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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이 3일 같은 당 의원 12명과 함께 '민주화운동보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전 의원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가 민주화 운동으로 결정한 사건 가운데 사실 왜곡 소지가 있었는지를 철저히 재심의할 필요가 있다"며 1989년 5·3 동의대 사건을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전 의원은 이 사건을 "진압하러 들어간 경찰관 7명이 학생들에 의해 무참하게 불태워져 처참하게 살해된 극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고, 조중동 등 보수언론들이 그의 주장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사건의 모든 책임을 학생들에게만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이 당시 관련자 및 변호인단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20년 전 동의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오마이뉴스>는 현장 취재 및 20년 전의 기록(법정 진술 및 수사기관 발표문, 국회 속기록, 언론보도 등)을 토대로 4회에 걸쳐 1989년 동의대 사건의 진상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1989년 5월3일 화재가 발생한 동의대 7층 도서관의 모습. 사건 발생 20년이 지났지만, 화재원인이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다.
 1989년 5월3일 화재가 발생한 동의대 7층 도서관의 모습. 사건 발생 20년이 지났지만, 화재원인이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다.
ⓒ 동의대 5·3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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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왜 추락사를 하나? (학생들이)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였거나 화염병으로 몸에 불이 붙었으니 뛰어내렸겠지." (goguli)
"(경찰은) 운동권 학생들이 뿌린 시너로 불타 죽었다. 이제 그 죽음을 추락사라고 우긴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짐승이다." (헌법 제1조)
"아무리 진압 자체가 극단적이었다지만, 학생들이 시너에 불까지 붙이는 행동이 정당한 행동일까요?" (인간으로 살기)


1989년 5·3 동의대 사건으로 순직한 경찰관들의 죽음에는 안전조치를 소홀히 한 경찰의 책임도 있었음을 지적한 기사가 나간 후 일부 독자들의 반응은 이랬다.

직접적인 사인이 소사이든 추락사이든 학생들이 일으킨 화재로 인해 경찰들이 죽음을 당했으니 학생들이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이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 동의대 학생들이 화재 현장에 시너를 뿌리지 않았다면?
▲ 당시 학생이 던진 화염병이 화재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 법원이 화재원인도 밝혀내지 못한 채 학생들이 화재를 일으켰다고 단정 지었다면?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동의대 사건은 앞으로도 계속 논란거리로만 남지 않을까?

쟁점 1 : 학생들은 화재 현장에 시너를 뿌렸나?

1989년 6월 1일 검찰은 "대학생 윤모(전자통신과 2년)씨가 화염과 유독가스로 사람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화염병 1개를 화염병상자 옆에 투척하여 실내바닥에 뿌려진 신나(시너)와 석유를 인화시켰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학생들이 실내에 인화물질을 뿌린 것은 대량화재를 일으켜서라도 경찰의 진입을 막을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검찰도 이 부분을 입증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했다. 검찰은 "조사과정에서 피고인 김모(미술과 4년)씨가 '석유 1통을 세미나실 복도에 뿌렸다'고 자백했고, 오모(철학과 4년)씨도 '그 위에 다시 시너와 석유를 뿌렸다'고 진술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경찰의 학내진입에 대비해 이들을 저지할 목적으로 시너와 석유로 300여 개의 화염병을 제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인화 물질을 바닥에 뿌린 적이 없고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진술을 했다"고 반박했다. 오히려 "미리 준비한 시너량이 화염병을 만들기에도 부족했기 때문에 바닥에 뿌릴 게 없었다"는 게 학생들의 주장이었다.

검찰이 목격자로 내세운 이모(일문과 1년)씨 등 3명도 하나같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기소 내용을 부인했다. 특히 시너를 뿌린 장본인으로 지목된 오씨에게 검찰이 사형을 구형하자 이씨는 그해 9월 28일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오OO 선배님이 사형을 당한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다. 아니, 내가 오 선배님을 죽이는 것과 같다. 경찰에서 조사받으면서 특수부대 출신 조사관이 들고 있던 전자봉이 무서웠다. 매 한 대 덜 맞으려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오 선배가 세미나실에서 기름을 붓는 것을 보았다고 허위 자백했다. 그 선배에게 사형이 구형됐으니 내게 살인미수죄를 추가해 달라."

