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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살 권리,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 중요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 막연하다. 좋은 얘기 같지만 와 닿지는 않는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던 사람들도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곳", "하는 일 없이 이름만 있는 기구"라고 여겼고, 무슨 일을 하는지 큰 관심도 없었다. 국가인권위 자체를 잘 모르다가 주변 사람들의 권고로 진정을 낸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국가인권위를 찾아간 것은 억울함을 하소연할 만한 다른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찰을 찾아가자니 사정은 급한데 소송 기간이 너무 길었다. 민간단체나 기업 안에서 이뤄진 차별은 공권력으로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군대나 검찰에 의한 인권침해는 민간인의 접근 자체가 어려울뿐더러 맞서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들은 "그나마 국가인권위는 국가기관이라도 정치적 입장에 치우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던 것. 검찰에 끌려가 구타당하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던 A씨는 "국가인권위가 없었다면 내 사건은 그대로 묻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정인들은 오히려 "강제성 없는 권고가 문제"

 

그러나 불만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국가인권위 권고가 강제성이 없어서 실효성이 없다는 것.

 

실제 2001년 11월 국가인권위 설립 첫날 양지운씨가 진정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8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국가인권위는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구금시설 내 여호와의증인 종교집회를 허용하라"고 권고했지만 법무부는 "수용불가" 입장을 밝히다가 2003년 7월에야 이를 받아들였다.

 

서울YMCA도 "여성회원 참정권을 허용하라"는 국가인권위 시정권고를 이행하지 않았다. 민간단체 자율에 맡길 문제라는 이유에서다. 결국 진정인 김성희씨 등은 민사소송을 벌였고 최근 서울고등법원은 서울YMCA에 "3억8000만 원을 손해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외에도 진정인들은 "인력부족으로 진정처리 속도가 늦고 인권교육 프로그램이 미비하다", "지역사무소가 없어 지방에서는 불편이 크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모두 국가인권위 21% 조직축소를 주장한 행정안전부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내용이다.

 

당연히 이들이 바라는 것은 국가인권위 조직 및 기능 확대다. 특히 국가인권위 진정을 근거로 법정 소송을 벌이는 경우, 재판에도 악영향이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행정소송 중인 김병훈씨는 "아무래도 판사가 국가인권위 권고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겠냐"면서 "직접 겪어보니까, 잘 살든 못 살든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국가인권위가 필요해지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호소했다.

 

다음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사무관이 펴낸 <세상을 향해 어퍼컷>(2008년 8월 발간)에 나온 국가인권위 진정·제소 및 인권교육 사례.

 

"촛불집회 조사도 오래 걸렸는데 더 느려지나"

 

최영우/ 2008년 5월 22일 학교의 촛불집회 참여 방해에 대해 긴급구제 신청.

국가인권위, 다음날인 5월 23일 "촛불집회 피해사례 조사키로 결정" 발표

 

"원래는 국가인권위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하는 일 없이 이름만 있는 기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정을 낸 것만으로도 변화가 오더라. 학교에서 집회 못 나가게 막는 것도 줄었고 현장에 장학사 내보내는 것도 줄었다.

 

그 뒤로 청소년인권 관련된 국가인권위 정책이나 권고를 유심히 봤는데, 사실 아직 미비하다. 사립고등학교에서는 국가인권위가 힘을 못 쓰고 고작 권고밖에 못한다. 게다가 속도도 느리다. 지난해 진정만 해도 (최종 조사가 나오기까지) 꽤 많이 기다렸는데 인력을 줄이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정부는 그동안 국가인권위가 한 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지난해 우리가 낸 진정도 인정하지 않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가면 국가인권위가 독립기구일 수 있나."

"잔소리꾼 인권위? 거북해도 옳은 말엔 귀 열어라"

 

양지운(국가인권위 특별홍보대사)/ 2001년 11월 26일 국가인권위 설립 첫날 '구금시설 내 여호와의증인 종교의 자유 침해' 진정

국가인권위, 2002년 10월 법무부 장관에 '구금시설 내 여호와의증인 수용자 종교집회 허용' 권고. 2005년 12월, 국방부장관 및 국회의장에 대체복무제 도입권고.

