이날인 오늘도 찾아오는 가족 없이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어제 대한적십자 홍천지부 화촌면 봉사대 회장과 동네 주민 일에 항상 솔선수범하는 조성근(전 홍천군 이장협의회장)씨와 함께 그 어른을 찾아뵙고 왔지만 하루가 지나도 어제 어른이 한 말이 여전히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난 어버이날에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자식 없는 한을 누가 알겠어요. 정말 원망스러운 게 많아요."

홍승준 어른이 혼자 드시는 밥상 혼자 생활해야 하는 팔순 노인의 주방 모습
▲ 홍승준 어른이 혼자 드시는 밥상 혼자 생활해야 하는 팔순 노인의 주방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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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준 어른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때는 6 ․ 25전쟁 한 해 전인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홍승준 청년은 당시 발 빠르고 날쌘 산골마을 청년이었습니다. 날렵한 산 다람쥐처럼 이 산 저 산을 내 집 마당삼아 봄에는 산나물을 캐고, 가을에는 송이버섯을 따고 겨울에는 땔감나무를 찾아다닌 전형적인 산골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에게 불행한 일이 닥쳐옵니다.

1949년 9월6일(음력 윤7월14일) 한밤중에 비상 연락이 왔습니다. 평소 청년 홍승준은 이웃 형인 박창환, 홍승원(대한청년단)씨와 강원도 홍천군 지역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청방위(청년방위대) 소속으로 경찰의 소집이 있을 때마다 군사 훈련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그 날 청년 홍승준은 공비가 침투했다는 비상 연락을 받고 동네(화촌면 주음치리) 앞 초소로 보초 근무를 나갔습니다. 박창환 형도 나와 있었습니다. 달빛 환한 초가을 밤이었습니다. 전기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저 환환 초가을 달빛을 바라보며 보초 근무를 서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시간은 한밤중이었습니다. 저만치 다리 너머에서 분명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청년 홍승준은 긴장했고, 맡은 바 임무를 다해야 했습니다. 정말 무장공비가 나타난 것일까, 우리 군인이나 경찰일까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날 지역 암호는 '무궁화'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청년 홍승준과 박창환는 그 암호를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달빛 환한 밤이었지만 박창환과 홍승준 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낯설었습니다. 깊은 밤에 몇 사람이 무리지어 다니는 지역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홍승준은 "누구냐"하고 외쳤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무장공비들이 박창환 형의 머리에 총 개머리판을 내리치더니 홍승준에게는 날카로운 창으로 사타구니를 푹 질렀습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박창환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고, 청년 홍승준은 장단지에 두 번을 더 찔렸습니다. 잠깐의 방심으로 기습 공격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홍승준은 순간 죽었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그 자리에서 도망쳐 뛰기 시작했습니다. 무장공비들은 한밤중에 달아나는 청년 홍승준을 향해 총을 쏘지는 못했습니다.

홍승준은 추적해 오는 무장공지를 피해 동네 마굿간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다행이 앞면이 있는 소들은 눈만 껌벅일 뿐 아무 일 없다는 듯 잠잠히 있었습니다. 청년 홍승준은 다음 날 새벽녘까지 신음소리를 삼키면서 마굿간에 숨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박창환 형과 홍승준은 홍천지대장에게 부상 사실을 말하고 원주에서 온 8연대 군용차량을 타고 춘천도립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부상 정도가 심한 박창환 형은 3개월 후 사망하고 맙니다. 또한 그날 보초 근무에 좀 늦게 나온 홍승원 형은 다행히 그 날의 사건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네 일에 솔선수범하는 조성근(전 홍천군이장협의회장)과 대담 조성근씨가 홍승준 어른에게 국가유공자 상이군경 지정에 대한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다.
▲ 동네 일에 솔선수범하는 조성근(전 홍천군이장협의회장)과 대담 조성근씨가 홍승준 어른에게 국가유공자 상이군경 지정에 대한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다.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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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런 사건이었습니다.

6․25 전쟁 전의 휴전선은 소양호를 넘어 바로였다. 다시 말해 북한군이 소양호를 건너면 가리산을 넘고, 홍천읍내로 바로 가려면 야시대를 통과해야 하는데 가마덕산을 넘어야 야시대리를 통과하게 된다. 야시대리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주음치리가 있다. 그리고 주음치리에서 조가터 마을을 지나가면 홍천읍내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공작산 정상이다.