경찰을 죽일 목적으로 석유를 뿌린 사람으로 지목된 김모씨를 포함한 구속자 상당수도 "조사과정에서 '찐방고문'을 당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찐방고문'은 꿇어앉은 상태에서 고문을 가하는 사람이 상대방 등을 무릎으로 찍어누르면서 뒤로 꺾인 양팔을 힘껏 잡아당기는 것으로, 1980년대에 흔히 사용됐던 고문기법이었다.

최모(경영학과 2년)씨는 "창틀에 매달린 경찰의 손목을 각목으로 때려 떨어지게 한 놈이 누구냐?"는 허위진술을 강요받다가 이를 부인하자 진모 등 경찰관 3명으로부터 무차별 구타 및 손가락 꺾기 등의 고문을 받은 뒤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처음 조사를 받을 때는 스스로 저지른 행위를 자랑스럽게 진술했으나 차츰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법정에서는 고문을 얘기한다"며 이들의 주장을 묵살했다.

법원, '찐방고문' 등 허위자백 주장 묵살

 1989년 10월경 부산진경찰서 양모 형사가 구치소에 함께 수감된 동의대생 오모씨에게 건네준 자술서
 1989년 10월경 부산진경찰서 양모 형사가 구치소에 함께 수감된 동의대생 오모씨에게 건네준 자술서
ⓒ 동의대 5·3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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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재판이 끝난 후에는 오씨를 조사과정에서 구타한 사실을 인정한 강력반 형사의 자술서가 나왔지만, 이 또한 2·3심 재판에서 큰 변수가 되지 못했다.

동의대 사건 당시 부산진경찰서 강력반에 근무했다가 나중에 마약사건으로 부산구치소에 수감된 양OO 형사는 오씨에게 준 자술서에서 "당시 조사요령은 미리 검찰(경찰)에서 조사설문서(문답형식)를 작성 배포한 데 따라 그 항목대로 조사했을 뿐이고 저 개인적으로 임의로 조사한 사항은 아님을 참고해 달라"며 사죄의 뜻을 표시했다.

법무부가 가혹행위 등을 통해 얻어낸 자백의 증거가치를 완전 무효화하는 내용의 '고문방지 특별규칙'을 제정한 것은 2002년 11월 '서울지검 피의자 폭행 사망사건' 이후의 일이다.

또 한 가지, 검찰의 수사내용과 달리 현장에 진입했던 전경들은 법정에서 학생들에게 유리한 진술들을 많이 했지만 법원은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당시 세미나실 복도 바닥에는 학생들이 소화호스를 설치하려다가 실수로 흘린 물이 다량 흘러 있었고, 쓰레기통과 주변의 모든 빈 통은 전부 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주장했다. 화재현장에 있던 경찰들도 수사과정에서는 "바닥에 기름이 깔려 있었다"고 말했다가 법정에서는 차례차례 말을 뒤집었다.

검찰 조사과정에서 "복도에 깔린 기름을 확인했으며, 그로 인해 미끄러질 뻔했다"고 말한 김OO 소대장은 법정에서는 "느낀 적이 없다"고 번복했다. 판사가 "왜 말이 달라졌냐"고 묻자 그는 "기름 때문에 미끄러질 뻔했다는 것은 4~5층 계단에서 부하 하나가 넘어질 뻔한 것을 붙잡아 준 적이 있다는 것이 잘못 전달된 것"이라며 "검찰 조사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다른 경찰들도 다음과 같이 법정에서 증언했다.

김OO 순경 "군화를 신고 갔었는데 미끄럽거나 물기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심OO 상경 "(경찰에) 물기가 있었다고 진술하였을 뿐 '신나가 뿌려져 있었다'고 얘기한 적은 없다."
진OO 상경 "바닥에 기름이나 습기가 있는 것을 못 봤지만 나중에 병원에 누워 있을 때 '기름이 없었다면 불이 탈 수 있겠냐'는 추측에 의해 경찰에 '기름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당시 검경합동수사본부장은 사건 발생 이틀만에 "밀폐된 실내에서 인화물질을 뿌려놓고 불을 지를 경우 경찰관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서도 방화한 것은 고의성이 인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관들의 법정진술은 검찰이 처음부터 학생들을 방화범으로 몰기위한 '짜맞추기 수사'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았다.

