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전혀 못 받을 것 같았던 것(돈)을 그나마 기자님 덕분에 받게 되었네요."

 

전화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안도감과 피곤함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직원의 실수로 물품대금을 잘못 송금했다가, 국민은행으로부터 돈을 돌려받지 못해 어려움을 호소했던 타임시스템의 최광일 이사였다.

 

최근 국민은행이 입장을 바꿔서, 잘못 입금된 돈의 절반 이상을 되돌려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최 이사는 기자에게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반액 조정,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나마 다행"

 

타임시스템은 대전에서 컴퓨터시스템을 납품하는 직원 20여 명 규모의 중소업체다. 그런데 지난 2007년 3월 한 직원이 물품대금 약 3000만 원을 이름이 비슷한 다른 업체에 잘못 송금하는 실수를 했다. 이 업체는 즉시 은행에 '오입금'임을 통보하고 반환을 요구했다.

 

문제는 돈이 입금된 계좌가 은행에 압류돼 있었고, 계좌 주인은 부도를 낸 뒤 행방을 감춘 것이다. 은행은 "계좌 주인이 나타나서 오입금임을 증명하지 않는 한, 돈을 돌려줄 수 없다"며 잘못 입금된 돈을 가져갔고, 이 업체는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최광일 이사에 따르면, <오마이뉴스>를 비롯해 일부 언론이 이 업체의 딱한 사정을 기사화 하면서 논란이 일자, 국민은행이 태도를 바꿨다고 한다. 법원에 중재를 자청했고, 지난달 27일 '오입금의 절반을 4월 30일까지 업체에게 지급하라'는 법원의 강제조정안을 수용했다. (☞ [관련기사] A기업 갈 돈 3000만 원 B기업으로 송금... 국민은행 "억울하겠지만, 못 돌려준다")

 

국민은행측은 <오마이뉴스> 기자에게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은행은 업무처리 규정을 지킬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법리를 따지자면 (돈을) 돌려줄 의무는 없지만, 법원의 중재안도 있고, 고객의 입장에서 판단을 했다"고 밝혔다.

 

비록 돈을 모두 돌려받지는 못했지만, 타임시스템도 법원의 조정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최 이사는 "판결 내용이 많이 서운하고 아쉽다"면서도 "끝까지 (소송을) 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이전 대법원 판례도 있기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한 것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사실 법원의 조정안이나 국민은행의 태도 변화는 전향적인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국민은행이 끝까지 "법대로 하자"고 밀어붙였다면 법원도 국민은행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계좌번호를 잘못 입력해 엉뚱한 계좌로 돈이 이체됐더라도 입금의 효력은 유효하며, 은행이 송금의뢰인에게 돈을 돌려줄 책임이 없다"는 대법원 판례(2007년 12월) 때문이다.

 

돈을 잘못 송금한 사람은 은행이 아니라 계좌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라는 것이다. 이 판례대로라면 타임시스템의 경우처럼 잘못 입금된 계좌 주인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돈을 전부 날릴 수밖에 없다.

 

기자는 대법원의 판례에도 불구하고 이 업체가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공정거래위, 금융감독위, 소비자원 등 여러 기관 상대로 취재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기자가 쓴 타임시스템 관련 기사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국민은행의 처신을 비판하는 댓글을 달았지만, 일부 독자는 기자의 관점을 혹독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ID '봄빛깔'은 "타임시스템 입장에서는 자기 직원의 과실로 돈을 잃게 되니까, 이런 저런 하소연의 글도 올리고 소송도 하는 것인데, 그런 입장을 십분 이해할 수는 있다"면서 "하지만 <오마이뉴스>나 소속 기자의 보도 태도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과실이 있는 쪽에 대해 동정론을 유발하는 조의 기사를 써서 마치 은행이 야비한 집단인 양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이해 당사자가 감정에 호소하여 자기 주장을 펴는 사건일수록 기자나 언론사는 감정에 흔들림 없이 사실과 조리에 입각하여 중립적으로 보도하여야 한다."

 

맞는 말이다. 기자는 "감정에 흔들림 없이" 객관적 사실을 취재해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기자는 '판사'가 아니다. 객관적 사실에 앞서 존재하는 '진실'을 쫓아야 한다.

 

"억울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과 '진실'은 다른 문제다. 국민은행은 타임시스템이 잘못 송금한 돈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법원이 조정안을 낸 것이나, 국민은행이 입장을 바꿔 이를 수용한 것이나, 모두 '진실'에 근거한 조치인 셈이다.

 

"잘못 받은 사람도 아니라는데, 못 돌려 주겠다니..."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런 사례가 타임시스템 외에도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객관적 사실'에 부딪혀 처음부터 돈을 돌려받기를 포기하거나 영영 돌려받지 못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타임시스템 관련 기사가 나간 뒤 비슷한 사례에 대한 제보가 적지 않게 들어왔다. 서울에서 유통업을 하고 있는 윤영귀씨는 아예 소송조차 포기한 경우였다.

 

"유통업체는 규모가 작아 상호명이 똑같은 경우가 많다. 3년 전 물품대금 500만 원을 보낸다는 것이 그만, 부도가 난 똑같은 이름의 다른 업체에 보내는 실수를 했다. 은행에 사정을 얘기했지만 못 돌려주겠다고 했다. 소송을 해보려고 했지만, 비용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겠더라. 결국 돌려받는 것을 포기했다."

 

타임시스템이나 윤영귀씨 등은 잘못 입금된 계좌의 주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던 경우다. 하지만 정근호 '준 트레이드' 대표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정 대표는 지난 2006년 1월 남성용 가죽의류 552벌(U$ 37,275.60 상당)을 미국에 있는 한 회사로 수출했다. 그러나 1개월 후, 물품대금을 기다리던 정 대표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미국 회사 직원의 실수로 물품대금을 'M'이라는 국내 다른 업체의 우리은행 계좌로 보냈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우리은행에 사정을 설명하고, 돈을 돌려받기 위해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다. 특히 정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M'업체 대표이사로부터 "돈이 잘못 입금되었다"는 확인서는 물론, 미국 업체 은행측으로부터 "잘못 송금했다"는 확인서까지 받아서 우리은행에 제출했다. 그러나 우리은행은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정 대표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우리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우리은행측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준 트레이드'는 (돈을 잘못 송금한) 미국 업체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지, 우리에게 달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이미 법원에서 1차 판결이 난 이상 은행과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근호 대표는 "답답하다"며 가슴을 쳤다. 그는 "미국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하면 당연히 승소를 하겠지만, 비싼 변호사 비용 등으로 절반 이상을 떼어줘야 한다"며 "전체 5000만 원 가까운 대금 중에서 채 2000만 원도 못 받게 될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오입금이 분명한 만큼 우리은행이 돈을 돌려주면 되는데, 법과 상식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초 국민은행은 절반이나마 타임시스템에 돈을 돌려준 것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에 대해 적잖이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자칫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일각에서는 국민은행의 이번 조치가 일부 '몰지각한' 고객들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국민은행이 '진실'을 인정한 것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낼 만하다. 우리은행이 '좋은 선례'로 따라 배울 만하다는 것이다. 서민들의 소매금융으로 지금의 입지를 구축한 우리은행이 언제까지 법 운운하며 '객관적 사실'만을 앞세울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태그:#국민은행, #우리은행, #오입금, #타임시스템, #대법원 판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