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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뉴스 북벌을 꿈꾼 마지막 군주, 사도세자

판사는 법률에 의해 판단하고, 기자는 인류의 보편적 상식으로 판단한다.

 

이 글은 최근 서울중앙지법이 내린 두 건의 상반된 판결에 대한 기자의 판단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울산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판결만 짧게 보도했을 뿐, 다음날 나온 상반된 판결은 아예 보도하지 않았다. 두 판결을 비교해 그 모순을 지적한 언론도 물론 없었다.

 

왜 그런 상반된 판결이 나왔을까?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두 재판의 판결문을 입수했다. 그 결과 법률 해석의 문제를 떠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모순이 숨어 있음을 발견했다.

 

▲ 민간인학살 손배소 판결문 울산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판결문(왼쪽)과 문경학살사건 판결문.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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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판결의 개요 = 지난 10일 서울중앙지법은 1950년 울산보도연맹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는 국민들이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제19민사부(재판장 지영철 판사)의 이 판결은 군경의 민간인학살이 명백한 '불법행위'였음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사건 이후 그 사실을 은폐하고 적법하다고 주장해온 국가의 행위 또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다음날인 11일 서울중앙지법 제24민사부(재판장 여훈구 판사)는 문경 석달동 학살사건과 관련, 소멸시효 문제를 들어 유족들의 소송을 기각해 버렸다. "문경학살사건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불법행위인 점은 명백"하다면서도, 너무 늦게 소송를 냈기 때문에 '꽝'이라는 것이다.

 

자, 그럼 두 사건과 두 판결문을 좀 더 자세히 비교해보자.

 

울산보도연맹 판결문 결론부분.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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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보도연맹 사건 = 국민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정부가 좌익 관련자들을 전향시키고, 전향자들을 관리·통제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였다. 대외적으로는 좌익전향자 단체임을 표방했지만, 보도연맹의 총재는 내무부장관이, 고문은 법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이 맡았고, 검찰과 경찰 간부들이 하부 지도위원장 또는 지도위원을 맡아 조직을 관리하던 단체였다. 또한 각 지역별로 인원수를 할당함으로써 좌익활동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까지 숫자를 채우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가입시킨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가운데 1949년 11월 13일 보도연맹 경남도연맹 발기대회가 열렸고, 11월 20일 선포대회가 있었다. 이후 시·군연맹과 읍·면지부도 1950년 2월까지 대부분 결성됐는데, 그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석윤 내무부 치안국장은 전국 각 도의 경찰국장에게 요시찰인과 보도연맹원 등을 즉시 구속할 것을 지시했고, 헌병사령관 송요찬은 그해 7월 20일 계엄지역에서는 예방구금을 할 수 있다는 체포·구금 특별조치령을 발령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요시찰인과 형무소 재소자, 보도연맹원들이 군경에 의해 불법 처형됐고, 이 과정에서 경남의 각 시·군에서도 수많은 민간인이 바다와 산골짜기에서 학살됐다. 울산에서 이렇게 학살돼 1960년 4·19 혁명 이후 발굴된 유골만 829구에 달했다. 유족들은 당시 합동묘를 만들고 추모비를 세웠지만,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합동묘까지 해체해 버렸다.

 

또한 마산의 노현섭 유족회장 등 전국유족회 간부들은 '적을 이롭게 했다'는 명목으로 사형 또는 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는 등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국가가 철저히 차단했다. 재판부는 이런 국가의 은폐 및 진상규명 방해행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번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국가는 "원고들이 적어도 1960년 8월 21일 유해발굴 당시에는 사건으로 인한 손해 및 그 가해자를 알았다고 할 것이므로 위자료 청구권은 유해발굴 당시로부터 3년 후인 1963년에 시효로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국가는 또 "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5년이 경과한 1955년 시효는 소멸했고, 이번 소송은 2008년 제기되었으므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참고로 현행법은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를 손해가 발생한 날로부터 5년, 손해 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3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가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채무자(국가)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유족)의 권리 행사나 시효 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거나, 그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하였거나,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거나, 일단 시효 완성 후에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그와 같이 신뢰하게 한 경우에는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 남용"이라고 판시했다.

