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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20대의 문동환 목사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민당 총재 시절 지방자치제 쟁취를 위해 단식 투쟁을 할 때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문동환 목사.

내 20대의 문동환 목사는 1988년 11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1년 넘게 열렸던 광주 청문회 위원장 모습으로 뚜렷하다. 서울올림픽 중계는 안 봤어도 광주 청문회 생방송은 열심히 봤다. 텔레비전에서 본 그의 선한 표정과 비음 섞인 느린 말투는 그토록 잔혹한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무대의 한복판에서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문동환 목사는 88년부터 91년까지 4년간 정치 활동을 한 다음 92년 초 미국으로 떠났다. 평생 고생한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남편보다 더 고생한 푸른 눈과 흰 머리의 아내 문혜림의 청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준 셈이다.

 

나 역시 광주 청문회가 끝난 뒤에는 그의 행보에 관심이 없었다. 광화문, 명동, 서울역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 "88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를 외쳤지만, 교회로 돌아가면 기타 치면서 찬송하고, 울고불고 소리 지르면서 기도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 가서 환자들에게 전도하고, 동아리에서 성경 공부하고, 그 틈에 부모 눈 피해가며 연애도 하려니 제법 바빴다.

 

무엇보다 광주 청문회 위원장으로서는 정의롭고 멋지게 보였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그는 해방신학을 가르치는 자유주의 좌경 교수이자 목사였다. 보수적인 기독교 환경에서 20년 동안 갇혀 살다가 갑자기 거칠고 험한 현실에 내던져진 나는 이념적 분열증으로 심하게 진통했고, 그를 '정상적인' 목사로 받아들일 신학적 지식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잊고 지낸 그를 다시 만난 건 20년 가까이 지난 2006년이었다. 만주에 있는 명동촌 일대를 몇 번 여행하면서, 김약연, 안병무, 김재준, 강원룡, 윤동주, 문익환, 문동환 등 그곳 사람들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었다. 1899년 2월 18일, 지금부터 꼭 110년 전에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간도로 떠났던 사람들, 거기서 태어나서 남한으로 돌아와 대한민국의 혼을 흔들어 일깨웠던 사람들을 책에서 만나는 흥분 속에서 30대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문익환 평전>이나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에서 만나는 문동환 목사는 늘 문익환 목사의 동생으로 등장했다.

 

2006년 겨울, 나 역시 미국으로 왔기에 명동과 용정의 신앙 선배들에 대한 공부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문동환 목사는 그렇게 다시 잊혀졌다.

 

2007년 4월, 뉴욕에서 열린 <미주뉴스앤조이> 창간 행사 때 축하 케이크를 그와 함께 자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지금도 꾸준히 열리는 목요 기도회 모임, 주일 예배, 송년 모임 때 문동환 목사 내외를 가끔 만나 옛이야기를 듣는 기쁨은, 말라비틀어진 미국 생활에 그나마 생기와 도전이 되어준다.

 

 2007년 4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미주뉴스앤조이> 창간 행사에 문동환 목사가 참석해 함께 케이크를 잘랐다. 제일 오른쪽이 <뉴스앤조이> 대표 방인성 목사, 세 번째가 문동환 목사, 네 번째가 <미주뉴스앤조이> 최병인 대표, 제일 왼쪽이 기자.

그의 자서전이 올해 봄 삼인출판사에서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변에서 자서전을 쓰라고 권했을 때 처음에는 거북해서 주저했단다. 하지만 그의 일생은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나 마찬가지 아닌가. 특히 그의 삶과 신학 여정은 궤를 같이한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읽으면서 "삶과 신학이 이렇게 얽혀서 발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면서 마음을 바꿨다. 1년 동안 정리한 초고가 출판사에 넘어갔는데, 분량이 워낙 방대한 탓에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자서전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늦게나마 설 인사를 드릴 겸 뉴욕에서 한 시간 떨어진 뉴저지의 블룸필드라는 조용한 마을에 있는 작은 집을 방문했다. 이제는 아내 못지않게 백발인데다가 얼굴의 주름도 더 깊어졌다. 하지만 88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기억력과 달변은 줄어들지 않았다. 두 시간 가까이 끊어지지 않는 얘기를 주워 담기에 바빴다.