동의대 사건의 2심 재판부는 1990년 2월 21일 선고공판에서 결국 "세미나실 복도 바닥에 시너는 없었다"고 판시했다.

쟁점 2 : 화재 원인이 학생이 던진 화염병이었나?

 89년 동의대사건 당시 법원판결에 항의하고 있는 구속학생 부모들의 모습
 89년 동의대사건 당시 법원판결에 항의하고 있는 구속학생 부모들의 모습
ⓒ 동의대 5·3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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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대도서관 7층에서 일어난 화재는 사건의 핵심 쟁점이었다.

그러나 화재 원인은 재판과정에서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심지어 1심과 2심 재판부가 화인을 각각 다르게 판정하는 일까지 있었다.

방화범으로 지목된 학생들이 여전히 "법원과 검찰이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불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검찰은 "대학생 윤모씨가 경찰 선발대 이모씨가 7층 세미나실 복도 안에 들어오자 화염병 1개를 화염병상자 옆에 투척하여 신나와 석유를 인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윤씨도 화염병을 던진 사실은 인정했지만, 윤씨의 화염병이 화재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경찰이 진입한 지 적어도 5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 큰 폭발음과 함께 화재가 발생했지만 윤씨가 던진 화염병은 곧바로 꺼짐으로써 화재와 관련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OO 순경 (7층 화염병을 처음 목격) "윤씨가 던진 화염병은 평범한 불이었으며 보통보다는 규모가 작았다."
김OO 순경 (그 다음으로 불 목격) "불이 군데군데 있었으며 불의 높이가 30~40cm정도였으며 일부는 꺼져가고 일부는 살아나는 듯했다."
박OO 경장 등 4명 "세미나실에 들어갔을 때, 화염병 불은 거의 꺼져서 주먹만한 불 2~3개가 떨어져서 스멀스멀 타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곧 꺼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경찰들의 증언에 불구하고 검찰은 "윤씨가 던진 화염병이 폭발해 대형참사가 일어났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1심 재판부는 그해 9월 28일 선고 공판에서 "당시 김OO 순경이 뿌린 소화기의 분사 압력으로 불길이 근처에 괴어 있던 석유와 화염병 천 조각 등에 옮겨 붙었다"는 '전혀 새로운 결론'을 내렸다.

"소화기 분사로 불길 옮겨 붙었다" 1심 판결 검증해보니...

그러나 재판부의 '화인' 판단은 경찰조차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부산시경은 같은 해 10월 27일 "불꽃이 분말액이 소진된 소화기의 분사 압력에 밀려가 화재가 발생하는 일은 없다"고 반박했고, 이듬해 1월 16일 부산고등법원 소각장에서 현장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소화기로 분사압력이 실제로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 실시됐다.

실험 결과, 소화기에서는 헛바람이 나오지 않았고 불에 탄 신문지가 화염병 쪽으로 밀리지도 않았다. "타다 남은 화염병 불길이 소화기 분사에 의해 석유로 옮겨 붙는 바람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는 1심 재판부의 판단이 근거 없는 추론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해가 바뀌며 법정은 화인 공방으로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여론의 관심은 이미 식을 대로 식은 상태였다. 1990년 2월 21일 선고에서 2심 재판부는 '유증기 현상에 의한 급속 발염'이라는 새로운 화인을 제시했다.

"화염병 심지의 불꽃으로 예열 조건을 갖춘 석유 표면에 다량의 유증기가 발생하고 여기에 불이 옮겨 붙어 급속 발염에 의한 대형화재가 일어났다"는 검찰 공소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도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다.

유증기가 발생했다는 것은 유류가 증발해 기체처럼 떠다녔다는 얘기인데, 전문가들은 석유에서 유증기가 발생하여 화재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섭씨 30도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화재가 발생한 당일 새벽 5시의 온도는 14.5도. 봄기운이 물씬한 5월에 일어난 화재라지만, 유증기가 발생하기에는 턱없이 낮은 기온이었다.

지난 1월 용산 철거민 참사의 화인이 논란이 될 때 검찰이 유증기 이론을 묵살한 이유도 "유증기로 인한 화재로 단정하기에는 아침 기온이 너무 낮았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비슷한 조건으로 발생한 두 사건에 대해 검찰은 상이한  판단을 내렸고, 동의대 사건의 2심 재판부는 검찰의 유증기 이론을 그대로 수용했다.