 

"국가인권위 출범 첫날, 진정서 내면서 정말 감회가 새롭고, 만감이 교차하더라. 김대중정부 시절이었는데, 당시 김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받으면서 '이 땅엔 이제 양심수가 없다'고 하더라. 1600여명 젊은이들이 양심 때문에 감옥에 갔는데…. 그래서 사실 진정 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그랬는데 국가인권위가 정부에 이 문제를 권고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체복무제 도입정책을) 오락가락하다가 이젠 또 안하겠다는 거 아닌가. 국가정책을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도 되는 것인지. 국가인권위 권고가 강제성 없어서 아쉽다. 국가인권위가 많은 시간을 들이고 조사하고 권고해도 기관이 무시하면 그만이다. 악순환이다.

 

이 나라 인권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 국가인권위가 열심히 인권의 파수꾼 노릇을 하는데, 돈도 더 많이 지원하고 격려해야 한다. 어떤 부서는 국가인권위를 잔소리꾼으로 거북한 단체로 볼 수도 있겠으나, 옳은 것을 옳다고 할 때는 귀를 여는 것이 똑똑하다."

"나혼자? 검찰 통해서?... 군대를 상대로 어떻게 싸우나"

 

김병훈/ 2007년 3월, "취사병 병역과 무관한 농약살포로 림프종암 발병" 진정

국가인권위, 같은해 9월 국방부 장관에게 "병역의무와 무관한 사역 금지" 권고

 

"군대를 상대로 하다보니까,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민간인이 부대 내에 들어갈 수도 없고 군 감찰기구도 군대 편일 것 같았다. 게다가 (투병 중인 상황에서) 한두 달 안에 조사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검찰로 가면 반년씩은 걸린다. 국가인권위가 그나마 독립적으로 국민 편에 설 것 같았다. 조사관들도 평등을 지향하다 보니 권위적이지 않았고 부담도 없었다. 예전에는 어려우신 분들만 위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겪어보니까 잘 살든 못 살든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누구나 국가인권위가 필요해지는 일이 생긴다 싶었다.

 

그러나 국가기관이 중앙에 편중됐다는 것은 아쉬웠다. 부산에 사는데, 진정하거나 조사받으려면 우리가 서울로 가거나 조사관이 부산까지 와야 한다. 그나마 부산에는 지역사무소가 하나 있지만 직원도 부족하다. 아무래도 학력도 계층도 높은 수도권 사람들보다는 지방 사람들이 인권 침해를 많이 당하지 않겠나.

 

특히 걱정되는 것이, 저는 국가인권위 조사결과를 가지고 (보훈처를 상대로) 행정소송 중이다. 아무래도 독립적 국가인권기구의 권위가 약해져서 조사결과까지 위축되지 않을까."

"빼앗긴 내 인생, 이대로 묻힐 뻔 했다"

 

A(익명)/ 2005년 6월 "조사과정에서 검사와 수사관들로부터 구타당해 상해" 제소

국가인권위, 2006년 6월 검사와 검찰 수사관 2명 검찰 고발

 

"나는 내 인생을 빼앗겼다. 오십 나이에 검찰에 강제연행돼서 3박4일 동안 구타당했다. 조사받고 돌아오는데 '나와서 발설하면 다른 죄목으로 구속시킨다'고 하더라. 가족들에게 말도 못하고 병원에 입원했다. 정신착란증으로 눈앞이 뱅뱅 돌아서 신경정신과에도 다녔다. 나는 고발이고 뭐고 치료에 열중했는데, 주변에서 국가인권위에 가보라고 하더라.

