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작년 서울 교육감 선거에서 다른 지역에서는 대부분 진 공정택 후보가 강남·서초·송파의 몰표로 당선되는 걸 보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이 나라가 '강남 3구' 마음대로 움직일 것 같더라. 그래서 약속 다 미루고 칼퇴근해서 투표를 했다."

 

수원의 한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아무개씨는 잘 나가는 '화이트 칼라'다. 초등학교 4학년과 유치원에 다니는 두 딸은 무리 없이 잘 자라고 있다. 펀드는 반토막 났지만 남들처럼 부채가 없기 때문에 큰 타격은 입지 않았다. 통장에는 다달이 회사에서 넣어주는 월급이 찍힌다.

 

김씨는 지난 대선에서 "별 고민 없이"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다. 작년 총선 때도 "여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한나라당 후보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는 "경기도민으로서, 그리고 두 딸을 생각해서" 진보 진영으로 분류되는 김상곤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그가 당선될 것이란 기대는 품지 않았다. 하지만 8일 밤 김 후보의 당선 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이 성공해야 국민들도 편안할 것이란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정부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너무 막나가고 있다"며 "이쯤에서 국민들이 브레이크를 걸어주지 않으면 나는 물론이고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이 참 비참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김상곤 후보가 당선되는 걸 보니까, 오랜만에 가슴에서 뭔가 꿈틀 거리는 게 느껴지더라"며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는데, 그만큼 내가 오랫동안 착각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고 밝혔다.

 

경기도교육감 선거 결과 하나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곧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란 기대는 한 마디로 '오버'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주는 충격이 큰 건 사실이다. 게다가 야권에서 '이명박 심판'을 내걸고 벼르고 있는 4·29재보선이 코앞이다. 경기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산다'고 하는 수원 영통, 성남 분당, 안양 평촌, 그리고 고양 일산을 다녀왔다.

 

['경기도의 강남' 분당] "어차피 서울로 진출할 건데" vs "심판할 건 해야지"

 

"서울 강남이 코앞 아닌가. 여기 사람들 서울 강남에 비해 결코 못살지 않는다. 뭔가 아니다 싶으면 아이들 강남으로 전학시키면 된다. 그런 건 일도 아니다."

 

성남 분당구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박(39)씨는 이건 선거 결과가 다소 불만인 듯했다. 뚜렷한 이유는 대지 않았다. "다시 전교조가 판치면 우리 교육이 더 혼란해지지 않겠냐"는 게 박씨의 걱정이었다.

 

박씨는 "나도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만약에 학교에서 공부를 안 시켜 내 아들이 서울 애들한테 뒤처진다 싶으면 바로 전학을 보낼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성남 분당은 '경기도의 강남'으로 불린다. 강남과 인접하고 있기도 하지만, 부유층이 많이 모여 산다. 그동안 표심도 강남처럼 '계급투표' 성향이 짙었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61.5%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동영 후보는 고작 16.9% 지지를 획득했을 뿐이다. 18대 총선에서도 한나라당 후보 고흥길(64.7%), 임태희(71.1%) 후보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현 교육감 김진춘 후보가 38.90%의 지지를 받아 1위를 기록했지만, 김상곤(37.65%)에 비해 고작 500여 표 앞섰을 뿐이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 비하면 격차가 확연히 줄었다.

 

경기도, 공정택의 서울 포위했네

한 마디로 공정택 교육감의 서울이 포위된 형국이다.

 

이번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로 분류되는 김상곤 후보는 서울을 둘러싼 모든 수도권 위성도시에서 승리했다. 이에 반해 보수로 분류되는 현 교육감인 김진춘 후보는 평택, 안성, 가평, 양평 등 경기도 외곽에서 승리했다.

 

김상곤 후보는 44개 선거구에 중 27곳에서 1위를 차지했다. 수원, 고양, 성남, 안양, 과천, 부천 등 유권자가 많은 '알짜배기' 선거구에서 모두 승리했다.

 

이는 2008년 서울시교육감 선거와 상반된 결과다. 당시 진보 진영의 주경복 후보는 공정택 후보(8개구)보다 훨씬 많은 17개 구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공정택 후보는 강남, 서초, 송파 이른바 '강남 3구'에서 몰표를 받아 손쉽게 역전했다.