 

즉 국가가 유족의 진상규명 요구를 방해 또는 외면해놓고, 이제 와서 시효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뜻이다. 이같은 제19민사부의 판결은 아래의 제24민사부의 판결과 분명히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

 

울산보도연맹 판결문 중 소멸시효부분 판단.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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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 석달동 학살사건 = 문경 사건은 1949년 육군 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와 3소대 군인들이 공비토벌을 빙자해 석달마을 주민 127명 중 어린이와 노인 등 88명을 학살한 후, '공비가 저지른 만행'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보도연맹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불법행위임은 명백하게 드러나 있고, 진실화해위도 2007년 6월 "국군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어떠한 선별절차나 법적 근거 없이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으로 명백한 위법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유족들이 국가기관에 진실규명을 지속적으로 요청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유족들 자신은 문경학살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고, 늦어도 유족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한 때인 2000년 3월 18일부터 소멸시효기간인 3년이 훨씬 경과한 때에 이 사건 소송을 제기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피고(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이 현저히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에서 재판부가 시효 소멸의 주요 근거로 삼은 2000년 3월 18일 헌법소원이란 무엇일까? 이는 당시 유족들이 '국가가 문경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나 보상 없이 사건을 은폐해오면서 학살의 진상조사, 명예회복, 피해보상을 위한 특별입법을 아직까지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유족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 행복추구권 등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제출했으나, 3년 후 기각(2003년 5월 15일) 당했던 헌법소원을 말한다.

 

유족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2000년 당시만 해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2005년 5월 31일 제정)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시기였고, 국가가 문경 학살에 대한 책임은 물론 사건 자체를 인정하지도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물론 국가차원의 진상규명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미 유족들은 1961년 진상규명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군사정권에 의해 체포·구금·수배를 당했던 경험으로 인해 뿌리깊은 피해의식과 패배감에 젖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족들은 학살사건을 규명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법률이 제정돼 국가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손배배상 소송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래서 손해배상 소송에 앞서 법률 제정을 위한 헌법소원을 냈던 것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유족들의 이 헌법소원까지 기각해 버렸다. 유족들은 다시 한번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2005년 마침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었고, 그 법에 의해 설치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진상조사를 통해 2007년 6월 26일 문경 학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유족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법률 제정과 이에 따른 국가의 잘못이 공식 인정된 것이다.

 

유족들은 비로소 국가를 상대로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낼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2008년 7월 10일 이번 소송을 낸 것이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재판부는 '왜 2000년에 헌법소원은 내면서, 손해배상 소송을 내지 않았느냐'고 유족들을 나무란다. 그러면서 "손해와 가해자를 안 날이라고 할 수 있는 헌법소원 청구일인 2000년 3월 18일부터 3년이 경과하여 이 소송을 제기했으므로 이 점에서도 피고(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시효소멸하였다"고 판결을 때려버린 것이다.

 

문경학살사건 판결문 중 소멸시효 부분 판단 및 재판부의 의견.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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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판단 = 두 재판의 가장 큰 차이는 이랬다. 즉 울산보도연맹 사건 재판부는 '국가의 시효소멸 주장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고 보았고, 문경 석달동 사건 재판부는 '국가의 시효소멸 주장이 권리남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봤다는 것이다.

 

물론 법률적인 판단은 재판부의 소관이니 그걸 존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재판부도 이번 판결문에서 밝혔듯이 소멸시효란 "우리 민법의 대원칙인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을 지배받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볼 땐 역시 재판부가 예시한 "채무자(국가)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유족)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거나, 그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한 사유가 충분하다. 굳이 '반인권 범죄에는 시효가 없다'는 당위적인 선언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그동안 대한민국은 유족들에게 끊임없이 공포심과 패배의식을 조장해온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유족들이 '법에 의해 진상규명이 먼저 이뤄져야, 손해배상 소송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 잘못인가? 재판부는 '왜 늦게 소송을 냈냐'고 유족들을 나무랄 게 아니라, 코흘리개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 자매를 아군의 총탄에 잃고 설움과 좌절의 세월을 살아온 유족들의 순진한 법치 의식을 오히려 칭찬해야 할 것이다.

 

채의진 유족회장은 이번 재판부의 기각판결에 대해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채 회장은 "2000년 국가가 제대로 의무를 하지 않는다며 헌법소원을 낸 것이 소멸시효 완성의 근거로 제시됐다는 점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11일 국가 상대 손배소송에서 패소한 채의진 문경유족회장(빨간 모자 쓴 이)이 "재판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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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의미 있는 판결 = 문경 사건에 대한 제24민사부의 아쉬운 판결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학살사건 자체를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불법행위인 점은 명백하다"고 명시한 것이라든지, "국가인 피고로서는 국가배상법상의 의무 이행 문제와는 별도의 차원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의 취지에 따라 국민 전체의 여론과 국가 재정, 유사사건의 처리문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상규명 결정상의 권고사항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참작하여 관련 법령을 마련하는 등으로 원고들의 피해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재판부의 의견을 판결문에 명기한 것이 그렇다.

 

이에 따라 전국의 수많은 유족과 유족회, 관련 단체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해야 할 것 같다. 즉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과 함께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한 피해배상 법률 제정 요구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회는 야만의 시대에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국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그 사실을 은폐한 것은 물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감옥에 잡아넣고 합동묘를 파헤쳐 유골을 다시 유기하는 등 세계사에서도 유례 없는 반인권 범죄를 저지른 일에 대해 이제라도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합당한 배상을 할 수 있도록 관련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http://2kim.idomin.com)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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