 

박정희부터 이명박까지, 착각과 깨달음과 단절의 역사

 

여러 얘기를 나눴지만, '각'(覺, 깨달음), '단'(斷, 끊음)의 관점을 갖고 성서와 세상사를 해석했다. 1970년 1년 동안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교환 교수로 있으면서 해방신학과 에리히 프롬을 공부한 뒤 귀국해서 역설했던 '죽음 문화'와 '생명 문화'의 투쟁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 얘기를 풀어보련다.

 

"박정희가 등장했을 때, 처음에는 모두 그에게 붙어서 살려고 하지 않았어? 그가 우리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거라고 믿었지. 하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어? 전태일 분신, 동일방직 사건과 YH 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에 이어 김영삼까지 정계에서 쫓아내고, 부마 항쟁이 일어나니까 탱크를 앞세워서 누르려고 했잖아? 그런데 박정희는 결국 암살됐어."

 

문 목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역사의 과정과 결과였다. 그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성서 역사적으로 볼 때, 악한 것은 언제나 그럴듯한 말로 시작해. 그래서 모두들 선인 줄 알고 따라가지. 하지만 악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것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드디어 악의 실체를 보게 된다고. 이것이 바로 '각'(覺)이야. 그럼 사람들은 투쟁을 시작해. '단'(斷)에 이르는 거야. 마지막 투쟁의 때에 악은 극한의 모습을 보여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극한의 악이었어.

 

하느님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보면, 언제나 악한 것이 선한 탈을 쓰고 나타나고, 그것의 실체가 드러나면 반대하는 사람이 나오고, 그걸 억누르면 반발한다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악의 정체가 명확하게 폭로되고, 억눌렸던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각과 단을 하게 되면서 역사가 진행된단 말이야."

 

문 목사는 국민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것, 그리고 지금 반발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의 독재가 역설적으로 민주화에 공헌했어.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깨달은 거야. 그러나 또 착각했어.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 되면 경제가 나아지리라 기대했어. 그건 착각이야. 그 사람들도 산업 문화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야. 모두를 잘살게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 착각이라는 걸 깨닫고 사람들은 분노했어. 그 분노가 이명박 지지로 둔갑한 거야.

 

하지만 잘 보라고. 박정희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듯이, 지금 이명박이 자본주의, 물질주의, 세계화가 나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사람들은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잘살게 되리라 착각하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될 거야.

 

오바마와 예수, 공통점과 차이점

 

 박정희 정권 시절 YH 사건에 연루되어 연행되는 모습(왼쪽). 택시를 타고 구치소에서 집으로 잠시 나오는 길. 장난기 어린 얼굴과 수의가 신기하게도 잘 어울린다.

 

미국도 마찬가지야. 부시에 대해서 염증을 느낀 수많은 사람들이 참신한 젊은이 오바마에게 열광했어. 하지만 워싱턴 광장에 모인 인파가 집단적 각(覺)을 했는지는 의문이야. 부시와 비교하면 조금은 진보하겠지. 그러나 오바마도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진 못할 거야. 진짜 문제의 본질은 산업 문화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거기까지는 아닌 것 같아.

 

일견 보면 오바마와 예수의 모습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워싱턴에서 아우성치는 군중을 볼 때 5000명의 민중을 먹이는 예수의 모습이 떠오르더군. 예수가 똑똑했기 때문에 충분히 랍비가 될 수 있었는데 그는 죄인들에게 내려갔어. 오바마도 가난한 자들에게 내려갔어. 그리고 둘 다 악을 지적했어. 그러니 사람들이 '옳소' 하지. 예수가 '새것(하느님나라)을 주마'고 했듯이 오바마도 '체인지'를 외쳤어. 그러니 사람들이 열광하는 거야.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어. 민중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하자 그 길을 피했어. 왕좌에 가지 않았어. 그는 악과 선을 명확히 본 거야. 권좌에 오르면 악과 타협을 하게 되어서 선의 구별이 모호해지거든. 오바마는 '내가 들어가서 고치겠다'고 했고, 조금은 고쳐지겠지만, 그걸 진짜 선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고. 예수님이 깨우치신 선과 악의 기준으로 다시 갱신되도록 노력해야 해."