 

현재 정치권은 이번 경기도 교육감 선거 결과가 4.29 재보선과 내년 지방선거로 이어질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결과에 대해 주부 김영미(40)씨는 "선거 결과에 놀라긴 했는데, 알고 보면 주변 학부모들의 걱정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며 "현 정부 출범 뒤 영어 몰입교육, 일제고사, 교사 해직, 대입 자율화 등 교육 분야가 가장 시끄러웠는데, 이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영춘(51)씨 역시 "우리 아이들은 이미 다 커서 교육감 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쪽이 좀 살고 한나라당 지지가 높은 지역이지만 심판할 건 해야 한다"며 "이왕 이렇게 됐으니 경기도 교육은 서울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분당에서는 '대선에서 몰표주고, 총선에서 싹쓸이 시켜줬는데 도대체 이 정부가 잘 한 게 뭐가 있냐'는 불만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며 "부동산 거품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높아지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이번 교육감 선거 표로 나온 것 같다"고 밝혔다. 

 

[안양 평촌의 학원들] "설마 있는 특목고 없애겠어? 별로 달라질 것 없다"

 

"김상곤 당선인 할아버지가 와도 변하는 거 없어요. 두고 보세요. 뭐 노무현 정부 때는 사교육 없었나요?"

 

안양시 평촌에서 고교 입시 학원을 운영하는 장모 원장은 확신했다. 그는 "사교육 시장은 계속 완만하게 커왔기 때문에 교육감이 바뀌었다고 그 흐름이 꺾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오히려 장 원장은 "이쪽에서는 김상곤 당선인을 반기는 사람도 많다"며 "공교육 정상화 시키고 0교시, 야간 자율학습 없애면 학원들은 아이들 모집하기 훨씬 쉽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김 당선인은 특목고 추가 설치 반대였지, 현재 존재하는 특목고를 없애겠다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안양은 1990년대까지 고교 비평준화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입시 교육열이 높았던 지역이다. 평준화가 실시됐어도 안양외고와 함께 인근에 과천외고가 있어 여전히 고교 입시 경쟁이 치열하고, 사교육 시장도 많이 형성돼 있다.

 

A학원 이모 원장은 "진보 진영 후보가 당선되면 사교육 업계가 타격을 입을 것이란 예측은 잘못된 견해"라며 "당장 나조차도 김상곤 후보를 찍었다, 이제는 공교육과 사교육이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쪽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원장은 "대통령이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는 게 없는데, 교육감 달라졌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겠냐"며 "사교육 업계는 크게 손해 보는 것도 없고, 이득 보는 것도 없다"고 밝혔다.

 

또 이 원장은 "학부모들 중에는 이번에 꼭 무슨 복수라도 하듯이 투표에 참여한 분들이 많았는데, 우리 학원을 보면 많이 배우고 재산 좀 있는 분들이 그런 성향을 보였다"며 "학부모들 분위기가 '이명박 교육은 안돼' 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산의 학생들] "교육감 뽑는데, 왜 학생들은 투표권이 없나"

 

"일제고사 확 없애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좀 그만 구박하고 급식 좀 맛있게 해줄 수 없어요?"

"학교에 소녀시대나 빅뱅 한번 불러주세요!"

 

일산 B중학교 학생들은 두 가지를 당부했다. 일제고사 폐지와 급식 개선이었다. "학교에 그룹 '빅뱅' 좀 불러 달라"는 의견도 있었다. 역시 중학교 2학년들은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니 보수니, 그리고 '반MB'냐 아니냐 등에 관심이 없었다. 학생들은 지극히 자신들의 생활에 맞는 이야기를 했다.

 

일산 ㄷ중학교 3학년 김모양은 "작년부터 시험부담이 확실히 늘었고, 학교에서도 '다른 학교랑 비교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며 "우리도 인터넷에서 어른들과 똑같은 정보를 접하기 때문에 일제고사 문제점을 모두 아는데, 이젠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등학생들의 의견은 좀 더 구체적이었다. 일산 ㅂ고등학교 2학년 최모군은 "교육감이 바뀐다고 뭔가 변할 것이란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다만 학교가 학생들을 평등한 대화상대로 여겨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친구 박모군 역시 "학교는 교육의 주체는 학생, 학부모, 교사라고 가르치는데 왜 우리에게는 교육감 투표권이 없느냐"며 "학생들에게 투표권만 줘도 교육 문제는 쉽게 풀릴 텐데, 왜 그런 고민은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어 박군은 "과거에도 그랬겠지만, 학생들은 언제나 '들러리'에 불과했다"며 "우리 이야기를 들어야 문제를 풀 수 있을 텐데, 교육 당국은 늘 학부모와 학교 이야기만 청취한다"고 꼬집었다.


태그:#경기도교육감, #김상곤, #김진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