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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집 기석이 엄마, 이번에 둘째 생긴 거 지웠다나봐."
"아니 왜?"
"기석이 이번에 입학하잖아. 애들 학교 들어가면 줄줄이 돈구멍이니까 그렇지. 잠시 미룬다나봐."
"하긴, 그럴 만도 하네 뭐."

쉽사리 들을 수 있는 이야기. 미혼자의 낙태는 손가락질을 하지만 기혼자의 낙태는 '생활고'라는 명목이 붙으면 되레 용인되곤 한다. 사랑과 판타지가 주가 되는 미혼 연인들과 달리 결혼한 자들에겐 생활과 현실이 그 어떤 것도 불사해야 하는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난 아빠 될 자격이 없어"

 경남 창녕군 길곡면
 경남 창녕군 길곡면
ⓒ 극단 백수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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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작가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Franz Xaver Kroetz)의 작품인 '오버외스터라이히'(oberὅsterreich)를 원작으로 하는 극단 백수광부의 <경남 창녕군 길곡면>.

극에는 눈길만 돌리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소소한 일상 속 남편과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적당 적당하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삶. 같은 회사의 판매직인 아내와 배달직인 남편이 맞벌이를 하며 빠듯하게 적금을 붓고 보험료를 내고 쉴 새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기분이다 싶은 날엔 비싼 가구를 카드 할부로 긋기도 하고 기념일엔 아스파라거스로 위장된 데친 파와 함께 스테이크를 내놓기도 하고 또 가끔은 외식도 한다.

친구들과 부부동반 모임에서 적당히 마시라고 잔소리를 하는 아내나 화투로 잃은 6만원이 아까워 짜증을 내는 남편이나 요즘처럼 지극히 판타지적인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에선 절대 찾아볼 수 없는, 혹은 절대 찾아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에 그들의 모습은 참 징그럽게도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런 그들에게(엄밀히 말해 남편에게) '아이'의 등장(?)은 충격과 공포이자 일종의 '고생길'의 시작이다. 실제로 몸 속에 아이를 품은, 새 생명과 함께 호흡하며 느끼는 어머니라는 존재와는 달리 아버지라는 존재들은 생명의 싹과 탄생에 대해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온갖 미사어구로 포장해도 내 몸은 내 몸, 남의 몸은 남의 몸. 아버지가 된 이들은 아이가 탄생하여 방긋 웃기만 해도 하루의 고됨이 '싹-' 사라진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경험해본 이들의 말이고. 경험 없는 남편이라는 사람들이 갖는 아이에 대한 공포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삶을 짓누를 노동의 부담으로 먼저 다가온다.

'아이가 생겼다'며 환희에 차 있는 아내의 말에 '우와! 신기하다, 나도 아빠다'가 먼저 떠오르느냐, '기저귀 값, 분유 값'이 먼저 떠오르느냐는 순서의 차이일 뿐이라는 말이다.

극중의 남편 또한 그랬다. 아이가 생겼다는 아내의 수줍은 고백에 당황하며 억지로 기뻐하는 척은 했지만 그는 이내 온갖 장황한 설명을 에둘러가며 아내 스스로 아이를 포기하도록 유도하거나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애써 정당화하려 한다. '남들 다 하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은 결코 특별한 게 아니다, 배달 일을 하며 굽실대는 아빠는 아빠로서 자격이 없다, 하다못해 난 대학도 안 나왔다…'.

생명 탄생의 기쁨보다 생활의 균열이 앞서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
 경남 창녕군 길곡면
ⓒ 극단 백수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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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하다 할 수도 있지만 그는 겁이 났을 게다. 특별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그 흔한 해외여행 한 번 못 가보고 집에서 큰소리쳐도 밖에선 지각 한 번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죄송해야하는 자신의 삶을 아이가 보는 것이, 또 아이가 자신과 똑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 겁이 났을 것이다.

곧 아이가 태어나면 아내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고 남편 혼자 벌어오는 월급으로는 둘이 써도 빠듯하다. 우유, 신문, 산악회, 보험, 케이블, 화장품 등 소소한 생활비를 줄이고 없애도 그들 손에 남는 건 10만원이 채 안 된다. 또 줄이고 줄여도 언제 어디서 '돈구멍'이 터질지 모르기에 삶은 지뢰밭과 같다.

그러나 온갖 회유와 반 협박까지도 해보지만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온전히 어머니로서 책임을 다 하고 싶다. 경제적 현실이 1순위인 남편과 달리 모정이 1순위인 아내. 누구에게도 돌을 던지거나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다.

남편은 끝내 번듯하고 큰 병원임을 내세우며 산부인과를 예약해놓기에 이르지만 차마 아내는 그를 따라나설 수가 없다. 어른들 하는 말로 제 먹을 몫은 가지고 태어난다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왜 무작정 아이를 부정하고 지우려고만 할까.

과연 지금 아이를 포기한다고 해서 영화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일까. 왜 남편은 나에게 꿈속에 산다 하면서, 현실에 순응하며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것은 거부하는 걸까. 이대로 산다면 평생 아이를 못 가지는 게 아닐까…. 많은 생각이 교차했을 것이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결국 이들에게 소소한 일상은 다시 '주어진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에서 생활고에 고민하던 남편이 임신한 아내를 목 졸라 죽였다는 기사를 읽으며 '우리랑 비슷한 사람들이 있네'라고 말하지만 결코 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서로를 위안한다.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
 경남 창녕군 길곡면
ⓒ 극단 백수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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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특별한 존재로 살아가고 싶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거대한 도시 속에서 도토리 키 재기를 하듯 까치발로 종종걸음 치는 그저 '소시민'일 수밖에 없다. 생명에 대한 축복보다는 걱정이 앞서고 월급을 받아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빚을 메우고 다시 카드로 빚을 지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이 셋 있는 집이 강남 아파트 한 채 가진 집보다 부자라는 말에 어느새 공감하며 고개 끄덕이는 사람들.

누군가 한숨짓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같은 고민에 빠진 이들이 세상에 47,893,759명은 있다고 위로하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쉼없이 살아가는 팍팍한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유달리 훌륭한 과정도, 특별히 나쁜 결말도 있을 수는 없다고. 그렇기에 중요한 건 절망의 순간에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 보란 듯이 살아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곧 바삭거리는 소소한 일상으로 돌아와 초록색 나무와 빨간 장미나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서도 행복해할 수 있는 멋진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이는 글 | <경남 창녕군 길곡면>∼3월 8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1544-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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