 

죽을 고생 뒤에 갖게 되는 '각'(覺)과 '단'(斷)

 

문 목사는 성서 이야기도 각과 단의 관점에서 풀었다.

 

"구약 성서를 보라고.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들은 모세처럼 깨닫지 못했어. 모세는 애굽 왕자처럼 살았지만,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했어. 하지만 히브리 노예들은 그런 모세를 이해하지 못했어. 그래서 모세는 광야로 나가서 40년을 외롭게 살아야 했지.

 

하느님이 그를 불렀어. 자기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라고 명령했어. 그러나 모세는 두려웠어. 백성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하느님의 엄명을 받은 모세가 그들에게 가서 보니, 그들은 이미 깨달았고, 끊을 준비가 되어 있었어. 그들이 집단적으로 각과 단을 하게 되자 모세는 바로 왕과 싸웠고,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고 나올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광야에서 백성들은 또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애굽에서는 그래도 고기도 먹고 잠도 편히 잘 수가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니까 고생을 하게 되고, 그러니 또 다른 우상을 만들어서 숭배했다. 이것이 제대로 된 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을 고생을 한 다음에야 그들에게 집단적인 각(覺)과 집단적인 단(斷)이 생겼어. 하지만 늘 한계가 있는 법이야. 어느 단계까지 간 다음에는 다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고. 이렇게 각과 단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역사는 한 차원 새롭게 승화한다고. 우리 역사도 그러지 않았어?"

 

그럼 궁극적인 깨달음은 뭘까. 문동환 목사는 물질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고 자체를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70년대부터 줄기차게 얘기해온 것이 '산업 문화는 죽음의 문화다. 이것을 끝장내고 생명의 문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음 문화'에서 '생명 문화'로

 

"1970년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1년간 교환 교수로 지낼 때 에리히 프롬의 책을 많이 읽었어. 그가 '산업 문화는 죽음의 문화다. 모든 것이 상품화한다. 경쟁하면서 공동체가 파괴되고 이웃이 없어진다.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대량 생산을 하고,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투쟁하면서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얘기를 했거든. 한국에 돌아와서 그 얘기를 소개하면서, 앞으로 생명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어. 몇 년 동안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지.

 

한번은 수도교회에서 이런 설교를 했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참된 공동체가 아니다. 꿀단지는 집에 있고, 몸만 여기 와서 예수 믿고 천당 가겠다고 하는 것뿐이다. 하느님나라는 서로 기가 통하는 공동체다. 산업 문화가 이걸 갈가리 찢어놓았다. 이렇게 되자 세계 여기저기서 대안적인 공동체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얘기를 했어.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 교회 청년 다섯 명이 우리 집에 찾아온 거야.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공동체 합시다' 하지 않겠어? '이 친구들아, 그게 그리 쉬운 줄 아나?' 했더니 '그럼 왜 설교를 했습니까?' 하는 거야.

 

그래서 1년 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에 모여서 성서랑 여러 가지를 공부한 다음 다섯 가정이 우리 집 옆에 집을 하나 지어서 5~6년 같이 살았어. 그게 바로 '새벽의 집' 공동체야. 아주 재미있게 지냈어.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어. 우리 젖줄은 다 산업 문화에 대고 있잖아? '이건 아니다. 스스로 먹고 살도록 하자. 각자 자기에게 맞는 새로운 생명 지향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들이 역할을 분담해서 연구하고 교류하면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생각했어. 그리고 76년 2월 28일, 농촌으로 내려가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기로 결정했어.

