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박쥐>

<박쥐> ⓒ 모호필름

"언론은 신이 나겠구만."

영화 <박쥐>를 보며, 뱀파이어가 되는 신부 '상현'을 맡은 송강호의 성기가 노출되는 장면이 흐르는 순간, 나는 실소를 흘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에 포털사이트 뉴스홈을 확인해보니 송강호의 성기 노출은 대문짝만하게 보도되고 있었다.

<올드보이>에서 '충격'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근친상간 설정이 생각났다. 이는 박찬욱 영화 특유의 노이즈 마케팅 기법 중 하나임을 유추할 수 있다. 막상 보면 별것 아니지만, 언론이 크게 떠들기 좋아하는 것을 기막히게 선택해 마케팅의 애로사항을 덜어나가는 것이다.

나는 블로그에 올린 '<박쥐> 언론 시사회를 다녀오다, '구원'에 대한 전복'이라는 프리뷰에서 박찬욱 팬그룹이 조롱당할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자, 그렇다면 송강호는 왜 성기를 노출해야 했을까?

<박쥐>의 칸 영화제 진출이 힌트


뱀파이어가 되는 주인공을 굳이 신부로 설정한 점에서 중요한 해답이 있음을 판단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신부를 보수성의 상징으로 인식한다.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수구꼴통'의 이미지가 개입된 캐릭터 중 하나가 신부라는 이야기다.

<친절한 금자씨>를 기억하고, 박찬욱 감독 자체가 정치성이 강한 감독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친절한 금자씨>에서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이미지를 '금자(이영애)'에게 각인시켜 전두환을 이야기했던 그 솜씨를 기억하라는 이야기다. 상현은 절절한 신앙심을 견지하는 신부가 아니다. 그가 태주(김옥빈)에게 했던 말을 돌아보라.

"내가 뱀파이어인 게 뭐가 중요해요. 태주씨, 내가 신부라서 날 좋아했어요? 아니잖아요. 거봐요. 신부라는 건 그냥 직업이잖아요. 그런 거처럼 뱀파이어인 것도 그냥 식성이나 뭐 생활리듬의 문제 같은 거예요."

신부가 그냥 직업이란다. 애초에 그가 신약실험에 자원했던 이유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이유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유럽에서는 신부를 보수성의 상징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상현은 신부가 아니다. 그의 진짜 정체는 다름 아닌 정치인이다. 차마 특정정당의 이름이나 특정정치인의 이름을 거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는 그를 연상시키는 정치인이다.

신약실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성자'로 추앙받는 상현, 결국 그는 부르는 곳이 많아진다. 이름값도 높아진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많이 하게 된다. 이 기도 내용 한번 들어보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고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이것은 병든 이를 위한 기도가 아니다. '자뻑'이다. 하지만 겉만 보자면 숭고하기 이를 데 없다.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입에 발린 이야기하며 자뻑하기 가장 좋아하는 부류는 정치인이다. 신약실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구세주의 이미지가 각인돼 마치 선거유세하듯이 기도하러 다니는 상현, 심지어 그를 위해 피를 내주는 것 같았던 눈 먼 노신부(박인환)도 결국 목적이 있어서 피를 줬던 것이다. 신부들끼리 거래하는 모습 같다. 이게 정치인이 아니고 뭔가?

뱀파이어가 되는 설정과 태주는 상현이라는 정치인의 정체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매개체다. 한국 사회에서 시민들이 흔히 정치인을 욕할 때 주로 쓰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세금이나 축내는 놈들"이다. 피는 곧 세금이다. 피를 빨아먹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인 셈. 상현은 피를 빨아먹고 다닌다. 송강호의 성기 노출은 곧 '정치인 선언', 영화 속 커밍아웃이다. 상현이, 상현의 기적을 바라며 천막을 치던 사람들 틈으로 쳐들어가 강간을 시도했던 것을 기억해보라. 그 장면은 특히나 직접적인 장면이었다.


