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적은 말한다>
 <필적은 말한다>
ⓒ 중앙북스

관련사진보기

컴퓨터 좌판이 고맙고, 반가운 사람이 있다. 이른바 '악필'이다. "악필은 천재"라는 말도 안 되는 위로해보지만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보면 부러울 수밖에 없다. 어릴 적 동무들끼리, 아닌 마음에 둔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악필은 한으로까지 남아 있다.

악필도 부담스러운데, 글씨가 그 사람 성격과 인격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을 펴낸 이가 있다. 구본준 검사(현 법무연수원 교수)다. 구본준 검사는 <필적은 말한다>에서 '글씨는 뇌의 지문'이라는 필적학의 주장을 바탕으로, 항일 운동가와 친일파의 글씨를 비교분석하고 있다.

구본준은 항일 지사(6백 점)와 친일파(3백 점)을 통하여 왜 어떤 이는 목숨을 바치며 불의에 맞서고, 어떤 이는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좇았는지 그들이 남긴 글씨들을 통하여 살펴보고 있다.

구본준은 항일지사는 절개를 지켰으니 좋은 글씨를 남겼을 것이고, 친일파는 나라를 팔아 먹었으니 나쁜 글씨를 썼을 것이라는 선입관으로 글씨를 단순 평가하지 않았다. 구본준은 조직폭력, 마약, 살인 따위 강력범죄 수사를 20여 년 해오면서 그들이 남겼던 글씨체가 일반인들과 달랐음을 알았다고 한다. 글씨와 인격에 무언가 관련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들(범죄자들)의 글씨는 하나같이 둥글둥글하고, 글씨 크기와 간격도 들쑥날쑥했다. 내용은 온통거짓이도 글씨체까지 꾸며내진 못하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의 필체는 그들의 거짓된 인격이나 기질을 반영하고 있었다."(29쪽)

읽는 이에 따라 약간 부담스러운 생각이 들지만-나 역시 마찬가지-그는 필적은 그 사람 인격을 말한다고 단언하기 까지 한다. 구본준은 항일지사와 친일파가 남긴 간찰(簡札)에 주목했는데 이유는 온 정성을 다 드려 쓰는 서예보다는 선인들의 정신과 생활상을 알 수 있고, 꾸미지 않는 맨 얼굴을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구본준이 항일지사와 친일파 글씨를 분석해 내린 결론은 이렇다.

"항일 운동가의 전형적인 글씨체는 작고, 정사각형 형태로 반듯하며, 유연하지 못하고, 각지고 힘찬 것이 많다. 글자 간격은 좁고, 행 간격은 넓으며, 규칙성이 두드러진다. 반면 친일파의 전형적인 글씨체는 크고, 좁고, 길며, 유연하고, 아래로 길게 뻗치는 경우가 많다. 글자 간격이 넓고, 행 간격은 좁으며, 규칙성은 떨어진다."(93쪽)

그럼 항일과 친일 중 대표적인 사람인 김구 선생과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완용 글씨를 한 번 비교해보자. 돈으로 김구 선생와 을사오적 이완용 글씨를 매긴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재 우리나라 미술시장에서 두 사람의 글씨에 매기는 가치는 130×30㎝ 반절지를 기준으로 백범 김구 선생 글씨는 1000만~1500만원이고, 을사오적 이완용 글씨는 30만~50만원 정도 나간다고 한다. 오직 돈의 가치로만 따져도 30배 차이가 난다.

구본준은 김구 선생 글씨는 웅혼함과 강인, 철옹성 같은 기개, 꾸밈이 없는 천진함이 느껴지고, 언뜻보면 졸렬하고 어눌한 듯하나 자주 대하면 달빛에 매화 향기가 떠다니는 것처럼 은은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하여 이완용은 당대 명필(?) 답게 '잘 썼지'만 꾸밈을 앞세워 가벼움만을 좇는 기운이 사사롭고, 글자 크기, 행 간격이 들쑥날쑥한 것에서는 예측하기 힘든 사람임을 알 수 있다고 평했다.

"소식은 '옛날에 글씨를 논함에 겸하여 그 생평도 논하면서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비록 글씨가 공교하다고 하더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했다. '비록 글씨가 공교하다고 하더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이완용의 글씨가 '세상 사람들이 소중히 생각하고 천년이 가도 썩지 않고, 전해질' 김구 선생의 글씨를 능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113쪽)

김구 선생 글씨
 김구 선생 글씨
ⓒ 중앙북스

관련사진보기

을사오적 이완용 글씨
 을사오적 이완용 글씨
ⓒ 중앙북스

관련사진보기


눈길을 끈 내용은 김구 선생과 이완용 같은 알려진 인물에 대한 글씨체 평가보다는 큰 일을 남겼지만 안중근 의사와 김구 선생만큼 큰 이름을 남기지 않은 자결과 무력으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들 편지글들이었다. 

홍문관, 사헌부, 요직을 거친 이만도는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자 단식으로 자결한다. 이만도 글씨를 "조용하고 엄숙하며 우아한 맛을 풍기며 학식과 인품과 정조가 고방하게 묻어난다"고 구본준은 평했다.

성균관전적, 통훈대부를 지낸 전남 곡성 출신 정재건은 조선을 일제가 병탄하자 망한 나라의 신하로서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다면서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런 그를 "시원시원하고 청량하며, 성정이 고결하고 단아하며, 포용력이 큰 사람임을 보여주는 필체"라고 구본준은 평했다.

자결한 항일지사들의 글씨는 더 반듯하고 더 규칙적이며 상당히 정돈되어 있다. 글자의 선은 곧고 각진 것이 많다. 이들 특징은 일반적인 항일운동가와 다를 바 없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마음먹은 것을 곧 행동에 옮기는 습성, 빠른 결단력, 이것이 속도의 빠름과 관련 있다. -148쪽

또 의병장 양한규의 쌀 한 섬을 빌려 달라는 편지, 의거를 앞두고 가족을 부탁하는 김지섭의 편지,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곽종석의 포고문, 의병장 정경태의 '창의통문', 의병장 유인석이 최익현에게 눈물로 보낸 간찰, 만주 투사 이종혁의 옥중 편지 따위들은 글 내용으로서뿐만 아니라 글씨체를 통해서도 그들이 무엇을 남기고 갔는지 알 수 있게 한다.

<필적은 말한다>는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유명인사들 글씨를 평했는데 책을 닫으면서 문득 든 생각하니 이명박 대통령 필적은 어떻게 평가할지였다. 

덧붙이는 글 | <필적은 말한다> 구본준 지음 ㅣ 중앙북스 펴냄 ㅣ 17,000원



필적은 말한다 - 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

구본진 지음, 중앙books(중앙북스)(2009)


태그:#필적, #항일, #친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