 

그런데 그 바로 다음날인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구국 선언을 할 때 내가 설교하고 곧바로 감옥에 들어갔잖아? 농촌 가겠다고 하면서 박정희 퇴진 운동을 했으니 철이 없었지.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농촌에서 공동체를 만들어나갔는데, 농사 경험도 없고, 정서도 다르고, 열심히 실무를 하던 이가 뇌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때 '민주화 운동과 공동체 운동을 같이 할 수는 없겠구나' 싶었고, 당시 워낙 시급했기에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지.

 

사람들은 '이건 아닌데' 하면서 '그럼 대안은 도대체 뭔가' 고민하잖아? 나는 지금도 사랑의 공동체가 대안이라고 믿어. 그걸 하려면 자기 것을 포기해야 해. 하지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가 안 되는 거야. 산업 문화에 워낙 강하게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게 바로 신약성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 얘기라고. 그 청년은 죽음의 문화에 세뇌되었기 때문에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없었어.

 

부자 청년과 난쟁이 삭개오

 

 현실은 어둡고 절망적인 것 같지만, 때가 차면 선과 악을 분별하고 항거하게 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처럼 먼저 깨달은 이들이 외쳐야 하는 일인데, 그런 역할을 잘 해야 한다고 기자에게도 요구했다.

그러나 신약성서를 보면 부자이면서 구원 받은 사람이 하나 있어. 난쟁이 삭개오야.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았어. 그래서 사회적 반감을 갖고 있었어. 열심히 노력해서 세리가 되었고, 부자가 되었지만, 그의 속은 비참했다고. 물질이 그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한 거야.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감싸주었어. 그때 삭개오는 자기 재산을 포기했지. 죽음의 문화에서 생명의 문화로 돌아선 거야. 우리도 우리 삶의 비참함을 보아야 한다고. 한국에서 살인 사건과 강간 사건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 향락과 물질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끝이 없어. 그걸 끊어야 해.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여기로 들어오는 불법 이민자 문제가 나를 사로잡았어. 산업 문화와 관련해서 보니까 이런 떠돌이들이 전 세계에 수억이야. '떠돌이', '불법 이민자'는 산업 문화의 암적인 표현이지. 따지고 보면, 북간도에서 태어나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조국이 아닌 미국에서 살고 있는 나도 떠돌이 인생이지. 구약성서의 히브리 민중도 떠돌이였고. 그래서 '떠돌이 신학'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대안을 생산하는 연구소를 하나 만드는 게 꿈이다. 이번 여름에 한국 가면 제자들이랑 그걸 의논하려고 해.

 

지금 이대로 가면 모두 죽게 되어 있어. 죽음의 문화 늪에 깊이 빠져들고 있거든. 애굽의 히브리 노예들처럼 인류 전체가 떠돌이가 된다고. 우리가 이걸 보지 못하고 있어. 산업 문화의 성전(聖殿)인 텔레비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설교에 다 넘어가고 있어. 이걸 바로 보고 끊어야 한다고."

 

문 목사의 안타까움은 언론과 교회의 각성으로 이어졌다.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그걸 먼저 발견하고 깨달은 누군가가 얘기해줘야 하는데, 언론과 교회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현실을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윗 때부터 시작된 제도 종교의 문제

 

"성서를 보면, 출애굽 단계에서 한 번 깨닫고, 바벨론에서 다시 깨닫고, 예수님 때 또다시 깨닫게 되지. 그래서 역사는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되는 거야. 예수의 설교는 짧고 쉬웠어. 민중들은 고생과 고생의 거듭했기에 잠재적인 각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예수의 설교에 쉽게 반응한 거야. 그런데 나중에 교회라는 제도가 만들어지잖아. 예수는 제도가 아니야, 운동이지. 제도는 타락할 수밖에 없어. 이걸 탈피해야 한다고.

 

하느님 운동이 제도 종교가 된 것은 다윗에게서 시작되었어. 출애굽 공동체는 본래 왕을 가지지 않기로 서약했어. 당시 왕들은 다 스스로를 신적인 존재로 주장하면서, 신의 이름으로 민중을 혹사시켰거든. 이걸 경험한 출애굽 공동체는 야훼밖에는 아무 신도 섬기지 않기로 했어. 이것은 왕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해.