 <박쥐>의 한 장면

<박쥐>의 한 장면 ⓒ 모호필름


특히나 태주의 경우엔 아주 노골적이다. 환상에 취해 불륜과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 마력에 빠져 사람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환상에 취해 잘못된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그리고 그 잘못된 투표행위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체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유권자라는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는 '보수'라는 이름으로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할 수 있는지를 체감할 수 있는 세상이다.

박찬욱 감독이 특정정당의 당원이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이전 작품들만 고려해봐도 이런 식의 읽기는 쉽다.

송강호 이전에도 최민식이라는 40대 남성배우가 박찬욱 감독의 전작에서 같은 반 친구의 근친상간 사실을 소문내고 다니다가 막상 본인이 근친상간을 하게 되는 역할을, 그리고 유아살해범이라는 나쁜 역할을 도맡았다는 것을 감안해보라.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40대 남성배우는 보수성의 상징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룸살롱에서 여자들 껴안고 놀기 가장 좋아하는 세대로 통한다는 것을 기억하면 흥미진진하다.

유럽의 상징을 빌어 한국사회의 보수성을 비판하는 설정, 즉 <올드보이>의 연장 선상이다. <박쥐>는 칸 영화제에서 다시 한번 상을 타고 싶다는 바람으로 보였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본상 수상에 실패하면서 비공식 부문에서 상 3개 탄 것(상 3개의 내역은 실로 참혹했다. 애초부터 본선엔 가지도 못했고 비공식 부문에서 상 3개를 탄 것이었다. 그중에는 이탈리아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선정해 주는 상도 있었다)을 국내 언론이 '3관왕'이라고 부풀려줬던 치욕을 잊기는 어려웠을테니까(야구로 치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는 마이너 싱글A리그 3개 부문에서 수상한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고나 할까).

<박쥐>를 재미없게 봤더라도 굳이 열 내면 비판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박찬욱 감독의 눈은 저 멀리 칸에 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관객을 고려해 만든 영화가 아닌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정치적 야심은 영화제 본상 수상에 있다. 유럽 영화제에서 상을 타면 한국 관객은 언론을 타고 자연스레 관리된다.


그에게는 이미 '저급화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고급화를 누리는 것 같다는 심리적 만족을 주는 B급 전략'에 호응해 충실한 열혈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룹으로 꾸려져 있으니까. 이 그룹의 핵심은 바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라면 '한국영화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그림 같은 호평을 아끼지 않는 영화평론가들이니 말 다 한 셈이다.

박찬욱 팬 그룹이 조롱당할 위험이란?

<박쥐>를 보며 내가 실소한 장면이 더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상현이 뱀파이어가 되는 무대였던 신약실험장의 이름이 성 엠마뉴엘이었다는 것이었다. 엠마뉴엘이라는 이름은 태주와의 만남을 암시한다. 신부와 친구의 아내의 불륜, 즉 정치인과 불량유권자의 협잡을 암시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엠마뉴엘>을 기억하라. 하필이면 칸 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의 유명 에로영화다. 실비아 크리스텔을 섹스심벌로 부각시킨 그 영화다.

<엠마뉴엘>은 점잔 빼는 상류사회의 여인네들이 성에 눈을 떠 포르노 행각을 벌이는 내용의 영화다. 태주, 그는 시어머니 라 여사(김해숙)에 의해 며느리로 사육당했다. <엠마뉴엘>도 결국 점잔 빼도록 사육당하는 상류사회 여인네가 성에 눈을 떠 포르노 행각을 벌인다는 내용을 견지한다. <박쥐>는 거기서 그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다. 절대로 여성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신부와 바람이 났으니 말이다.



 <엠마뉴엘>

<엠마뉴엘> ⓒ 우리엔터테인먼트


<박쥐>는 한편으로, 태주의 억눌린 리비도를 담은 영화다. 유권자들이 정치인을 통해 지역사회의 이기적인 욕구를 해소하려 하듯이, 태주도 '구원의 상징'인 신부를 통해 자신의 억눌린 성 욕구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구원의 상징'을 여지없이 조롱하는 셈이다.