 

이런 내용이 그대로 묻힐 뻔 하다가 국가인권위 덕분에 밝혀졌다. 조사관들이 1년이나 걸쳐서 수많은 사건 장소들을 다 확인하고 증인도 일일이 만났다. 국가인권위 축소하려는 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축소방침은) 천부당 만부당하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어두운 곳에서는 나같은 사람이 많지 않겠냐. 어둠 속에서 많이들 울고 있을 것이다."

"학교환경 인권 가이드라인 만들어야 하는데..."

 

이기규/ 인권교육전문위원, 2005년 국가인권위 통합교육 교사연수 실무기획

 

"인권교육은 가시적 효과가 곧장 나오는 게 아니라서 효율성으로 따질 수 없다. 그런데 연구학교를 시작하면 일단 교사들 인권의식이 확 바뀐다. 체벌이나 두발 단속 잘 못한다. 학생들도 자신의 인권은 물론 친구들의 인권도 고민한다. 

 

현재 인권교육도 부족한 부분이 많다. 1년짜리 프로그램이 너무 많고 준비도 부족하다. 문제제기 했지만 인원이 적어서 어쩔 수 없다. 국가인권위 교육팀에서 한 사람이 하 일이 너무 많다. 일일이 학교현장 확인해야 한다. 직접 강의하거나 강사들 데려와야 한다. 교육정책·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한다. 지난해에만 해도 국가인권위가 학교환경 인권 가이드라인를 만들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 조직축소 얘기 나오고 정신없으니까 잘 안 된다. 국가인권위가 축소되면 무늬만 인권교육이 될 가능성이 높다.

 

행정안전부는 국가인권위의 비효율적 부분을 정리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강압적으로 (조직축소를) 처리하는 게 효율적인가. 이 정권이 국가인권위를 싫어해서 확 줄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지금도 국가인권위는 종이호랑이"

 

김성희/ 2003년 1월 서울YMCA 여성 총회 참정권 관련 성차별 진정

국가인권위, 2004년 5월 서울YMCA 이사장에게 '여성회원 총회 의결권 허용' 권고

 

"서울YMCA 성차별 문제로 싸워봤지만, 민간단체라서 국가공권력은 개입을 못했다. 사법부에 신청해도 소송이 기각되고 아무리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나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호소할 수 있는 곳이 국가인권위였다. 독립기관이어서 정치적 개입 없이 판단할 수 있다고 봤다. 국가인권위 시정권고가 시민들에게 이 문제를 알리는 든든한 힘이 됐다.

 

지금의 국가인권위도 종이호랑이다. 강제력이 없다. 단체가 안 받아들이면 제재 못한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조직을 축소하면 국가인권위 권고도 당연히 권위가 줄어든다. 일 처리하는 데도 업무가 가중돼서 진정 처리가 늦어질 게 뻔하다. 그나마 지금 인권위 조사는 사법부보다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앞으로 정치·경제 각 분야에서 진정할 만한 사안들이 늘어날텐데 조직이 왜 줄어드나. 무기만 안 들었지 정부의 폭력이다."

"장애인 인권 8명으로도 어려운 상황"

 

이종국/ 2006년 3월 "경기도 지방직 공무원시험 장애인용 답안지가 없는 것은 차별" 진정

국가인권위, 같은해 6월 경기도에 "시험장에서 장애인 편의조치 제공" 권고

 

"국가인권위 조사관들이 너무 친절했다. 사무적 관계가 아니고 정말 제 일을 자신의 일처럼 관심을 가져주신 태도가 다른 국가공무원과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쉬운 점은 지금 국가기관에서 경고를 내려도 강제성·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인원이 축소되면 진정 처리나 결과에 당연히 영향을 받는다. 특히, 장애인인권 문제를 다루는 지금 조사관은 8명인데, 이들이 진정을 다 처리하기도 힘든 여건이다. 장애인들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많다. 조사관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관심을 기울여야 장애인 인권 관련 사건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새로운 내용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축소하면 그런 조사가 어려워진다. 관심도 줄어들 것이다. 지금도 업무량이 너무 많다."


태그:#국가인권위, #JKCHOI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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