1949년 9월6일 가마덕산에 옥수수 농사를 짓고 살던 주민이 무장공비에 잡혀 있었고, 그것을 몰래 본 어머니가 두촌면 철정지소에 신고를 해서 홍천경찰서 대한청년단이 민준기 기동대장의 인솔 아래 출동을 하게 되었다. 늦은 밤에 우리 경찰이 가마덕산에서 북한군 두 명을 사살했고, 후퇴하는 북한군을 추적한 사실이 있었다. 그 시체를 방치해서 야시대리 동네 주민들이 묻어 그들의 묘는 지금도 화촌면 야시대리에 있으므로 그 사건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데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두 명을 잃은 북한군은 그 날 다시 침투를 했던 것이다. 한국 경찰들은 북한군 두 명을 사살하고 후퇴시켰으니 다들 가마덕산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군은 정말 후퇴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침투한 북한군은 먼저 홍천군 화촌면 야시대리 가마덕산에서 보초근무를 서던 대한청년단들과 마주치고, 그들을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 13명을 사살한다.

당시 사망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박광수. 박기수. 박성대. 박희만. 변부윤. 유성금. 이상호. 이영호. 이창우. 한갑상. 한왈상. 황왕근. 허만식.

야시대리 부상자(20명)
김난수(현재생존). 김인수. 김영준. 김원호. 김창근. 변호윤(현재생존). 백기철. 안순길. 엄용기. 엄익선. 유선문. 이순철. 전재봉. 장수복. 차상준. 황봉근. 황봉춘. 현대현. 허우봉. 허용봉(현재 생존).

주음치리 부상자(2명)
홍승준(현재생존). 박춘환(사건 3개월 후 사망).

조성근씨가 당시 피해자 어른들을 대신해서 경찰청에게 보낸 서한 당시 피해지분들은 대부분 한글을 배우지 못했거나 알더라도 문서화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더욱 안타깝다
▲ 조성근씨가 당시 피해자 어른들을 대신해서 경찰청에게 보낸 서한 당시 피해지분들은 대부분 한글을 배우지 못했거나 알더라도 문서화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더욱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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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사망자 중 유성금, 이창우, 황왕근, 허만식 네 분은 1962년도에 내무부장관이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해 유족(사망자의 부모)이 국가로부터 유족보상금을 지급받은 사실을 춘천보훈청에서 2009년 3월20일 확인했다. 또한 다른 사망자 9인은 사건이 일어난 후 고향을 떠나 연고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1962년 조사 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야시대리에서 대한청년단을 살해한 무장공비는 공작산 가는 길을 안내하라고 박광수씨를 앞장세웠고, 그 길잡이 역을 담당한 박광수씨 역시 주음치리 초입에서 목을 내리쳐 사망케했다. 그리고 만난 사람이 바로 홍천군 청방위 소속의 박창환과 홍승준 청년이었던 것이다. 무장공비는 공작산을 향해 사라졌고, 다음 날 공작산에서 우리 경찰의 수색작전이 시행되고, 무장공비와 교전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으로 당시 경찰관 신분이었던 허선구(강원도 홍천군 동면 속초리) 순경이 좌 하퇴부 관통상을 당했다. 물론 무장공비도 모두 소탕했다.

이러니 모든 사건의 정황은 일치하게 됩니다. 1949년 9월6일(음력 윤 7월17일) 야시대리 사망자 중 일부가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았고, 다음 날인 1949년 9월7일 홍천군 공작산 일대에서의 수색작전 중 공비가 쏜 총에 관통상을 입어 국가유공자가 된 허선구씨가 있으니까요.

당시 경찰관 신분이었던 허선구씨의 국가유공자 요건 관련 사실 확인서의 상이경위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상기인(허선구)은 '49, 9, 5일경 홍천군 두촌면 소재 가리산 방면에 무장공비(빨치산) 50여 명 부대가 출현하여 홍천군 동면 소재 공작산으로 이동중이라는 제보에 의거 1949. 9. 6. 12:00 홍천서 기동대 1개 중대 병력이 출동하여 공작산 8부 능선 일대를 수색 작전 중에 이미 음거 잠복중이던 공비에게 사전에 발견되어 1949. 9. 7 18:00경 집중 사격을 받아 죄 하퇴부 광통상을 당함.