그래서 프리뷰에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지켜보며 구원을 말했던 사람들이 조롱당할 위험"을 언급한 것이다. 스포일러를 노출하지 않는 선에서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조언을 남긴 셈이다. 자신이 추앙하던 대상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조롱한다는 것을 끝까지 모른다면, 그 얼마나 안쓰러운 일인가.

물론 그 조언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쥐>에서도 구원을 언급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자살이 구원이라는 것일까? 미안하지만, 그것은 뱀파이어로서 맞는 육체적 죽음이기도 했지만, '정치적 파멸'이기도 했다. 유권자가 환상에 빠져 투표 잘못하면 파멸한다는 암시이기도 했지만, 팬의 입맛에 맞출 경우에 나 박찬욱도 파멸할 위험이 있다는 자전적인 결말이기도 하다. 박찬욱이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암시하는 결말인 셈이다.

하지만 그 자전적인 결말의 시효는 지난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의 박찬욱 팬은 여전히 박찬욱의 영화를 비판하면 "수준낮다"를 부르짖는 위험을 견지하고 있다. 박찬욱이라는 이름 자체가 섹티스트(분파주의자)로 굳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 영화 장르에서 수준 운운하며 반대의견을 묵살하려 드는 자체가 폭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박찬욱 감독은 이미 <올드보이>의 대박과 <친절한 금자씨>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등을 통해 충실한 팬 그룹을 만들어가면서 '섹티스트' 반열에 올라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저들을 어떻게 구원해야 하느냐'며 골몰하지만, 그들이 없으면 밑천이 바닥나는 사람이야말로 섹티스트다.

<박쥐>를 혹평하는 이유

소재를 찾아내는 천부적인 감각, 자신의 영화에 대한 반응의 판을 키우는 천재적인 관리능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개인적으로는 비호감이다. <박쥐> 역시 마찬가지다.

일단, 그는 영화감독으로서는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에 있어서는 낙제다. 뭔가 난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자신의 팬그룹의 지적 충만감을 제공하며 충성도를 굳혀놓는 것이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는 좋을 줄은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영상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영화감독으로서는 낙제일 수밖에 없다. 때때로 이야기가 늘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낙제의 이유 중 하나다.

게다가, 박찬욱 감독은 본인의 나르시시즘을 영화에 지나치게 투영시킨다. 그 나르시시즘의 내용은 대부분 정치적인 것이다. 암묵적으로 정치를 이야기하면서, 장기적으로는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위하련다는 뉘앙스가 지나치게 풍겨져나오는 것이다.

<올드보이>가 칸 영화제에서 대박을 친 이유도, 평론가 우습게 알기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구미에 맞는 '평론가 엿 먹이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올드보이> 속 교활했던 장치 중 하나는 특정영화의 이야기 전개를 절정 부분까지 끌고 감으로써 평론가들이 그것을 알면서도 거론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야심이 영화 그 자체에 비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발상했던 것이 B급영화 발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저급화를 거론하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팬 그룹을 독보적으로 굳혀놓아 영향력 향상에 활용했던 수법을 한국식으로 차용한 것이다. 한국에는 해외영화제 수상이라면 알아서 띄워주는 언론이 있다. 한국의 현실에 잘 맞는 전략인 셈이다.



 <박쥐>의 한 장면

<박쥐>의 한 장면 ⓒ 박형준


<박쥐>도 다르지 않다. <박쥐>는 박찬욱 감독의 역대 개봉작 중 이런 요소들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친절한 금자씨>의 베니스영화제 진출 당시 희대의 '3관왕' 사태에 이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신통치 않은 결과가 어느 정도는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찬욱 감독, 차기작에서는 어떻게 보일까? '조급증'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관점이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미디어다음 블로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박쥐 박찬욱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