설령 화염병이 화인이었다고 해도 거의 모든 연행학생들을 공동정범으로 기소한 검찰과 이를 그대로 수용한 법원 판결은 화재와 무관한 사람들까지 전과자로 만들었다.

법원은 연행자 90명 중 77명(30명 형 확정, 47명 집행유예)에게 유죄를 선고했는데, 폭력 및 집시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3명을 제외한 74명이 현존건조물방화치사상 또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 혐의를 적용받았다.

검찰 수사과정에서는 (비록 그것이 허위자백이었다고 해도) 도서관 7층에 석유와 시너를 뿌린 사람, 그 위에 화염병을 던진 사람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지시한 사람이 4~5명으로 압축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7층 화재와 무관하게 건물 바깥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거나 제조하고 농성에 참여한 학생들까지 마구잡이로 형사처벌을 한 셈이다.

범죄행위자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사건의 공동책임을 포괄적으로 묻는 이른바 '공동정범' 이론은 지난달 9일 용산 철거민 참사와 관련해 망루 농성자 20명을 기소한 검찰에 의해 '죽지 않은 이론'임이 입증됐다.

쟁점 3 : 화인감정서 공개 기피한 경찰... 왜?

 동의대사건의 화인감정서를 공개하지 않은 수사기관을 비판한 <한겨레신문>의 당시 만평.
 동의대사건의 화인감정서를 공개하지 않은 수사기관을 비판한 <한겨레신문>의 당시 만평.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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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원인이 미궁으로 빠진 것은 검찰과 경찰, 법원에 모두 책임이 있다.

재판 내내 화인 논란이 이어졌고, 변호인단이 "화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못한 상황에서 학생들을 벌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지만, 검경은 끝끝내 화인감정서를 법정에 제출하지 않았다.

화재가 발생한 5월 3일 오전 경찰이 현장에서 화인을 조사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학생들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감정서를 검경이 제출하지 않은 경위에 대해서는 억측이 분분하다.

수사기관 대신 부산공대 김모 교수가 1989년 9월 18일 화인 감정에 대한 의견서를 1심 재판부에 제출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여기에서도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김 교수는 화인과 관련해 ▲ 이미 유류가 뿌려져 있는 곳에 화염병이 투척되었을 때 ▲ 경관들이 여러 명 진입하면서 유류통이 넘어지고 유류가 번져나가서 화염병 불꽃으로 화재가 발생할 때라는 두 가지 경우를 가정했지만,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만약 두 번째 가능성이 받아들여질 경우 용산 참사 때처럼 경찰의 '안전진압'이 논란이 될 수 있었다.

일부 학생들은 "경찰이 보유한 총류탄 등 또 다른 요인이 화재로 이어지는 폭발을 일으킨 게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김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정확한 실험은 특수실험시설이 요구되고 본 감정인으로서는 불가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법원, 변호인단의 모의실험 제안에 "비용 없다" 거절

화인 규명의 마지막 기회는 모의실험이었다.

유증기나 소화기 분사압력으로는 결코 대형화재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모의실험을 하면 학생들의 누명을 벗길 수 있다는 게 변호인단의 계산이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은 1990년 2월 2일 화재현장을 300분의 1로 축소한 나무상자 속에 백열등 2개와 불 붙은 헝겊을 넣고 석유를 불어넣는 '약식실험'으로 유증기 발생을 보여줬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석유를 주입하는 등 입자 구성을 무시한 실험으로 검찰이 화인을 조작하려고 한다"는 변호인단의 반발만 샀다.

"3000만원의 비용으로 폐건물에서 엇비슷한 조건의 실험이 가능하다"는 변호인단의 제안에 대해 법원은 "비용 문제도 있고 실험에 나서려는 전문가가 없어서 안 된다"고 일축했다.

동의대사건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첫 공판(1989년 7월 3일) 이후 대법원의 확정판결(1990년 6월 28일)이 있기까지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당시 학생들의 변론을 맡은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명확한 증거 없이도 처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검찰과 법원 모두 모의실험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재판은 그런 식으로 진행됐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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