 

그런데 왕을 가진 주변 종족들이 정비군을 거느리고 침공해오기에, 이를 감당할 수 없어서 왕 제도를 채택해. 다윗이 통일 왕국을 이룩하는데, 그는 출애굽 전통을 이어받은 자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농민 혁명을 하는 혁명군의 부대장이었어. 그래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이 된 후 북쪽의 출애굽 전통을 가진 열 지파를 자기 수하에 넣기 위해서 그들이 가진 법궤를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가두어버리고 말지.

 

본래 법궤는 어디나 문제가 있는 곳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곤 했어. 그랬는데 성전에 갇히게 되자 북쪽의 열 지파는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러면서 하느님은 성전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 거야. 성전 밖에 나가서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

 

그래서 예수님도 참된 예배는 예루살렘도 사마리아도 아니라고 한 거야. 참된 예배란 사랑의 영으로 사는 삶만이 참된 예배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에서 뛰쳐나왔어.

 

서구 교회는 완전히 제도 교회가 되었잖아. 그러나 운동은 이걸 초월해야 한다고. 이걸 명확히 깨닫고 때려 부숴야 한다고. 그리고 운동으로 집중해야 해. 그런데 아직 그런 각성이 안 되어 있어. 때가 오지 않은 거지.

 

한국 교회는 산업 문화의 낙오자들을 돕는 일은 하고 있어. 그걸로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건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리고 그것이 있어야 자본주의가 유지가 되고. 그걸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아직 몰라."

 

그는 다윗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쪽 유대는 다윗의 전통을 이어받았어. 그래서 성왕이라는 신화를 만들었지. '다윗의 줄기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얘기를 만든 거야. 하지만 북쪽 이스라엘은 출애굽 전통을 이어받았어. 그래서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하느님 뜻에 어긋나면 고생한다. 죽을 고생하다가 비로소 악을 보게 된다. 새것을 찾게 된다. 하느님 뜻에 따라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얘기했단 말이야. 호세아, 예레미야, 에스겔이 그랬어. 원래 예레미야에는 메시아 얘기가 없었어. 그건 나중에 들어간 거야.

 

그런데 다들 다윗 왕의 후예만 생각하고 선민사상만 갖고 이방 민족을 개처럼 여겼어. 지금 이스라엘도 그런 사상에 붙잡고 있지 않나. 이건 아니지.

 

그러나 바벨론에서 고생하는 동안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깨달은 시인들이 있었어. 야훼만이 참된 신이라고 깨달은 그들은 모든 민족이 꼭 같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게 된 거야. 그들이 쓴 시 네 편이 있는데(이사야 42:1~10, 49:1~6, 50:4~9, 52:13~53:12), 이 시들은 다 하느님은 모든 인류를 다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역설하고 있지. 그리고 이 신앙에 따른 자들이 룻기와 요나서를 썼어.

 

출애굽 전통을 따랐던 자들, 먼저 깨달았던 예언자들처럼, 지금 현실의 문제를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나서서 '이건 아니다', '이러면 다 망한다'고 외쳐야 해."

 

먼저 깨달은 자들이 입을 열어야 한다

 

 5년 전 자녀들, 조카들과 함께 북간도 명동을 가서 찍은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자녀들과 조카들은 명동 방문이 처음이라고 했다.

문동환 목사의 이런 생각을 함께 고민하고 이어나가는 믿을 만한 사람들이 있는지 물었다. 이번에는 질문과 대답 사이의 공백이 제법 길었다. 그러더니 한신대와 기장에 대한 짙은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한신대를 생각하면 아쉽고 안타까워. 나나 형님이나 명동에서 예수의 신성보다 인간의 중요성을 먼저 느낀 사람들이야. 내가 6살 때 목사가 되겠다고 말한 건 나라, 민족, 사람들을 생각했기 때문이지, 예수의 신성을 생각하면서 목사가 되겠다고 했겠나."