어쨌거나 지금 생존해 있는 홍승준 어른은 당시 사타구니에 죽창을 찔리면서 음낭이 다쳐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자는 팔순 노인이 자식도 없이 혼자 살아가는 처지의 그 안타까운 사연을 그냥 묻어버릴 수가 없어 이 글을 써보는 것입니다.

동네일에 솔선하는 조성근(전 홍천군 이장협의회장)씨가 그 동안 홍승준 어른을 비롯하여 그 당시 사건으로 부상을 당하고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어른들의 사연을 국가보훈처 및 대한민국 경찰청, 그리고 국가 고충처리위원회와 과거사 정리 위원회로 몇 차례 보내면서 당시 부상자들에게 국가유공자 상이군경의 자격을 주어, 월 생활비 및 치료비라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으나 해당 관계자에게 증거자료가 없다는 답변만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홍승준 어른이 치료를 받은 춘천도립병원에는 그 당시 진료 기록이 전혀 없는데, 그 자료를 찾아오라니 글자를 모르는 홍승준 어른을 대신해서 이 일에 나선 조성근씨가 애가 타 있는 현실이 더 안타깝기도 한 것입니다.

조성근(정 이장협의회장)과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홍승원씨 홍승원 씨는 당시 보초 근무에 늦게 나가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조성근(정 이장협의회장)과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홍승원씨 홍승원 씨는 당시 보초 근무에 늦게 나가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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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당시 홍승준 청년과 소속은 다르지만 같이 활동하였던 홍승원 어른을 만나 사건 당시의 상황과 홍승준 어른이 부상을 당한 사실 여부를 들어보았습니다. 홍승원 어른은 그 당시 집에서 보초 근무를 늦게 나가 사고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승준이는 삼베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죽창으로 사타구니를 찔린 것 같아, 춘천에서 한동안 치료를 받고 와서, 성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 맨날 찔룩거리면서 다녔는데. 참 안 됐어. 불쌍해 죽겠어. 그러고도 승준이는 나으니까 전쟁 중에 군대도 다녀왔잖아. 군대 가서 진짜 전쟁을 하고 제대한 거여. 멍청한 거지. 글을 몰라서 그래. 높은 사람이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하는 걸로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대한민국은 선진 복지국가를 향해 발전하고 있습니다. 홍승준 어른 역시 6․ 25 참전 용사로 국가유공자가 되어 월 8만 정도의 생활비를 보조 받고 있습니다. 그 돈 8만원이 홍승준 어른의 수입의 전부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번 일을 한번 생각해보기를 청합니다.

글을 배우지 못한 산골마을 청년 홍승준. 20세 때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라고 지역 방위를 담당하는 청년방위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무장공비에게 죽창으로 찔려 음낭이 다치는 부상을 당함. 그 후 전쟁이 발병했고, 홍승준은 다시 병무청의 소집 명령에 군으로 입대함. 제주도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서부전선에서 전쟁을 치른 후 휴전이 된 후 만기 제대함. 결혼은 했으나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음. 현재 부인은 무료요양소에서 치료 보호 중이며, 홍승준 어른은 노환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운 상황임. 그런데 나라에서는 당시 부상을 당했다는 증거자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유공자 상이군경으로 지정을 하지 않고 있음.

정황과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사람이 있는데, 국가 보훈처는 단 한 번도 현장에 와서 당시 정황 및 부상자들에 대한 면담도 없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답답한 마음입니다.

사건은 있었고, 당시 피해자도 있는데, 글자도 모르는 어른에게 증거 자료를 제출하라고만 말하니 답답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담당 공무원이 찾아와서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사람들에게 증언을 들어보고 증거 자료를 찾아서 합당한 조치를 해줘야 국민을 위한 행정 서비스가 아닌지 생각해보게 하는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일생과 가정이 우리 역사의 비극적 사건으로 비참하게 망가져 있는 현실을, 우리 모두는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말
다음 이야기는 당시 목이 무장공비의 칼로 베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김난수 어른의 이야기를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난수 어른 역시 국가유공자로 선택되지 못한 사연이 정말 안타깝기만 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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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아재양념닭갈비를 가공 판매하는 소설 쓰는 노동자입니다. 두 딸을 키우는 아빠입니다. 서로가 신뢰하는 대한민국의 본래 모습을 찾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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