 

여기서 잠깐 말을 끊고 사족을 붙이자면, 문동환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쳐지지 않는 생이란 무의미한 것'이라는 얘기를 집, 학교, 교회에서 밤낮 들으면서 몸으로 익혔다. 당시 '북간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던 김약연 목사의 민족 사랑, 나라 사랑, 인간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자란 그에게 목사란 바로 그런 존재여야 했다.

 

"그런데 요즘은 어때?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을 하면서 자란다고. 외국 나가서 새로운 지식을 갖고 와서 그걸 얘기한다고 하지. 하지만 선과 악에 대한 민감성, 역사에 대한 충실성, 이런 게 상대적으로 빈약해졌어. 모두 어렵게 교수 자리 들어가니까 거기 안주한단 말이야. 힘든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거 못한다고. 안타까운 일이지.

 

기장(기독교장로회)이 다른 교파 교회가 성장하는 걸 부러워하고 있어. 숫자 콤플렉스가 있는 거야. 기장은 원래 커질 수가 없어. 그런데 키우려고 하니까 혼도 팔아먹는 거야. 경건주의, 보수주의로 돌아가고 있다고. 우수한 학생들에게 미국이나 독일 가서 공부하라고 하면, '큰 교회 가서 부목사 되어서 목회하는 법을 배우는 게 빠르다'고 대답한다고 하더군. 학위 받아봐야 취직도 힘들거든. 그러니까 제도 교회의 쉬운 길로 들어가는 거야.

 

물론 젊은 사람들 중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하느님이 우리를 교육하시는 방법이 있어. 역사의 고난을 통해 인류를 각성시키시는 거야. 때가 이르면 역사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어."

 

자서전 통해 배움의 은총 누릴 봄을 기다리다

 

 5년 전 자녀들과 방문한 고향 명동촌에 있는 명동교회에서 당시를 설명하는 문동환 목사. 그 옆에 박용길 장로가 서서 얘기를 듣고 있다. 그러고보니 1909년 세워진 명동교회 역사가 올해로 꼭 100년이 되었다.

 

2006년 출간된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서평을 쓸 때 나는 글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다.

 

"올 여름 두 분의 죽음을 접하면서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7월 노환으로 별세한 세계선린회 고 이수민 회장은 북간도의 용정에서 태어나 그곳의 은진중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가난한 나라의 개발 사업에 마지막까지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8월 타계한 고 강원룡 목사는 함경도에서 태어났으나 은진중학교에 가서 스승 김재준 목사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용정과 은진중학교는 그의 널따란 신앙과 신학의 자궁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기독교계는 물론 한국 사회에서 별과 같은 존재였던 북간도 출신 인사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 개인과 가문과 민족에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건들이 그득한 곳이 북간도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배움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기도 전에 북간도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사건들과 사람들이 우리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말 것 같아 안타깝다."

 

문동환 목사는 자신이 명동에서 태어난 막둥이라고 얘기하면서 웃었다. 마지막 생존자라는 뜻일 게다. 그의 비음 섞인 목소리를 듣고, 그의 선한 백발과 부드러운 주름을 보고, 그의 가르침을 받기에는 공간적 거리가 너무 멀다. 아쉬운 일이다.

 

계절의 봄은 때가 차면 저절로 돌아오지만, 한겨울보다 더 꽁꽁 얼어 있는 대한민국에 시대의 봄은 언제나 다시 오려나. 문 목사의 얘기를 듣노라니, 우리가 지금 한겨울에 덜덜 떨고 있으며 죽음의 문화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는 각(覺)을 다 같이 하고 있는지부터 돌아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 죽음의 얼음덩어리를 반드시 단(斷)하고 생명 문화로 돌아서고야 말겠다고 결단해야만 새봄이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지 않을까 싶다.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 배움의 은총을 누릴 따뜻한 봄을 지금부터 기다리면서 추운 겨울을 버텨야겠다.

덧붙이는 글 | * <한겨레> 기획 연재 '길을 찾아서' 중에서 2008년 7월 20일부터 10월 1일까지 52회 연재한 '떠돌이 목자의 노래'가 있다.
* 다음에 '문동환의 조각돌'이라는 아담한 카페가 있다.

이 기사는 <미주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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